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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외면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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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유진 Sep 30. 2022

마흔일곱, 졸업합니다.

01 오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었다.


2016년 7월 나는 오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었다. 스물다섯에 입사해 내가 일한 곳은 서울에 있는 한 대학병원의 도서관이었고, 의학도서관 사서인 나에게 사람들은 하나같이 자리가 너무 아깝다고 했지만 내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지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생각해보면 퇴사는 미룰 수 없는 결정이라고 생각했다. 주말 부부를 끝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남편 회사 근처에 작은 학회에서 저널을 발행하는 일이 있다기에 면접을 봤고, 입사가 결정되었다. 17년 만에 새로운 환경과 새로운 사람들로 좀 힘이 들었는지 갑자기 소변을 볼 때 불편함이 느껴져서 산부인과를 찾았다. 방광염이었다. 치료를 하는 중에 산부인과 원장님은 국가 건강검진 대상자였던 나에게 자궁경부암 검사를 함께 권유했고, 마침 잘 되었다는 생각에 그러자고 했다.


결과가 나왔다는 문자를 받고도 병원에 가는 일을 차일피일 미루게 되었다. 뭐 별일 있겠냐는 막연한 생각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러던 어느 날 우편함에서 결과가 동봉된 우편물을 발견했고, 거기에는 검사 결과와 함께 추가적인 검사를 하는 게 좋겠다는 권고가 있었는데, 그런데 그 순간을 기억해보면 결과지를 받고 나는 우편함 앞에서 한참 서 있었던 것 같다. 당황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현실감이 좀 떨어져 그랬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우선 나는 결과지에 나온 용어들로 이리저리 검색을 해보았다. 믿을 수 없는 이야기들과 믿고 싶지 않은 이야기들이 넘쳐 났지만, 나는 내가 믿고 싶은 이야기만 열심히 읽었다. 순간 막막했다. 병원에서 근무할 때는 외래에 가는 게 일도 아니었는데 병원을 나오니까 병원에 관련된 모든 일에 쌩초보가 된 것 같았다. 내 주변 사람들은 이런 일이 있을 때 에게 바로 전화했고, 의사도 아닌 나는 이것저것 물어보는 사람들에게 내가 아는 선에서 조언을 해주곤 했었는데, 나는 누구에게 이 상황을 전하고 조언을 구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지방에 있는 병원에 가야 할지, 퇴사했지만 전 직장이었던 병원에 가야 할지, 아니면 혹시 나중을 대비해서 아예 큰 병원에 가는 게 맞을는지, 오만가지 경우의 수를 반복하느라 밤이 되어도 잠이 오지 않았다.


우선, 최대한 빨리 이런 고민과 걱정을 덜어 버리고 싶었기 때문에 가장 먼저 외래 날짜를 잡을 수 있는 곳으로, 그리고 지방 말고 수도권으로 병원을 결정했다. 왜인지 모르지만 그렇게 하고 싶었다. 그래서 분당서울대병원 산부인과에 진료 예약을 하고, 진료일을 기다렸다.

 




02 수술실은 생각 외로 따뜻했다.


교수님은 밝은 얼굴로 나를 맞으셨다. 웃으면서 지방에도 병원이 많은데 왜 여기까지 오셨냐는 얘기도 했다. 나는 그 말을 뭐 그리 대단한 병도 아닌데 수도권의 상급종합병원까지 왔냐는 말로 해석했고, 안도감을 느꼈다. 새로 검사를 해보자는 얘기 없이 교수님은 바로 자궁경부 원추절제술을 해야 한다고 수술 날짜를 잡으셨다. 이 수술은 자궁경부의 일부를 절제하는 방법으로, 자궁 경부 상피 내 종양을 치료하고 진단하기 위한 목적으로 실시한다고 서울아산병원 의료정보에서 검색해 보았기에 알고 있었다. 조직을 떼 내어 치료를 하고 떼낸 조직으로 진단을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원추절제술은 당일 입원해서 수술하고 퇴원하는 비교적 간단한 수술이었다. 새벽에 입원 수속을 하면 침대에 누워 수술을 받기 위한 수술 대기실로 이동하고, 거기에 누워 있으면 한 명씩 수술장으로 들어가는 수순이었다. 침대에 누워 움직이는 천정을 보고 있으니 오만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쳐갔다. 그중 가장 마음에 걸렸던 것은 엄마에게 알리지 못한 것이었다. 엄마에게는 말하지 못했다. 아직 뭐 큰일이 일어난 것도 아닌데,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순간 내가 깨어나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마음이 들어 갑자기 무서워지기도 했다.  


복잡한 마음으로 들어선 수술실은 생각 외로 따뜻했다. 차가운 침대를 상상했지만 그곳은 따뜻한 공기로 가득 차 있었고 음악이 흐르고 있었나 그건 생각나지 않는다. 간호사 선생님과 레지던트로 보이는 선생님이 일상적인 얘기를 하는 게 들렸다. 그러다가 "주사 놓을게요. 불 빛을 보세요."였나 누군가 나에게 무슨 말을 했는데, 그리고 눈을 떴을 때 남편이 내 손을 잡고 옆에 있었다. 수술은 끝났고, 나는 회복실이었다. 손목을 보니 내 이름과 생물학적인 정보가 기입된 팔지가 있었고, 반대편 손목에는 내가 머리를 묶었던 동그란 머리끈이 걸려있었다. 아마도 간호사가 내 손목에 걸어 준 것 같았다. 별 것 아닌 것에 마음이 따뜻해졌다.  


그리고 나는 또 잠들었는데, 눈을 뜨니 교수님이 오셨다. 교수님은 역시 웃으면서 수술은 잘 되었고, 떼어낸 조직은 검사를 보낼 텐데 그 결과를 보러 오면 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날은 이렇게 멀리 남편을 데리고 올 필요는 없다며 농담을 건네셨다. 역시 교수님의 웃음과 농담에 내 마음은 편안해졌다.


수술 당일 퇴원하고, 다음 날을 외래를 다시 가야 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엄마 집으로 갔다. 엄마는 날벼락을 맞은 얼굴로 무슨 일이냐며 놀라셨지만, 이내 아무렇지 않은 나를 보고 안심하는 것 같았다. 다음 날 외래를 갔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03 빼곡한 일정에 내 이름이 들어갔다.


검사 결과를 보러 병원에 가는 날이 다가왔다. 새벽에 집에서 출발해 진료 시간에 맞춰 병원에 도착해 접수를 하려고 하니 원무팀으로 방문하라는 안내가 떴다. 원무팀 담당자는 나에게 암환자 산정특례 등록을 해야 한다고 했고, 나는 믿을 수 없고 믿기도 싫었지만 그에게 따지고 물을 일을 아니라는 생각에 침착하게 서류를 작성하고 외래로 갔다. 남편도 나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외래에서 진료 순서를 기다렸다. 남편을 두고 혼자 와도 된다고 농을 던지던 그 교수님도 조직검사 결과에 당황하셨는지 쉽게 입을 떼지 못했다.  "제가 암인가요?"라고 내가 먼저 물었고, 교수님은 담백하게 "네."라고 하셨다.


교수님은 수술은 불가피하며 다만 어떤 수술을 할지 의논 후 결정하면 된다며 노트를 펼치셨다. 빼곡한 수술 일정에 내 이름이 들어갔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은 두 가지였다. 원추절제술을 좀 더 크게 하는 것과 자궁을 적출하는 것. 전자는 아이를 가질 수 있긴 하지만 가능성을 매우 떨어지고 절제한 부위 근처에 혹시 암세포가 있다는 게 확인되면 다시 수술을 할 가능성이 있고, 후자는 암세포를 깔끔하게 제거할 수 있는 방법이긴 하지만, 아이가 없는 우리 부부에게 어려운 결정이었다. 어떤 가능성을 남겨놓아야 할지 결정은 내 몫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정말 나는 내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을까?


이후 나는 집으로 돌아와 밤마다 울었던 것 같다. 처음에는 남편을 원망하고, 다음에는 엄마를 원망하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를 원망했다. 결혼을 후회하고 퇴사를 후회하고 후회와 후회를 거듭하다가 마지막에는 내가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나는 죽을까 봐 두려워했다.  


수술이 며칠 남지 않은 시기에 설 날이 있었다. 시댁에는 시부모님과 도련님과 아가씨 식구들이 모두 모여있었고, 다들 아무렇지 않게 밥을 먹고 일상을 나누었다. 나에 대한 얘기는 어느 누구도 꺼내지 않았다. 반찬 몇 가지를 싸주신 어머니는 남편과 나를 배웅하신다며 1층으로 내려오는 엘리베이터를 같이 타셨다. 남편은 차를 가지러 갔고 어머니와 나는 걸어가는 남편을 바라보고 있었다. 함박눈이 내렸다. 눈발이 날리는 걸 보며 아무 말이 없는 잠깐의 침묵이 있었는데 그 사이 어머니가 내 손을 잡으셨다. 그리고 "네가 결혼하는 날, 나는 널 내 자식으로 맞았어. 그러니까 우리 생각하지 말고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렴. 요즘에는 둘이 살아도 괜찮다."라고 말씀해 주셨다. 어머니도 울고 나도 울었다. 늦은 결혼으로 내 결혼 생활에 아이는 없을 수도 있다고 이미 생각했었고, 내 몸에 대한 권리는 온전히 나의 의지로 결정을 해야 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지만, 어쩐지 어머니의 말씀에 내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리고 내 결정에 많은 고민이 필요하지 않게 해 주었다.


나는 누군가가 맹장을 떼어내 듯 내 몸에서 자궁을 떼어내기로 결정했다.




04 두 번째 수술을 위해 입원을 했다.


2017년 2월 두 번째 수술을 위해 입원을 했다. 입원 기간은 2박 3일 정도라고 했다. 암 수술인데 생각보다 입원기간이 짧았다. 입원 전 날 엄마 집에서 있다가 병원으로 갔고, 엄마는 병원에 따라오지 못하게 했다. 나에게는 남편이 있었기 때문이다. 수술은 이제 나의 보호자가 엄마가 아닌 남편이라는 것을 완벽하게 이해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암 진단을 받고 수술을 결정하기까지 거의 매일 밤 울면서 남편을 원망했다. 나에게 일어난 이 엄청난 일이 내 탓이 아니듯, 그의 탓도 아닌 걸 알고 있다. 그가 원망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무엇에라도 원망을 퍼부어야 했던 나는 그것을 남편으로 정했던 것 같다. 그는 아무런 말없이 나의 모든 원망을 받아 주었다. 같이 울어 주었고, 함께 그 시간을 견뎌주었다.


수술방으로 들어가기 전 대기실에는 여러 대의 침대가 나란히 줄지어 있었고 나도 그 안에 있었다. 간호사들과 인턴과 레지던트로 보이는 선생님들이 나의 이름을 묻고 생년월일을 물었다. 똑같은 대답을 나는 반복했다. 그러다 틈이 날 때마다 나는 모두 각자의 사연과 병명을 가지고 누워있는 이 사람들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궁금해하며 내 차례를 기다렸다. 나는 엄마 생각을 했다. 이대로 내가 눈을 못 뜨면 어쩌지, 우리 엄마 어쩌지라는 생각. 내 보호자는 엄마에서 남편으로 바뀌었지만, 나는 여전히 엄마의 보호자이니까. 나의 이름과 생년월일을 마지막으로 답하는 순간 침대는 수술방으로 향했고, 이번에도 수술방은 따뜻했다. 두 번째여서 처음만큼 떨리지는 않았지만 긴장감과 두려움은 전보다 더 진했다.


시끄러운 소리에 눈을 어렵게 떠보니 남편이 아닌, 어머님과 아버님 그리고 도련님이 보였다. 남편이 보이지 않아 어떻게 된 일인가 궁금한 내 눈빛을 알아차린 어머님이 입원실 침대를 창가로 바꾸느라 올라갔다고 설명해 주셨다. 그리고 나는 다시 잠들었다.


병실에 올라오자 고통이 극심해졌다. 참기가 어려울 정도로 아팠다. 진통제를 달았지만 통증이 없어지지도 나아지지도 않았고 심해지기만 하는 것 같았다. 간호사를 수도 없이 부르고 또 불러댔다. 더 이상의 진통제는 허용되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지만 가족과 간호사 선생님에게 계속 고통을 호소하며 나는 진상 환자가 되었다. 그런데 어느 시간이 되자 통증이 거짓말처럼 나아졌고, 그 시간에 맞춰 교수님이 오셨다. 나는 왜 이제 오셨냐며 원망의 눈빛을 보냈는데, 웃으며 그 시간을 피해 지금 왔노라고 농을 던지셨다. 수술은 잘 끝났고, 내일부터 많이 걸으라고 말씀하셨다. 이렇게 한 고비를 넘기는 것인가.라는 생각을 했다.  


밤이 되었다. 밖은 어두웠고, 큰 창으로 누워있는 나와 내 옆에 남편이 보였다. 우리는 창에 비친 서로에게 안도의 웃음을 보여 주었다.



05 마흔일곱, 졸업합니다.


아침에 일어났는데 모든 것이 말짱해진 기분이 들었다. 양치를 하고 세수를 하고 얼굴에 기초 화장품을 바르고 거울을 보니 웃기는 일이지만 내가 예뻐 보였다. 교수님은 나의 생기 있는 얼굴과 목소리에 매우 흡족해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바로 달성해야 하는 퀘스트가 주어졌다. 산부인과 병동 바닥에는 수술을 마친 다음 날 환자들의 장기 유착도 막고, 가스도 배출해야 해서 걷기 운동을 위한 라인이 그려져 있는데, 나도 그 라인을 따라 쉼 없이 걸어야 했다. 배가 몹시 당겼고 그래서 힘을 줄 수도 없었지만 시키는 대로 아니 그 이상으로 열심히 걸었다.


나의 수술은 배에 구멍을 3개 뚫어서 하는 복강경 수술로 진행됐다. 그중 하나의 구멍은 배꼽으로 들어가니 나머지 두 곳만 절제를 하는 데, 전공의 선생님이 소독을 하러 오라고 해서 갔더니 교수님께서 너무 센스 있게 딱 속옷 라인 밑으로 절개를 하셨고, 크기도 크지 않아서 실로 꿰매지 않고 스테이플러로 찍으셨다고 했다. 상처부위가 크지 않아 쉽게 아물 것 같았다. 그럼에도 배는 매우 당겼고, 숨을 크게 쉬거나 웃을 때마다 아팠다.


소독을 마치고 전공의 선생님은 나를 앉혀놓고 내 병에 대해 매우 자세한 설명을 해 주었다. 보통 암이라고 하면 몇 기라고 해서 암이 발병해서 진행되는 수준을 N기로 표현하는데, 나도 나의 암이 몇 기인 지 궁금하긴 했다. 선생님은 나의 암세포는 한 3개월 전에 생긴 걸로  예상한다고 했다. 이제 막 세포가 자라려고 하는 순간이어서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고, 현미경으로 자세히 보아야 보이는 정도라고 했다. 내가 만약 3개월 전에 자궁경부암 검사를 했다면 이 세포는 찾을 수 없었을 것이다. 너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만약 그 시기를 놓쳤더라면 나는 지금도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내 몸에 암을 건강히 자라게 하며 지내고 있을 것을 생각하니 끔찍했고, 나의 행운에 소름이 끼쳤다. 그리고 내 노력과는 상관없는 이 행운에 절로 숙연해졌다. 모든 것에 감사하며 살아야 하는 이유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지난달, 교수님은 나의 의료기록과 교수님께서 나를 맡게 될 의사 선생님께 쓴 간단한 편지가 적힌 회송서를 주셨다. 졸업하세요.라는 말과 함께.


회송, 도로 돌려보냄 sending [bringing] back.


이렇게, 나는 마흔일곱에 졸업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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