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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니 Mar 01. 2022

거리 두기

<신글 10-9. 내가 자식을 통해 배우는 것>

어느 날은 김밥을 싼다. 속재료는 깻잎, 단무지, 다진 소고기 볶음 세 가지뿐이다. 소금 살짝, 참기름 몇 방울, 깨소금 톡톡 넣어 비빈 밥을 김 위에 얇게 펴 바르듯 펼치고 속재료를 넣어 둘둘 말아 싸면 끝이다. 아이들이 어릴 때 <고사리손 요리책>을 보고 만들기 시작했던 꼬마 김밥. 당시에는 책에 나온 레시피대로 어린아이들 크기에 맞춰 김을 4분의 1로 자르고 단무지 한 줄도 얇게 썰어 사용했지만, 아이들이 커감에 따라 크기는 점점 커졌고 지금은 전장김 한 장에 단무지 썰 필요도 없이 그대로 이용한다. CPA 공부를 시작한 아들을 위해 요즘 도시락을 싸는데, 며칠 전 김밥을 싸다 아이들과 꼬마김밥을 만들던 어린 시절이 문득 떠올랐다. 꼬마 김밥을 먹던 아이들은 이제 어엿한 성인이 되었다. 딸 역시 진학이 코 앞이다.


40여 년의 서울 생활-태어나서 벗어난 적이 없으니-을 정리하고 시골로 내려왔다. 당시 아들은 초5, 딸은 초1. 남편의 이직도 있었지만 사교육 없이 아이들을 키우고 싶었던 나는 미련 없이 도시 생활을 정리했다. 아이들이 커감에 따라 친구를 만나고 놀기 위해서라도 사교육 시장에 발을 들여놓아야 하는 현실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자신도 없었다. 아이들은 느리게 성장하는데, 마음이 조급해지기에 딱 좋은 환경이었다. 시골에 내려와 살아보니 정말 시간이 천천히 흘렀다. 텃밭을 일구고 개와 고양이, 닭과 병아리도 키워보고 친구들이 놀러 온 햇볕 좋은 날이면 마을에서 자전거를 타고, 겨울이면 소복이 쌓인 눈밭에서 포대자루에 앉아 눈썰매를 타거나 빈 논을 얼려 만든 얼음썰매장에서 꼬챙이를 양손에 쥐고 얼음 썰매를 탔다. 둘째까지 중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통학이 어려워지자 점점 읍내 가까운 곳으로 터전을 옮기게 되었지만, 돌이켜보니 당시 환경이 아이들에게 썩 나쁜 편은 아니었던 것 같다. 아이들은 내가 바라던 대로 사교육 없이 스스로 공부해 대학에 진학했다. 어쩌면 돈도 빽도 없는 부모 밑에서 물려받을 것이라곤 눈 씻고 찾아봐도 없는 현실을 꿰뚫고는, 할 수 있는 게 공부밖에 없으니 악착같이 매달린 것인지도 모르겠다.


언젠가 헤세와 관련된 책을 읽다 인상 깊은 내용을 마주한 적이 있다. 시간이 꽤 흘러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대체로 이런 내용이다.


 부모는 아이에게 유전적인 것은 물려줄  있으나,
영혼까지 물려줄 수는 없다.


아이들에게서 얻은 가장 큰 배움은 '거리두기'다. 진정한 사랑은 너무 가깝지도, 너무 멀지도 않은 것임을. 줄타기하듯 아슬아슬한 경계에서 서로를 침범하지 않고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임을.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표현되어야 하는지 아직까지도 배우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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