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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서 유 Oct 12. 2021

2015.11.11 / 여행자인 나와, 생활자인 너

Nuremberg, Germany

내가 독일에 흥미가 생긴 건 순전히 그곳에서 유학 중인 B 때문이었다. 그녀는 나도 모르게 어느새 응어리진 일화들을 속 시원하게 말하고 마는 그런 친구였다. 그러한 친구의 인생 일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그 도시에 도착해보니 다른 곳들에 비하여 고요함과 차분함이 있었다. 그 도시는 내게 여행자인 여기도 누군가에게는 동네임을 깨닫게 해 준 곳이자, 두 눈을 크게 뜨고 시종 긴장하며 다니던 내게 처음으로 여유를 선사해준 곳이었다.

뉘른베르크로 넘어가는 기차 안에서 인상 좋은 직원분이 하리보젤리를 나누어주셨고, 그 순간은 내가 독일에 있음을 실감 나게 했다. 독일 기차는 하리보를 준다며 사진을 찍어 친구들에게 자랑을 했고, 나는 내가 좋아하는 고깔 니트 모자를 올려둔 채 차창 밖 풍경을 감상했다. 사실 지역을 이동할 때마다 기차 안에서 책도 읽고 음악도 듣고 잠도 청하는 여유로는 이동시간을 꿈꿔왔는데 실제로는 숙소까지 찾아가야 한다는 긴장감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결국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 프랑크푸르트에서 만난 Y언니에게 언제 독일로 올 것이냐며 안부를 물었고 그 과정에서 우리는 사실 동갑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나는 3일 동안 친구로 불렀던 Y언니에게 냉큼 언니라 부르는 것이 어색한 나머지 머리를 굴렸고, 그럼 자기라는 호칭은 어떠냐는 더욱더 어색한 제안을 내놓았다.)


어느새 도착한 나는 역으로 나와 무거운 캐리어를 이끌고 한 손엔 생명줄과 같은 핸드폰을 손에 쥔 채 호스텔까지 걸어갔다. 뉘른베르크는 마치 하나의 성벽 안에 도시가 들어가 있는 느낌이었는데 호스텔은 성벽 안에 위치해있어, 그 주변만으로도 유명한 관광지 같았다. 실제로 가이드북에 소개되지도 않을 만큼 타 도시에 비하여 유명 관광지는 아니라는 내 예상과는 다르게 호스텔 입구엔 한국어로 안내가 되어있었고, 신기하게도 유럽에서 머무는 중 가장 많은 한국인을 만날 수 있었다.

Five Reasons Hostel & Hotel

어느덧 어두운 저녁이 되자 나는 B를 만나기 위해 호스텔을 나섰다. 몇 년 만에 만난 우리는 어색할 새 없이 서로의 근황을 물으며 식당으로 향했고 저녁을 앞에 두고 못다 한 이야기들을 나눴다. 독일에서 먹은 쇼이펠레는 마치 겉이 바삭하게 익은 훈제 오리를 먹는 기분이었는데, 다소 칼질을 하기 어려웠음에도 불구하고 맛이 있어 손이 빨개지도록 힘을 주어 열심히 썰어 먹었다. 소세지야 사실 국내에서 파는 것들과 큰 차별점을 느끼기엔 어려웠는데, 그것이 소세지의 문제라기보다도 달고 짠 것은 맛있다는 나의 초딩입맛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훌륭한 맛 외에도 식당 특유의 분위기와 B에게 털어놓는 나의 내밀한 속 사정들, 그리고 우리가 만난 곳이 독일이라는 사실이 나를 행복하게 했다. 심지어는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다 나도 모르게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는데, 다음 날 조식을 먹다가도 울었을 정도였다.

소세지와 쇼이펠레(Schäufele)

B는 식당을 나와 100년 된 카페가 있다며 나를 안내했다. 비수기 탓인지 기분 탓인지는 몰라도 B가 안내하는 곳들은 유독 이국적이었다. 유럽에서 가본 카페라고는 COSTA가 전부였던 내게 B가 데려간 곳들은 촌스럽게도 이곳이 '외국 카페구나'라는 생각을 들게 했다. 카페가 풍기는 오래된 느낌과 더불어 시종 쏟아지는 독일어들 사이로 한국어로 대화하고 있는 우리가 어색할 지경이었다. B가 낯선 이곳에서 생활자로서 겪은 경험들은 여행자의 입장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묘한 기분을 들게 했다. 마치 '그 들은 행복했습니다'로 끝날 줄 알았던 동화책 마지막 장에 '우리 생각을 키워보자' 등의 학습지스러운 질문이 있는 기분이랄까. 처음 그녀가 독일에 머문다는 것을 들었을 때 내가 품었던 막연한 동경과 부러움 등이 부끄러워지는 순간이었다.

우리는 카페를 나선 후 이틀 뒤 함께 조식을 먹을 것을 약속하곤 헤어졌다. B와 헤어지고 성벽으로 이루어진 밤거리를 혼자 걷자 공허함이 밀려왔다. 여행지에서 생활자인 친구를 만나는 것은 여러 가지 감정이 복합적으로 섞여 하나의 단어로 정의 내릴 수 없는 기분이었다. 한국에서 자란 우리가 먼 타지에서 만난다는 것만으로도 적잖은 설렘과 흥분이 있었고, 우스갯소리로 친구에게 '널 보러 간다'라고 한 말이 현실이 되었다는 사실은 스스로를 대견하게 했다. 심지어 동네에서 함께 곱창을 먹던 친구가 안내해주는 뉘른베르크 현지 유명 카페와 레스토랑이라니. 어느덧 생활자의 면모를 물씬 풍기는 친구가 낯설게 느껴지면서도, 이 낯선 타국에서 발을 딛고 살아가는 그녀가 대단해 보였다.


B가 독일에서 머물렀던 시간들은 그녀의 삶에서 두고두고 잊히지 않을 소중한 시간들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운 좋게도 그 시기의 친구를 보러 갈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히 감사한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여행자의 몸으로 잠시 생활자의 눈이 되어보는 것. 그 소중한 경험을 할 수 있게 해 준 나의 친애하는 B에게 늦은 감사를 표한다. 덕분에 다른 여행지에선 알 수 없던 시선을 갖게 해 준 것에 대해. 그리고 종교는 없어도 신은 있다는 그 말이 맴돌게 되었다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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