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사서 유 Nov 01. 2022

2018.3.27~28 / 지갑 실종 사건

골드코스트, 드림월드

혼자 여행은 왔어도 도무지 서핑스쿨을 혼자서 수강할 자신은 없었던 나는 골드코스트에서 물놀이 대신 테마파크를 택했다. 내가 극적으로 내성적인 사람이었다면 테마파크조차 엄두가 나지 않았을 테지만 오히려 홀로 놀이공원을 가는 것은 꽤 자신이 있었다. 놀이기구는 대체로 1인승일 것이고, 무엇보다 사람들이 한데모여 서핑을 하는 곳 보다는 넓디넓을테니라는 적절한 합리화였다. 그렇게 홀로 놀이동산을 갈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있던 찰나 케언즈에서 만난 S오빠와 함께 드림랜드를 동행하게 되었다. 오빠는 나와 10살 정도 차이가 나서인지, 서로를 자연스레 삼촌-조카처럼 보았는데 나 역시 타국에서 만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편하게 대해주는 오빠가 퍽 편하여 나이차이가 조금 나는 친척오빠와 명절을 함께하는 기분이 들었다.


오빠와 나는 오전 중에 만나 함께 드림랜드로 향하는 전철에 올랐다. 오빠는 그 와중에 어린 동생에게 과일을 먹이겠다며 락앤락 같은 통에 과일을 바리바리 싸 들고 왔는데, 그만 통이 열리는 바람에 가방엔 세상 알 수 없는 과일향이 진동을 했다. 안타깝게도 온갖 과일향은 시간이 지나며 다소 이상한 냄새를 풍기기 시작했고 오빠는 함께 여행 가는 사람이 냄새나는 사람이라 미안하다며 아침부터 나를 폭소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소소한 에피소드를 만들며 우여곡절 끝에 드림월드에 도착했다.

우리는 드림월드에서 놀이기구를 3개 정도 타볼 수 있는 이용권을 끊었기에, 그나마 가장 재밌어 보이는 놀이기구를 먼저 골라 탑승했다. 드림월드가 전체적으로 아기자기한 면이 있어 놀이기구의 난이도 또한 다소 얕잡아 보았는데 생각보다 스피드가 워낙 빨라 내려오자마자 다리가 후들거렸다. 적당히 여러 놀이기구들을 돌아보다가 우리는 꽤 맛있는 피자로 점심을 해결했다. 퍼레이드를 대신하듯이 오후 정도 되니 곳곳에서 작은 이벤트들이 있었는데 그날 우리는 배트맨의 한 장면을 볼 수 있었다. 드림월드의 곳곳을 구경하며 나는 오빠에게 연신 사진을 부탁했고, 오빠가 사준 커다란 토끼귀 머리띠를 장착한 채 그 머리띠가 떨어지려야 조심스럽게 쓰고 다니며 좋은 배경이 될만한 곳에선 어김없이 사진을 찍어댔다.


20살에 미국에 사는 친척언니와 함께 떠난 디즈니랜드 이후 처음으로 외국에서 경험한 놀이동산의 하이라이트는 의외로 '오락실'에 있었다. 나와 S오빠는 노을이 질 즈음까지 재밌게 구경을 다니다가 사람들이 의외로 많이 찾지 않는 오락실 안으로 들어갔다. 오락실에서는 게임을 할 수 있는 티켓을 뽑는 기계가 있었는데, 기계의 오류로 티켓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왔고 우리는 사람이 적어서 괜찮다는 직원의 배려로 그 티켓으로 모든 게임들을 다 경험해볼 수 있었다. 게임으로 열심히 모은 토큰같은 것으로 나는 상품 하나를 받아올 수 있었다. 오빠가 자신의 토큰도 나에게 모두 몰아준 덕에 내 상체만 한 커다란 바니인형을 얻어올 수 있었고, 그날 S오빠가 마지막날이라며 저녁으로 치킨까지 사준 뒤에 호스텔로 돌아와 오늘 산 머리띠와 인형을 자랑했다. 성격이 꽤 괄괄하여 내가 조금 무서워한 중국인 룸메이트가 'Fucking cute'를 연신 날리며 내 머리띠를 꽤나 귀여워했고, 다음날 다가온 재앙을 상상조차 하지 못한 채 오늘 하루 찍은 몇백 장의 사진들을 정리한 뒤 잠이 들었다.

예기치 못한 사건은 단순히 나의 '건망증' 때문에 벌어졌다. 평소에도 핸드폰이나 지갑 등을 공공 화장실에 잘 두고 나오는 버릇이 있는데, 한국에서의 나는 번번이 그 물건들을 되찾아 올 수 있었다. 물론 한국에서는. 나는 지갑을 방 안에 두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하여, 화장실을 갈 때에도 지갑만큼은 늘 들고 다녔는데 그날도 지갑을 든 채 세수를 마친 뒤 그대로 지갑을 세면대에 놓고 온 바보같은 짓을 저지른 것이다. 물론 내가 곧바로 방에 돌아와 사실을 알아차린 뒤 화장실로 냅다 달려갔으면 그 지갑을 찾을 수도 있었겠으나, 그 사실을 새로운 칫솔을 사러 나오는 길에 깨달아 버렸다. 그러니까 내 실수로 멀쩡한 지갑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것도 누군가의 고의성 도난이 아닌 온전한 나의 실수로. 지갑에는 17불 정도 되는 금액이 들어있었고 카드는 곧바로 앱에 들어가 도난 신고를 했다. 그 지갑은 동생이 생일선물로 사준 꽤 내가 아끼던 지갑이었는데 지갑을 통으로 잃어버린 것도 화가 났지만 무엇보다 지갑을 갖다바친 수준의 실수로 벌어진 일이라는 것에 스스로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나는 곧바로 카운터로 가서 자초지종을 설명했고 직원들은 누가 나의 지갑을 가져갔는지를 열심히 찾아주었지만 화장실에는 CCTV가 설치되지 않은 데다가 지갑을 당당하게 가지고 나올 도둑은 없었다. 결국 나는 속상한 마음에 울음을 터트렸고 직원은 나를 가볍게 포옹하고 달래며 큰돈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며 연신 위로해 주었다. 몇 해 전 벨기에를 여행하다 영국 사진을 잔뜩 찍은 sd카드를 잃어버린 날처럼, 나는 그날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그저 바다를 걸으며 기분이 나아지기만을 기다렸다. 내 지갑을 누가 가져간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숙소에 있던 모든 투숙객들이 미웠고, 그날따라 광활한 바다가 괜스레 야속했다. 전 날 행복했던 나의 기분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채 지갑을 잃은 우울함만이 남았고 어떻게 해서든 저녁은 때워야 하여 패스트푸드로 빈속을 달랬다.


그 후로 나는 호주에 머무는 11일가량은 앉은 자리에서 무언가 두고 나오지 않았는지 살폈지만, 한국에 다시 돌아와 또 난데없이 물건들을 잃어버리기 일쑤였다. 나를 건망증으로 만드는 것은 카페에서 자리는 탐나되 자리 위에 있는 물건은 탐내하지 않는 한국의 문화 때문일 것이라며 물건을 찾을 때마다 안도하면서.


이전 14화 2018.3.24~26 / 마오의 마지막 댄서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