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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서 유 Oct 06. 2022

개천에서 난 용이 개천을 향해 읊는 처연한 애가(哀歌)

2022 제11회 협성독서왕 독후감공모 응모 : 힐빌리의 노래

어릴 적에는 개천에서 용이 난다는 속담이 자수성가의 희망같이 들렸지만 나이가 들수록 전혀 다른 말임을 실감했다. 개천에서 용이 난다는 표현은 언젠가부터 희망과 위로를 품는 속담이 아닌 더는 개천에서조차 용이 나지 못할 것이라는 사회적인 무기력함과 불안을 품고 있었다. 할아버지의 경제력, 아빠의 무관심, 엄마의 정보력이 한 아이를 성공에 이르게 한다는 말은 이미 오래전부터 그러한 현 시대적 상황을 잘 보여주는 말이자 경제력이 조보무로부터 이루어지지 않으면 신분 상승이 쉬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뜻을 내포했다. 그러니까 이제는 부모님조차 자수성가해봐야 그 개천에 쉽게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비단 한국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이 전 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이끈 것 역시 영화 자체의 작품성과 더불어 이 영화가 내포한 메시지를 모두가 불편하면서도 공감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힐빌리의 노래>와 <기생충> 사이에 공통점이라면, 극빈층에 관한 이야기를 그렸다는 것이 아니라 동족 혐오에 대한 자화상일 것이다. 그러나 <기생충>의 주인공은 지하에 머무는 반면 <힐빌리의 노래>의 주인공은 지상에 기어코 발을 내디딘다. 이는 내부의 문제를 알아가고 다소 운이 조금 더 좋았던 자와, 내부의 문제가 무엇인지 모른 채 운조차 없던 자의 차이일지도 모른다.


저자 J.D.밴스는 책에서 줄곧 자신은 이처럼 운이 좋은 사람이라 표한다. 그는 부모 노릇을 자청하여 손주들에게만은 끝없는 지지를 보여주셨던 조부모가 있었고 시궁창 같은 집구석이라 할지여도 든든히 자신 앞에서 버텨주었던 누나가 있었으며, 남자 어른이 무엇인지를 가르칠 수 있는 친척 어른들이 있었다. 마약중독으로 빠져가는 엄마와 같이 사는 남자들을 그가 아버지 후보라고 부른 이유는 어쩌면 그들이 그에게만은 폭력을 가하지 않는, 그러니까 최소한 아동 폭력까진 행하지 않는 이들이어서일지도 모른다. 저자는 그 사실을 인지하며 그것 또한 자신의 운이라 말한다. 이 책이 고난과 역경을 딛고 성공 신화를 이룬 자기계발서가 아닌 명백한 이유는, 저자가 자신의 성공 원인을 온전한 자신의 노력만은 아니었음을 그 누구보다 인지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그가 이미 떠난 지역사회를 외면하는 것이 아닌 처연한 심정으로 회고하는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가 운이라 부른 것들이 사실 극빈층만 아니라면 영위하였을 것이기에 그는 개인의 실패가 개인만의 능력 부족이 아니라는 것을 절감하고 있는 것이다.


<힐빌리의 노래> 속에 등장하는 많은 이야기는 돈 없이 자라본 이들이라면 저자가 느꼈을 감정에 공감되어 자신의 지난날을 반추하기에 충분하다. 굳이 자신이 직접적인 비슷한 심경을 겪지 못했더라도 책에 등장하는 사회적인 악순환은 한국의 그것과 다르지 않음을 유추할 수 있다. 불안정한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이 올바르지 못한 선택과 한순간의 도피성 쾌락으로 인해 어린 나이에 임신을 하거나 혹은 다시 폭력적인 배우자를 만나 가난과 폭력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다. 운 좋게 청소년기를 별 탈 없이 지나갔다고 하더라도 부모의 경제소득과 의식 수준이 낮을수록 자녀 역시 그럴 가능성이 농후하며, 경제적으로 부족한 아이들은 자신이 그릴 수 있는 한계를 쉽게 규정짓는다. 그가 처한 환경이 총기 소유가 가능하고 마약을 쉽게 접할 수 있는 미국이어서 그렇지 사실 그의 유년 시절을 제각기 다른 에피소드로 때어본다면 그 결은 한국의 빈민층과도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굳이 빈민층은 아니더라도 돈 없이 자라본 사람들은 그의 마음을 부분적으로라도 공감할 것이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한국에서 전형적인 생산노동자의 장녀로 자란 나 역시 어릴 적부터 인생의 모든 선택은 돈으로 귀결됐다. 학창 시절 나는 그 흔한 학원을 한반도 다녀보지 않고 어느 정도 중위권의 성적을 유지했노라며 너스레를 떨었지만, 실은 나의 선택이 아닌 보낼 수없던 가정환경으로 비롯된 결과였다. 오래전 잠시 친하게 지냈던 친구의 아버지가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사드시고 친구들과 포차가 아닌 카페에서 커피를 드신다는 사실이 20대 중반인 나에겐 제법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 아버지의 직업은 CEO셨고, 소 몇 마리를 팔아야 대학을 보낼 수 있던 시절에 대학을 나오셨다. 우리 부모님은 <할빌리의 노래> 속 할모와 할보처럼 손주가 점원에게 못된 취급을 받았다 해서 가게를 난장판으로 만들 정도의 분들까지는 아니시지만, 그의 아버지처럼 아이폰과 스타벅스가 익숙한 분들은 아니다. <할빌리의 노래>가 19세관람불가의 가난이라면 우리집은 전체이용가 정도의 가난이랄까.


아무튼간에 그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넉넉하지 못한 집에서 자란 아이가 느낀 불안과 돈으로 인하여 유년 시절 부부싸움에 노출되면서 얻는 스트레스의 결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힐빌리의 노래> 속 등장하는 힐빌리들의 어느 일면은 나에게도 존재하는 것임을 책을 읽는 내내 부정할 순 없었다. 누군가에게는 작은 빌라여도 부모님의 명의로 된 자가가 있는 우리집은 어렵지 않은 집에 속할 것이다. 허나 이 작은 집은 우리가족이 평범한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하는 유일한 수단이다. 집을 수익을 내기 위해 사는 자와 더 이상 가난해지지 않기 위해 사는 자의 차이는 분명 다를 것이다. 지금도 나는 내 삶의 여러 운 중 하나는 이사를 가지 않아도 되는 부모님의 집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비록 저자처럼 높은 임금을 받는 전문직으로 성공하지는 못했으나 나 역시 전문직종에 일하는 타이틀을 지녔다. 쥐꼬리만 한 월급이지만 남들이 들으면 제법 나쁘지는 않다고 말할 안정적인 직장을 지녔다. 정년까지 보장되는 직업이니 내가 이 직장을 뛰쳐나오지 않는 이상 수입이 끊길 일은 없다. 집단 내에서 비정규직으로 일하곤 있으나 정년이 보장되는 무기계약직이다 보니, 직장 환경상 어쩔 수 없는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아무튼 나 역시 전체이용가 수준의 힐빌리이지만 저자처럼 평범한 삶의 영위에 들어왔다는 이야기이다.


저자가 이처럼 자신은 번듯해진 상황에서 감자튀김 하나조차 쉽게 더 사달라고 말하지 못하는 동향 아이를 만났을 때의 그 착잡한 심정도 나는 느꼈다. 첫 직장을 모교로 잡았고, 우리 동네는 문화재가 있다는 이유로 어느 부분에서는 분명 더욱 낙후되고 있었으며 폐교 직전인 학급수가 그 사실을 반증했다. 그곳에서 내가 가장 아끼던 아이들은 돈 때문에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미래를 분명 제한하고 있었다. 그 당시 나도 분명 어린 나이었으나 그 복잡한 심경은 겪어본 이라면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넷플릭스는 이 책을 원작으로 영화를 제작했다. 동명의 영화와 책을 모두 본 이들은 이 영화가 책보다는 너무 밝다며 평했다. 어쩌면 영화는 이 책의 주인공이 지금의 자리에 오기까지 받아온 온정과 사랑 그리고 몇 가지 운과 희망에 대해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원작에서는 저자의 엄마가 마약에 다시 손을 대었고, 저자는 자신의 경제적 상황이 닿는 정도까지는 엄마를 모실 수밖에 없음을 말하며 왜 힐빌리에서 자신과 같은 사례는 또 나오기가 힘든지에 대해 다소 비관적으로 바라본다. 개천에서 난 용에 별수 없이 개천을 뒤돌아보는 이야기로 끝을 맺은 책을 덮으며 나는 우리집이 개천인지 아닌지 그리고 내가 용인지 아닌지에 대해 잠시 골몰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조차도 생각하지 않을 정도로 다른 환경은 분명 존재한다는 것이다.


저자의 조부모인 할모와 할보는 손주가 가난에 함몰되지 않도록 끊임없는 노력을 보인다. 어쩌면 엄마가 나에게 학원을 보내주지 못하는 대신 장기간 학습지를 시키신 것은 자녀가 뒤처지지 않도록 하기 위한 최대한의 노력이셨을 것이다. 최소한의 교육은 끝까지 놓지 않은 엄마 덕분에 나는 지금도 영어가 두렵지 않으며, 영어에 대한 흥미를 어른이 된 지금까지도 놓지 않을 수 있었다.


저자처럼 내게는 아메리칸드림을 이미 이룬 셋째 이모가 계셨고, 그분 덕에 다른 세상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어릴 적부터 상기시킬 수 있었다. 우리집은 다소 화목하고 안온한 편이며, 아빠는 비록 세련된 도시 아저씨는 못되시지만 내가 만약 사위가 바람을 피우면 어찌할 거냐는 물음에 반쯤 죽여놓는다는 대답으로 딸을 향한 사랑을 표현하시는 분이다. 해병대로 입대한 저자가 괴롭힘을 당할 때마다 총을 든 기골이 장대한 노인을 떠올리며 든든해 하듯이 내게는 지금의 무난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많은 운이 존재함을 덕분에 깨달았다. 그가 아이티의 아이들을 보며 알았던 것을 나는 그를 통해 알게 된 것이다.


저자는 어린 시절엔 괴물에게 쫓기는 꿈을 꾸었지만, 나이가 들어 자신이 그 괴물이 되는 사랑하는 반려견의 목을 조르는 꿈을 꾸게 된다. 그는 꿈속에서 반려견을 죽이지 않았다는 것에 안심하며 새벽에 일어나 사랑스러운 자신의 아내와 지금 자신이 누리는 삶에 대해 안도하며 다시 잠을 청한다. 어린 시절 그의 꿈에 등장한 괴물은 가난이었지만 어른이 되어 꾼 꿈속에서의 괴물은 미쳐 다 벗겨내지 못한 지난 가난의 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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