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달고 살아남기(최영희/창비, 2015)>
"사람들은 무언가 잃어가나 보다. 하지만 나랑은 상관없는 어른들의 일이다. 난 뭔가를 잃기엔 너~무 열여덟이니까. 내가 가진 것들은 잃을 수 없는 것들이다. 예를 들면 꿈, 동경..." 드라마 <스물다섯 스물하나>의 나희도(김태리 분)가 첫 화에서 건넨 화두다. 18세 희도는 그의 말대로 꿈을 향해 앞으로 나아간다. 그런데 역주행하는 18세 친구도 있다. 과거의 것을 찾기 위해서다. 감진 마을 공식적인 업둥이로 자란 박진아. 아이라고는 진아밖에 없는, 노인들이 많은 작은 시골 마을에서 관심과 사랑을 독차지하고 자란 소녀. 사춘기가 되자 사생활 초자 보장받지 못하는 운명을 애석해하지만, 그래도 어른들의 비위를 맞출 줄 아는 아이다.
어느 날 무심코 듣게 된 어른들의 수근거림에서 자신의 근원을 찾기로 마음먹는다.
"그건 그라고 진아 말입니더."(중략)
"요새 얼굴이 꽃년이 쪼매 닮은 거 안 같십니꺼? 아까 쌔액 웃음시로 오는데 꼭 꽃년이 젊었을 때 같애서 깜짝 놀랬십니더."
"네 눈에도 그리 보이드나? 내도 말은 몬허고, 속으로 참말 희한타 하고 있었다 아이가." (20쪽)
<꽃 달고 살아남기>는 18세 소녀 진아의 자아 찾기를 위한 고군분투 성장기다. 서운타못해 속상해하는, 키워준 76세 엄마 강분년씨와 돌아가신 아빠 박도열씨를 뒤로 하고 진아는 험난한 역주행을 선택한다.
꽃년이. 그녀는 이 마을 저 마을 장이 열리는 날이면 거기서나 볼 수 있는 떠돌이 미친년이다. 알 수 없는 그녀를 찾아 나선 진아는 다른 마을에서도 자신이 꽃년이를 닮았음을 확인한다. 생물학적 엄마일지도 모르는 그녀를 찾는 과정에서 의외의 문제에 맞닥뜨리는 진아. 자신도 꽃년이처럼 머리에 꽃을 달고 있는 것은 아닌지, 3년 전 헤어진 중학교 동창 신우가 멋진 고딩이 되어 나타나는데 그녀의 눈에만 신우가 보인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진아는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미국드라마 ‘X파일’의 주인공 멀더의 추종자인 절친 인애가 확인시켜주기 전까지는. 길거리에서 신우와 떠들고 싸우는 모습이 남들 눈엔 진아 혼자 떠들고 허공에 대고 싸우는 꼴이었으니, 이 모습을 본 다른 사람들 눈엔 진아가 머리에 꽃 하나쯤 달고 있는 사람으로 보일 수 밖에.
"그 최후의 가설이 뭔데?"
"그기 말이다, 진아야."
"괜찮다. 말해라."
(중략)
"내 생각에는 니가 아무래도 정신 분열 같다."
"뭔.... 뭔 분열?"
"그란께 쉽게 말해 네가 살짝 미칬다는 기다."
인애는 매정하게도 검지를 제 관자놀이에 대고 휙휙 돌렸다.
"그라믄 내가 또.... 또라이라는 말이가?"
"어." (86쪽)
'자아 찾기'라는 다소 진중한 주제를, 흠뻑 빠져들 수 밖에 없는 사투리와 청소년기 특유의 똘끼(?)로 뭉친 현실감 넘치는 등장인물을 통해 유쾌하게 보여준다. 진아는 자신에게 달린 '꽃'을 어떻게 해결할까. 다행이도 그 '꽃'을 인정해주는 물리(선생님)가 있고 엉뚱한 '멀더리안' 인애가 곁에 있다. 그들은 강하지도 지혜롭지도 않지만 서로에게 기대어 앞으로 나아간다.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는 일이 틀어지고 난 후에야 실감이 나곤 했다. 내가 꾀죄죄한 포대기에 싸여 버려진 아기였다는 걸 알게 된 후에야 나는 생모와 마지막으로 눈을 맞춘 시간이 있었음을 유추해 냈다. 아빠가 돌아가신 뒤에야 딱딱하고 건조하던 아빠의 손을 만져 본 그때가 마지막이었다는 걸 알았다. 신우가 전학 가 버리고 나서야 신우가 감진 마을 우리 집 담장 너머에서 제 모든 걸 보여 주었음을 깨달았다.
내가 놓쳐버린 시간들은 언제나 뒤늦게 나를 가슴 치게 만든다. (105쪽)
인생은 종종 이런 식이다. 시간이 흐르고 난 뒤에야 과거의 어느 순간이 소중했음을, 또는 더없이 아름다웠음을 깨닫곤 한다. 18세 진아가 자신이 선택한 역주행을 통해 깨닫는 과정은 뭉클하다.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한다는 게 얼마나 유의미한 일인지, 망각이 아닌 현실에 당당히 뿌리내리려는 그녀의 노력이 빛나는 순간이다. 진아는 결국 희도처럼 앞으로 나아간다. 과거를 향했지만 후퇴를 통한 의미심장한 전진.
웃음과 감동,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있는 작품이다. 더불어 우리 모두에겐 미처 알아채지 못한 꽃 하나쯤 달고 사는 건 아닌지. 그래도 작가는 말한다. '살아 남아라. 힘껏'. 그러면 너의 우주가 팽창하고 무르익을 것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