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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니 Jan 13. 2022

[긴긴밤]나는 누구인가 & 어떻게 살 것인가

(루리 글 그림 / 문학동네, 2021)

인문학의 궁극적 질문, 나는 누구인가 그리고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볼 수 있는 책 <긴긴밤(루리 글 그림/문학동네, 2021)>이다. 이 책은 코끼리 사이에서 자란 코뿔소, 코뿔소에게 기대어 자란 펭귄의 이야기다. 짐작했듯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공통점이라고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이 서로에게 기대어 각자의 바다를 찾아가는 여정은 감동적이다.

  


코끼리 고아원에서 자란 코뿔소 노든은 이름이 없었다. 이름은 명사다. 명사는 하나의 개념을 언어로 나타내 소통을 돕는다. 그런데 이름이 붙여진 순간, 우리는 존재의 본질에서 한걸음 물러나게 된다. 특성을 관찰하고 이해하려 애쓸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사과를 사과라고 부르는 순간 사과의 특성을 조목조목 따져가며 알 필요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초록색 작은 열매가 자라면서 붉게 익어가며 모양은 둥글고 단맛이 나는 과일, 또는 잎은 어긋나고 타원형 달걀 모양으로 톱니바퀴가 있으며 4~5월에 붉은빛의 꽃을 피우는 나무에서 자라는 열매, 라고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 이름이 있어 편리하기도 하지만 이름이 붙여진 순간 존재의 본질에 대해 관찰하고 생각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가 된다. 그래서인지 <긴긴밤>의 첫 문장은 강렬하다.


나에게는 이름이 없다.
하지만 나는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다.  (7쪽)

이름을 갖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본질을 찾는 일. 즉 자신의 정체성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이해임을 전면에 명시하고 있다. 노든은 코끼리 무리에서 자란 코뿔소다. 이 시기 노든은 자신이 '코뿔소의 겉모습을 한 코끼리'라고 생각한다. 평화롭기만 한 코끼리 고아원에서의 삶을 벗어나 두려움의 세계인 바깥세상을 택했을 때, 노든은 비로소 코뿔소의 무리 속에서 진정한 코뿔소가 된다. 정체성을 찾는 과정이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 것임을 알 수 있다.


노든이 코끼리로 살 수 있었던 것은 코끼리들이 있었기 때문이고,
코뿔소가 되기 위해서는 다른 코뿔소들이 있어야만 했다.    (22쪽)


코끼리 고아원과 바깥세상을 놓고 선택의 기로에 선 노든에게 지혜로운 코끼리 할머니가 "훌륭한 코끼리가 되었으니, 이제 훌륭한 코뿔소가 되는 일만 남았다"라고 했듯 노든은 훗날 자기 곁을 지키려는 펭귄 '나'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너는 이미 훌륭한 코뿔소야. 이제 훌륭한 펭귄이 되는 일만 남았네.  (115쪽)

 

노든과 펭귄이 헤어짐을 앞두고 있을 때 펭귄은 노든에게 이름을 지어달라고 한다. 언젠가 멀리 서라도 펭귄 무리를 보게 되면 이름을 불러 자신을 알아볼 수 있도록 말이다. 그러나 노든은 그럴 필요가 없다고 한다. 언제든 노든은 함께 지낸 펭귄을 알아볼 수 있을 것이며 너는 너일 뿐라고 한다.


이름이 없을 때가 훨씬 행복했어. (중략)
누구든 너를 좋아하게 되면, 네가 누구인지 알 수 있어.
아마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너를 관찰하겠지.
하지만 점점 너를 좋아하게 되어서 너를 눈여겨보게 되고,
네가 가까이 있을 때는 어떤 냄새가 나는지 알게 될 거고,
네가 걸을 때는 어떤 소리가 나는지에도 귀 기울이게 될 거야.
그게 바로 너야. (99쪽)

정체성을 찾는 일은 결국 존재 자체에 집중하는 것, 그리고 관계 속에서 드러나는 것임을 노든은 알고 있다. 이름, 성, 나이, 직업 따위 등 사회가 명명한 개념을 떼어낸 채 오롯이 존재 자체에 집중했을 때 그 사람의 색깔과 가치를 이해하고 인정할 수 있게 되는 건 아닐까.  


노든에게 긴긴밤은 고난과 역경의 시간이었다. 잠들지 못하는 밤이다. 내가 누구인지 알기 위해 모르는 세상으로 들어섰을 때의 불안함, 삶에서 가장 반짝이던 것 -아내와 딸-을 잃었을 때의 절망감, 오직 인간들에 대한 복수심으로 자신을 꽉 채웠던 분노의 시간, 뿔 사냥꾼에 의해 친구 앙가부마저 잃어 세상에 혼자밖에 남지 않았다는 상실감, 전쟁으로 철창 안에서 또는 밖에서 죽은 목숨을 수도 없이 대해야 했던 끔찍함, 길 위의 동반자 치쿠를 잃었을 때의 먹먹함. 슬픔과 악몽에 시달렸던 밤은 노든에게 유난히 긴긴밤이었다.


돌이켜보면 사람은 좋은 일보다 나쁜 일을 더 많이 기억하게 된단다. 뇌가 작동하는 생존 지향성과 관련이 있다는데, 당시 느꼈던 감정이 행복감보다 절망감, 두려움, 공포, 무력감들의 강한 부정적 감정을 느꼈을 때 더 강하게 뇌리에 새겨지기 때문이다. 상처 없는 사람이 없다는 말은 꽤나 과학적인 근거를 두고 있다. 긴긴밤의 세월을 겪으며 노든은 자기 상처를 어떻게 극복해고 치유했을까. 이야기 앞부분에서 지혜로운 코끼리 할머니가 말했듯 일관되게 타인과의 관계에 중요한 의미를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눈이 멀어 이곳에 오는 애도 있고, 절뚝거리며 이곳에 오는 애도 있고,
귀 한쪽이 잘린 채 이곳에 오는 애도 있어.
눈이 보이지 않으면 눈이 보이는 코끼리와 살을 맞대고 걸으면 되고,
다리가 불편하면 다리가 튼튼한 코끼리에게 기대서 걸으면 돼.
같이 있으면 그런 건 큰 문제가 아니야.   (12쪽)

아내에게서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채우고, 분노에 꽉 찬 마음을 앙가부에게 기대어 털어놓으며, 복수의 기회가 왔을 때 결국 윔보와 치코가 목숨 걸고 지키려 했던 어린 펭귄을 노든이 지키는 쪽으로 선택할 수 있었던 것. 결국 노든은 타인에게 기대기도, 곁을 내어주기도 하면서 앞으로 나아갔음을 알 수 있다.


죽는 것보다 사는 게 더 어렵다는 노든을 통해 펭귄은 훗날 삶 자체가 기적임을 깨닫는다.


이제 와 생각해 보면 모든 것이 기적이었다.
윔보와 치쿠가 버려진 알을 품어 준 것부터,
전쟁 속에서 윔보가 온몸으로 알을 지켜내 준 것,
치쿠가 노든을 만나 동물원에서 도망 나온 것,
마지막 순간까지 치쿠가 알을 품어 준 것,
그리고 그 마지막 순간에 노든이 있어 주었던 것...


탄생과 동시에 삶은 기적이다. 한 생명이 태어나기까지 무수한 인연이 맞닿아 있으며 그들의 삶은 생명 안에 녹아있다. 코뿔소는 코뿔소의 바다에, 펭귄은 펭귄의 바다에 도착했을 때 그들 앞에 펼쳐진 세상은 또 다른 미지의 세계다. 분명한 건 그들에게 긴긴밤이 다시 찾아오더라도 반짝이는 별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는 것. 그간의 '긴긴밤 덕분에' 그들은 더 이상 어리석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간간이 양쪽 페이지를 꽉 채운 삽화는 이야기 속으로 깊이 빠져들게 한다. 이야기 끝의 글 없는 그림 몇 장은 글 못지않은 내용을 담고 있다. 마지막 장 펭귄 무리 속에 노든과 함께 있었던 펭귄이 보이는가. 그가 뒤돌아서 나를 보며 묻는다. 자, 기적같은 삶을 당신은 어떻게 살아낼 것인가요? 하고 말이다. 깊은 여운과 울림을 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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