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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서 유 Oct 20. 2021

2015.11.12 / 오늘은 내가 뉘른베르크 가이드

Nuremberg, Germany

여행지에서 만난 이들을 이끌고 그곳의 생활자인 것처럼 안내하는 것은 꽤 색다른 경험일 것이다. 똑같은 여행자임에도 불구하고 하루 먼저 묵었다는 이유로 무리 중 그곳을 가장 잘 아는 이가 되어버렸다. 그렇게 벨기에에서 만난 K와 독일에서 만난 Y언니를 이끌고 내가 사랑하게 된 이 도시를 속속들이 안내하게 되었다. 고요하면서도 차분하고 사람 냄새가 묻어나는 고즈넉한 곳. 나는 수년이 지난 후에도 뉘른베르크를 그렇게 추억하곤 한다.


나는 벨기에에서 만난 K에게 무사히 독일로 가게 해 준 답례를 한다 했고, 프랑크푸르트에서 만난 Y언니에게 우리 꼭 한 번 같이 여행하자며 내가 머문 곳으로 놀러 오라는 약속을 한 적이 있었다. 당시 인연을 맺는 것을 두 팔 벌려 반겼던 나는 두 사람에게 꼭 내가 있는 곳으로 오라며 다짐을 받아냈고, 미련하게도 그 후에야 내가 무리한 약속을 잡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B의 일정에 전적으로 맞출 요량이었으므로 실제로 내가 유럽에 머무는 날에 비하여 뉘른베르크에서의 여유시간은 꽤 촉박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나를 보러 이곳까지 올 두 사람을 내 일정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거절할 수도 없었다. 나는 먼 타국에서 만난 한 사람 한 사람이 너무나 소중하였고, 그 두 사람과는 한국에서도 좋은 연을 유지할 것이라는 근거 없는 확신이 있었다. 결국 나는 두 사람을 한꺼번에 만나기 위해 셋이서 함께 다닐 것을 물어보았고, 그렇게 우리 셋은 나의 안내 하에 뉘른베르크를 구경하게 되었다.


어떻게 하면 보다 조금 더 완벽한 가이드 노릇을 할 수 있을지 궁리하다가 B에게 좋은 관광코스를 단시간으로 전수받았다. 뉘른베르크 중심거리를 쭉 걷다 보면 우리가 전 날에 가보았던 100년 된 카페와 쇼이펠레를 맛볼 수 있는 식당을 지나서, 성까지 갈 수 있을 거라는 아주 간단한 노선에 나는 자신감을 얻어 호기롭게 두 사람을 안내하기 시작했다.

장크트 제발두스 교회(Sankt Sebaldus Kirche) 내부

마치 미녀와 야수에서 등장하는 벨이 처음으로 야수의 성을 들어가듯이 거대하고 무거운 교회 문을 힘겹게 열었다. 그곳이 뉘른베르크를 대표하는 교회라는 것은 아주 뒤늦게 알게 되었는데 비수기여서 그런지 전반적으로 가는 관광지마다 보수작업에 한창이었다. 나는 무교임에도 불구하고 종교가 주는 엄숙하고 장엄한 분위기에 압도되고 마는데, 좌측으로는 앙상한 철골과 흰 천을 덮었음에도 불구하고 감히 셔터 소리를 내며 사진을 찍을 수 없을 정도로 교회는 근엄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잠시 서로 뿔뿔이 흩어져 이리저리 둘러본 우리는 그곳이 본래는 관광지가 아닌 신성한 곳임이 떠오른 듯 그만 가자며 발길을 재촉했다.

Königstraße 거리
Fleisch Bridge

교회를 나와 곧장 직진한 우리는 거리 곳곳에 설치된 크리스마켓 부스들을 보면서 함께 아쉬워했다. 보통 유럽의 성수기는 한국과 마찬가지로 4~5월이며 비수기는 한국에서 초겨울인 11월 즈음이었다. 우중충하기로 손꼽히던 런던을 제외하고도 내가 가려고 했던 국가 대부분이 그즈음 우기였고, 실제로도 나는 마지막 국가였던 이탈리아를 제외하고는 시종 어두운 하늘을 볼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가슴을 설렘에 부풀게 했던 이유는 B에게서 전해 들은 유럽의 크리스마켓이었다.


실제로도 뉘른베르크는 독일 내에서도 크리스마켓이 아름답기로 손꼽힌 도시였고, B 역시 자신이 거주하던 동네의 크리스마켓에 대하여 꽤나 큰 자부심이 있었다. 내 일정을 전해 들은 B는 아마도 그즈음엔 준비만 하고 있을 것이라며 기대에 부풀어 있는 나에게 미리 언질을 해주었지만, 나는 그럼에도 내심 속으로 아름다운 크리스마켓을 상상하며 홀로 사진들을 찾아보고는 더 큰 꿈과 상상의 나래로 부풀어 있었다. 그러나 막상 실제로 가보니 내가 도착한 날부터 뉘른베르크는 크리스마켓 준비로 분주하였고 별 수 없이 나는 앞으로 꾸며질 부스를 상상하는 것에 그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나에게 '앞으로 저 부스들이 엄청 이쁜 크리스마켓이 될 거야'라고 전해 들은 두 사람 역시 아쉬워하며 우리는 그렇게 거리를 걸었다.


비록 아직은 전구가 들어오지 않은 조형물들과 그곳에서 무엇을 파는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갈색 부스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도시는 그 자체만으로도 고즈넉한 멋이 있었다. 상업화된 프랑크푸르트에서 건너온 탓이지는 몰라도 뢰머광장에서 본 듯한 아기자기한 건물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고, 당시 비수기였던 탓에 관광객들을 쉽게 볼 수 없었던 것도 도시의 고요하고 아늑한 멋을 배가시키는 이유 중 하나였다. 우리는 그렇게 뉘른베르크의 랜드마크라고 할 수 있는 카이저부르크를 향해 언덕을 올랐다.

카이저부르크(Kaiserburg) 전망대에서 내려본 뉘른베르크 시내

카이저부르크에서 올라가 내려다본 뉘른베르크의 전경은 동화 속 언덕 어딘가로 날아올라 도착한 기분마저 들게 했다. 하이델베르크에서 내려본 풍경이 마치 내가 신선이라도 된 듯 구름 위에서 한 아름 내려다보는 기분이었다면 뉘른베르크에서 바라본 전경은 소인국에 놀러 온 걸리버가 된 기분이었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직사각형의 창문이 그려진 노랗고 빨간 인형의 집. 그 인형의 집들을 내가 건설이라도 한 것처럼 우리는 잠시 뉘른베르크의 풍경에 마음을 뺏겨 말없이 바라보았다.


우리는 카이저부르크 진벨 탑을 두고 그곳을 올라갈지 아니면 이대로 내려가 그렇게 유명하다던 쇼이펠레를 먹어볼 것인지에 대해서 잠시 고민하다가 맛있는 것을 먹기로 결정했다. 굳이 탑을 올라가 보지 않더라도 우리가 내려다본 전경은 충분히 아름다웠고, 높게 솟아오른 탑을 빙빙 돌아 올라갈 자신도 없었다. 나는 내가 어제 먹어 본 쇼이펠레가 얼마나 맛있었는지에 대해 열변을 토하며 둘을 그 식당으로 안내했다.


이틀을 연이어 먹은 음식임에도 불구하고 쇼이펠리와 소세지는 여전히 맛이 좋았다. 나는 유럽에서 만난 친구들을 대동하고 친구에게 단 한두 마디 들은 것이 전부인 관광코스를 내가 안내했다는 것이 내심 뿌듯하기도 하였고, 마치 중요한 일을 해낸 기분마저 들었다. 나는 그 자신만만함에 쇼이펠레를 웨이트리스에게 발음하기에 이르렀고, 알아들을 리 없던 나의 독일어 발음에 결국 웨이트리스 분께 '피그 숄더'라는 빈약한 영어를 말할 수밖에 없었다. 음식 맛에 연신 감탄하며 먹은 우리는 그곳에서 내가 영국에서 소중하게 찍은 사진들을 모조리 잃어버렸다는 것과 Y언니가 홀로 여행하면서 국제 미아가 될 뻔한 여행기를 들으며 식사를 마쳤고 다시 길을 나섰다.

Burgstraße 거리
장크트 제발두스 교회(Sankt Sebaldus Kirche)
다시 찾은 100년 된 카페

일일 가이드로서의 욕심이 남달랐던 나는 두 사람을 이끌고 B가 날 데려다주었던 로컬 맛집과 100년 된 카페를 꼭 이들에게도 보여주리라 다짐했었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다녀도 어제 아주 손쉽게 찾아갔던 그 카페는 보이지 않았고 해낼 수 있다는 낙천적인 생각이 이 둘을 이끌고 계속해서 길을 헤맨다는 부담감으로 번지기 시작했다. 나는 우스갯소리로 두 사람의 눈치를 살피며 '우리 그냥 버거킹이나 던킨도너츠에서 커피를 마실까?'라며 농담을 던졌다가, '아니야 우리 조금 더 찾아보자'라는 그 들들의 말에 한 블록만 더 찾아보고 이곳이 아니면 깔끔하게 포기하겠다는 마음으로 눈에 불을 켜고 어제 본 그 카페를 찾아다녔다. 결국 두 사람을 더 이상 끌고 다닐 수 없던 나는 우리 그냥 이곳에 들어가자며 코너 옆에 붙어있는 카페로 향했고, 말도 안 되게 그 카페는 그렇게 내가 찾아다니다 포기한다 했던 그곳이었다.


나는 익숙한 카운터와 메뉴판을 보자마자 '이 카페야!'를 외쳤고, 두 사람은 나보고 일부로 장난친 거 아니냐며 놀려대다 우연찮게 카페를 찾은 것에 몹시 신기해하며 자리를 잡았다. 각자 커피를 주문 후 자리에 앉은 우리는 서로의 관심사가 무엇인지 이야기하다가 보통 이제 막 친해진 사람들이 그러하듯 서로 호기심 있게 이야기를 들으며 여행을 마무리 지었다. 마치 우리가 그전부터 알고 지낸 사람들처럼, 때로는 조금은 낯설고 설레는 시선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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