27. 오랜만에 화장해보기

그 날은 뭔가 이상한 날이었다.

by 헤 HE

그 날은 뭔가 이상한 날이었다. 가만히 누워 가득 솟아오른 화장대를 보고 있었다. 그것들을 처리하면 내 방도 훨씬 깔끔해 질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갑자기 힘이 솟아올라, 쓰레기 봉투를 구해와서는 화장품들을 하나하나 쓰레기 봉투에 넣었다(나중에 엄마에게 걸려 혼나고는 내용물-소재별로 분리수거했다). 점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 이거 얼마 주고 산 건데’. 차마 버리지 못한 ‘아까워’ 구역의 물건들의 수가 점점 불어났다. 그리곤 ‘이거 색 예쁘다고 대란 났던 템인데..’라며 잠시만 쉰다는 명목으로 ‘대란템’들의 발색 타임이 시작됐다.

작게 시작한 색깔 테스트가 점점 손등을 타고 올라왔다. 쿠션형 제품들은 얼굴에, 눈가에도 예쁜 색을 바르고, 몇번 쓰지 않은 틴트, 하이라이터, 섀딩을 마음 대로, 원하는 만큼 발랐다. 버리기엔 아까우니까. 거울을 보고 웃음이 터졌다. 모든 제품을 치덕치덕 발라 뭉치고, 끼고, 전체적으로 색이 진했다. 화장을 오랫동안 안해서 감각을 잃은 모양이었다.

박박 문질러 깨끗하게 세수를 했다. 화장품들은 마음에 든 몇개만 두고 전부 깔끔하게 버렸다. 여전히 지저분한 방이지만 내가 웃은 만큼은 깨끗해졌다. 다시 자리에 누워 생각했다.

오늘의 나는 뭔가 이상했다고, 하지만 나쁘지 않았다고 머릿속으로 중얼거렸다. 나는 이 화장법의 이름을 ‘깔깔화장’으로 붙였는데, 뭔가 엉망으로 만들어 버리고 싶을 때나 망쳐버리고 싶을 때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화장법이였다. 속상한 날, 잘 안쓰는 쿠션부터 집어들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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