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주

내 삶을 조용히 지탱해 주는 것들

by 김태은

지금은 밤 10시 34분.
남편과 아이는 이미 곤히 잠들어 있고, 나는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집안의 흔적들을 하나하나 정리했다. 싱크대의 물기를 닦고, 바닥에 흘러 있던 작은 부스러기들을 모아 쓰레기통에 비우고 나서야 비로소 냉장고에서 캔 맥주 하나를 꺼냈다.


아사히 쇼쿠사이.

요즘 가장 좋아하게 된 맛이다. 손에 닿는 금빛 표면은 이유도 없이 마음을 차분하게 만들곤 한다.


예전엔 맥주를 꽤 자주 마셨다.
일주일에 한 번도 아니고, 하루에 한 캔씩. 작은 캔은 늘 어딘가 모자라서 500ml를 홀짝이며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던 밤들도 많았다.


하지만 결혼을 하고, 술을 거의 마시지 않는 남편과 살게 되면서 그 습관은 천천히, 거의 소리 없이 줄어들었다. 임신을 하고 나서는 더더욱. 그때는 입맛에서 아예 빠져 있었으니까.


그렇게 어느 순간, 나의 삶을 윤택하게 해 주던 것 중 하나가 슬며시 페이드아웃되듯 사라져 있었다. 누가 가져간 것도 아닌데, 손을 뻗으면 닿지 않는 거리로 떨어진 것처럼.


다시 맥주를 마시게 된 건 정말 사소한 계기였다.
어느 날 퇴근길, 편의점에 들렀을 때. 탄산수나 하나 사볼까 하고 냉장고 앞에 서 있었는데, 자연스럽게 맥주 코너로 눈길이 미끄러졌다.


작은 캔 하나에 사천 원이라니, 언제 이렇게 비싸졌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아사히의 고급 라인이 ‘4개 12,000’이라는 하얀 종이 팻말을 앞세우고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한 캔에 사천오백 원인데, 네 캔에 만 이천 원?


나는 이런 행사에 약한 사람이다. 조금이라도 좋아하는 음식이면 편의점의 원플원, 투플원 행사에 기가 막히게 넘어간다. 남편은 그런 나를 보며 “편의점이 저런 행사를 하는 이유가 바로 당신 같은 사람 때문”이라고 말할 정도다.


오랫동안 잊고 지낸 맥주였는데도, 네 캔을 사면 육천 원을 버는 셈 아닌가— 하는 나만의 비밀스러운 계산이 나를 가득 채웠다.

결국 두 종류뿐이었던 고급 라인, 황금색과 은색 캔을 각각 두 캔씩 집어 들었다. 조금은 들뜬 마음으로.


그리고 두 아사히 맥주는 나의 기대에 아주 충실하게 부응해주었다. 부드러운 목넘김, 적당한 달콤함, 지나치게 쓰지 않은 맛이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내 마음에 스며들었다.


그렇게 나는 다시 맥주와 함께하는 소소한 밤의 루틴을 되찾게 되었다. 요즘 나는 일주일에 한 번쯤 맥주를 꺼낸다. 이번 주도 잘 지냈다, 그런 순간에.


남편과 아이가 나란히 잠든 밤, 조용해진 거실을 바라보며 작은 축배를 들고 싶어질 때. 캔을 열고, 거실의 형광등을 끄고, 좋아하는 이케아의 이샥트 조명을 켠다. 주황빛이 카페트 위에 얇게 번져가고, 그 빛과 부드럽게 어울리는 소파에 몸을 기대면 마음도 따라 풀어진다.


사람이 없어도, 음악이 없어도 괜찮다. 조명과 소파, 그리고 한 캔의 맥주만으로도 충분한 밤이 있다.


이런 순간에야 비로소 깨닫는다.
내 삶을 조용히 지탱해 주는 것들이 이렇게 가까이에 있었구나 하고.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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