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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서 유 Nov 25. 2021

2015.11.26~29 / 이 것이 황홀경이라면

Vienna, Austria

유럽에서 눈부시게 찬란한 경험을 꼽아보라면 주저 없이 말할 순간들이 있다그 순간들은 더러 크리스마스와 관련된 것인데이국의 명절이라는 표현이 절로 생각날 정도로 크리스마스는 유럽인들의 성스럽고 거대한 민족대명절과도 같았다독일에서 본 크리스마스 상점이 하나의 작은 동화와도 같았다면오스트리아에서 본 크리스마켓은 그야말로 찬란하고도 아름다운 세상에 던져진 기분이었다그 세상은 감격스러울 정도로 눈부셨, 잊지 못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빈 시청사로 향하던 그날,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퀴퀴한 담배 냄새가 나던 코노 시티 카페에서 라떼와 토스트를 아침으로 때웠다. 그때는 유럽에 체류한 지 약 3주가 지나가던터라 을씨년스러운 유럽의 우기에도 꽤 적응을 하였는데, 빈 시청사로 가는 길은 유난히도 으슥하였다. 지도를 숙지하고 걸음에도 불구하고 이 거리 끝에서 과연 아름다운 빈 시청사가 나오는 것인지 좀처럼 의문이 가시지 않았다. 길을 잃어버릴세라 지도를 재차 확인하며 길목의 상점들과 핸드폰을 보기를 수차례. 이윽고 웅장하고도 장엄한 빈 시청사(Rathaus)와 크리스마켓이 모습을 드러냈다.

크리스마켓이 열린 라타우스 광장(Rathaus platz)

오스트리아 빈 시청사와 라타우스 광장은 내가 어느 인형극 안으로 들어온 기분을 들게 했다. 시청사 건물이 내뿜는 위용은 유럽은 어쩜 이토록 관공서도 아름다울 수 있을까라며 감탄하게 만들었다. 실제로 벨기에서부터 오스트리아까지 두 나라 모두 시청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면, 그곳의 쓰임을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저런 아름다운 시청에 들어가 공과금을 처리하고 주민세를 알아보는 일들을 수행하다니. 섣불리 문을 열고 들어가기 겁날 만큼 웅장하고 아름다웠던 빈 시청사 앞에서, 그렇게 나는 직장의 아름다움과 일의 상관관계에 대하여 잠시 고찰해 보았다.


라타우스 광장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크리스마스가 코앞으로 다가와도 도통 분위기를 느껴볼 수 없는 내 고향과는 달리, 이곳은 한 달 전부터 크리스마스를 맞이하기 위하여 분주했다. 나는 크리스마켓의 다양한 부스들을 보자 보자 눈이 휘둥그레져서는 광장에 설치된 많은 곳들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앙증맞은 천사가 올려져 있는 양초부터 귀걸이, 그리고 각종 인형들과 먹을거리까지. 당시만 해도 딱히 기념품에 욕심이 없던 나는 부스 이곳저곳을 구경하면서도 친구들과 가족들 선물 몇 가지만을 챙겨 왔는데, 한국으로 돌아와 더 많은 기념품들을 사들이지 않은 것을 퍽 후회하였다. 유럽 여행 도중 두고두고 후회할 만한 기념품들을 사지 않은 것은 어쩌면 나의 유럽여행 중 큰 실수였을지도 모른다.


마켓을 구경하던 중 다소 특이한 점을 발견하였는데, 그것은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다들 입으로 호호 불어가며 뜨거운 와인을 머그컵에 마신다는 것이었다. 한국에서 흔히 보던 테이크아웃 풍경과는 사뭇 달라 나는 저 컵을 반납해야 하는 것인지 지켜보았는데 그 컵을 들고 상점으로 반납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고대로 광장 밖을 빠져나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 당시 나는 뜨거운 와인이 얼마나 맛있는지는 꿈에도 모른 채 그저 핫초코만을 향해 찾아다녔는데, 간신히 핫초코를 파는 부스로 가 컵을 돌려줘야 하는 것이냐고 물어보았다. 점원은 다소 장황한 영어로 머그컵에 대해 설명해주셨는데, 나는 간신히 굳이 돌려주지 않아도 된다는 답을 유추하고는 고대로 맘 편히 머그컵을 들고 돌아올 수 있었다. (이후에 차 값에 컵의 보증금이 포함됐다는 것을 알았다.)


이 컵을 호스텔로 곱게 가져오는 여정에도 하나의 해프닝이 있었다. 나는 핫초코로 끈적해진 컵을 깨끗이 씻어 쇼핑백에 넣어가고픈 마음이 들었는데 그 마음을 채 먹기도 전에 옷에 핫초코를 한 바가지나 쏟아버린 것이다. 손은 고사하고 코트와 목도리까지 핫초코로 얼룩덜룩한 나는 어정쩡한 자세로 화장실을 찾아 헤맸는데, 분명 들어올 때 바로 보였던 화장실이 다급해지자 어디로 숨어버렸는지 도통 찾을 수 없었다. 몇 바퀴를 돌고 돌아 간신히 화장실로 들어간 나는 끈적해진 손이라도 어서 씻고팠지만, 이놈의 세면대에서는 가뭄이 든 것 마냥 수압이 여간 약한 게 아니었다. 어느 수준이었냐면 수도꼭지에 시원하게 물을 틀은 후 다 잠그지 않아 졸졸 흐르는 형국에 가까웠다. 심지어 마켓에서 동양인이라고는 나 하나뿐이었고 가뜩이나 눈에 띄는 내가 화장실에 들어가 초코 향을 물씬 풍기며 어정쩡한 자세로 컵을 씻고 있으니, 화장실 안 직원이 나를 의아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간신히 컵을 씻은 후 나는 여전히 온몸에서 초코렛향을 풍기며 미술사 박물관으로 향했다.

부르크 극장(빈 국립 극장/Burgtheater)
비엔나 국회의사당(Austrian Parliament Building)
빈 미술사 박물관(Kunsthistorisches Museum Wien)
빈 자연사 박물관(Museum of Natural History Vienna)

쌍둥이 같은 빈 자연사 박물관과 미술사 박물관 사이에 수많은 크리스마스 부스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먼저 라타우스 광장에서 부스를 보고 온 터라 이곳의 부스들이 다소 귀엽게 느껴졌는데, 라타우스 광장보다 보다 한산한 탓인지 부스에 진열된 물건들과 먹거리들을 조금 더 여유롭게 둘러볼 수 있었다. 나는 폐관 시간을 여유롭게 남겨두지 못하고 도착한 탓에 둘 중 한 곳만 가야 했는데, 태생이 이과보다는 문과인지라 주저 없이 미술사 박물관을 택했다.


미술사 박물관은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 마드리드의 프라도 박물관과 함께 유럽 3대 박물관에 손꼽히는 만큼 그 위용이 대단했다. 어느 성대한 궁전에 들어온 것처럼 입구에서부터 그 기운에 압도당하는 기분이었다. 사실 그 거대하고도 넓은 미술사 박물관을 고루 둘러보며 아쉬웠던 것은 '키스'를 그린 클림트를 제대로 못 알아본 것과 성경에 있어 무지하다는 사실이었다. 순서대로 둘러본 후 클림트의 그림을 마지막으로 본 지라 이미 지칠 대로 지쳐있어 제대로 그의 그림을 감상할 수 없었고, 무엇보다 종교가 없다는 이유로 성경에 대해 일자무식했던 나는 도통 그림을 이해하리 만무했다. 오디오 가이드를 듣고 있어도 애초에 성경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 탓에 이 그림이 탄생하게 된 배경에 대해 크게 와닿지 않았다. 유럽여행 도중 적어도 한 번은 미술관에 가볼 사람이라면, '만화로 보는 성경 이야기'라도 읽고 오는 것을 추천하는 바이다.


미술사 박물관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바로 합스부르크 왕가의 공예품들이었는데, 어느 웹페이지에서 합스부르크 왕가의 유전병과 흥망성쇠를 재밌게 읽어본 나는 유독 그들의 유물이 흥미로웠다. 영화에서만 보던 우아하고도 아름다운 중세 시대 왕가의 공예품을 보자니, 실제로 그들이 살아있던 '사람'들이었구나라는 것을 몸소 실감하였다. 오스트리아에서 돌아온 지 수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그 들이 사용하던 금빛 생활용품들과 용도가 상상이 되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웠던 찻잔이 여전히 기억에 남는다.

마리아 테레지아 광장(Maria-Theresien-Platz)

몇 시간을 거쳐 미술사 박물관을 둘러본 탓에 어느덧 밖에는 어둠이 깔렸다. 미술사 박물관과 자연사 박물관을 사이에 둔 마리아 테레지아 광장에서는 내가 비수기에 왔다는 것을 실감할 정도로 동양인은 나를 비롯하여 5명도 채 찾아볼 수 없었다. 어느덧 사람들은 공예품 대신 저녁으로 때울 먹거리들을 고르기 시작하였는데, 나도 그 가운데에 조심스레 가장 맛있어 보이는 핫도그를 하나 집어 들었다. 서서 먹을 수 있는 테이블에 쭈뼛쭈뼛 다가가 사람들과 섞여 핫도그를 한입 베어 물었는데, 별다를 것 없어 보이는 빵에 무심히 끼워진 소시지가 유달리 맛이 좋았다.

어느덧 밤이 되어 숙소로 돌아가기 위해 국회의사당을 등지고 길을 건너던 찰나였다. 당시 시티 버스 담당자로 보였던 내 또래 남자가 나에게 어디로 가냐며 말을 걸었는데, 나는 괜스레 무서운 마음에 어색한 웃음을 짓고는 길을 건넜다. 그런데 그날따라 유독 말을 듣지 않던 GPS 탓에 나는 다시 국회의사당 앞으로 돌아와야 했는데 이번에도 그가 친절하게 말을 걸었고 우리는 그렇게 몇 마디를 주고받을 수 있었다. 알고 보니 그는 한국에서 여행한 경험이 있었는데, 타지에서 만난 외국인과 우리나라 관광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에 신기하기도 하고 반가운 마음이 들어 나는 다음에 올 때는 남해를 꼭 오라며 그에게 신신당부를 하였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벨기에에서 나에게 도움을 주고자 말을 걸었던 중년 아저씨를 나는 무서운 마음에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은 채 그를 불편하게 만들며 돌려보내야 했고, 나의 고데기가 귀엽다며 말을 건 어느 이탈리아인에게도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대화를 이어가지 못했다. 여행자의 신분이었던 탓에 나는 영어를 쓴다는 것에는 큰 두려움은 없었지만 당시에는 경계심이 가득인지라 마음을 열지 못하고 어깨부터 긴장한 티를 내며 가시를 돋치고 다녔던 탓이었다. 물론 밤에 만난 어느 외국인 남성이 말을 건다는 것은 충분히 긴장될 만한 상황이었지만 생각해보니 그는 시티투어를 담당하는 직원인지라 수많은 관광객들을 마주하였을 테고, 그는 단지 횡단보도를 3번이나 건너고 돌아오기를 반복하는 나에게 호의를 베풀었을 뿐이리라.

그렇게 일부로 돌아갈지라도 한번 더 크리스마켓을 보고자 한 나는 다시 빈 시청사를 찾았다. 사실 나는 그토록 아름다운 크리스마켓을 밤에 두 번 정도 찾아갔는데 마지막에 본 크리스마켓은 그 분위기가 한뜻 달아올라 마치 내가 이곳에 실존해있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웠고 찬란하였다. 낮에 본 크리스마켓이 귀여운 인형극 무대에 서있는 기분이었다면 밤에 본 크리스마켓은 온통 빛으로 가득한 소행성에 떨어진 기분이었다. 아무런 슬픔도, 분노도, 우울도 없이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곳. 광장 입구로 나와 영롱한 빛을 내뿜는 빈 시청사와 크리스마켓을 한눈에 담는 일은, 내 생에 다시는 잊지 못할 만큼 굉장히 황홀한 순간이었다. 그야말로 속수무책으로 황홀경에 빠질 수밖에 없는 공간이었다.


누군가 성수기와 비수기 중 어느 때에 유럽을 갈지 고민 중이라면 나는 선뜻 비수기를 답할 것이다. 비수기로 가되, 크리스마켓을 볼 수 있도록 12월 중순을 포함하라고. 이 세상에 예수가 탄생한 것이 살며 얼마나 큰 축복을 줄 수 있는지를 처음으로 체감하던 순간. 그리스도에게 미사를 드린다는 크리스마스의 어원처럼, 나는 무교로 살던 동안 처음으로 예수의 탄생을 축복하였다. 그리고 눈부시고도 영롱하게 빛나는 빈 시청사를 바라보며, 모든 슬픔을 잊은 채 이 순간 살아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하고도 아름다운 일임을 실감하였다. 


삶이 팍팍한 한가운데에 그 순간만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올라 다시 살아갈 의지를 주는 것. 그것이야말로 예수의 탄생을 기리며 서로가 서로를 축복하는 크리스마켓의 의미는 아닐까. 비록 그 순간을 홀로 추억하며, 그 당시의 황홀경을 감히 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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