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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서 유 Feb 19. 2023

앤트맨으로 시작하여 앤트로 끝나는 영화

<앤트맨과 와스프: 퀀텀매니아>를 보고

MCU가 새로운 작품을 내놓을 때마다 본의 아니게 화제에 오르곤 했다. 주로 긍정적인 의견이라기보다는, 회의감 어린 시선이 많았고 관객층의 분열 역시 점차 심화되었다. 뒤늦게나마 마블에 입덕하고 싶으나 높아져버린 진입장벽 탓에 애당초 시도조차 못하게 된 사람, 몇 편 놓친 뒤 다시 보려고 했지만 세계관의 확장이 스크린관을 넘어 OTT서비스까지 확대되자 더 이상 보기를 포기한 사람, 마블영화에 대한 애정이 가득했으나 계속되는 실망으로 뒤돌은 사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는 자신의 취향이 조금은 호에 가까웠던 사람 등.


<블랙팬서: 와칸다 포에버>는 사실 이러한 마블영화의 시류를 보이는 작품이라기보다는 미국문화, 인종차별, 채드윅 보스만이라는 배우에 대한 이해도와 애정도에 따라 영화평이 극명하게 나뉘는 작품이었다. 그러니까 마블영화를 좋아하지 않아도 채드윅 보스만을 좋아했던 이라면 누구라도 눈문을 흘리며 감동받았을 작품인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나는 언제나 마블영화를 볼 때면 가슴이 두근거리는 호에 가까웠다.


그러나 최근개봉작 <앤트맨과 와스프: 퀀텀매니아>는 이러한 나의 애정에 배신을 내리꽂듯 JK필름표 명절영화를 보는 듯한 감상을 여실히 남기는 작품이었다. 영화자체가 워낙 기승전결이 뚜렷한 액션히어로 영화이기 때문에 생각과 애정 없이 보기에는 무리는 아니나 큰 단점들이 수반되는 작품이었다. 기존의 작품들은 영화 자체의 문제라기보다는 마블영화에 대한 전반적인 문제점이 같이 얽혀있었다면 이번 작품 <앤트맨과 와스프: 퀀텀매니아>는 작품이 MCU시리즈에 대한 몰입도를 방해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차라리 <문나이트>가 디즈니플러스 시리즈가 아닌 한 편의 단독 영화로 개봉되었다면 마블을 떠나가는 팬들을 다시 붙잡을 수 있었을까.

2대 앤트맨 스콧 랭은 어벤져스의 일원으로 세상을 구한 뒤 책을 출판하며 소소한 셀럽(?)으로서의 삶을 영위하고 있다. 그의 딸 캐시는 노숙자들을 돕다가 유치장에 갇히고 마는 사춘기 소녀로 성장하였으며 여전히 영웅을 필요로 하는 시대에 그저 조용히 살고 있는 아빠 앤트맨의 행보가 못마땅하다. 그러던 어느 날 양자영역을 직접 가지 않고 신호를 보낼 수 있는 장치를 개발한 캐시가 이를 가족들에게 선보이게 되고 그 속에서 어떤 불가항적이 힘이 이 들을 모두 빨아들인다.


<앤트맨과 와스프: 퀀텀매니아>(이하 앤트맨3)는 가장 중요한 과업을 떠안은 채 영화가 제작되어야 했다. 마블시리즈는 OTT로 그 영역을 확장하면서 브라운관과 스크린관을 넘나들면서도 서로의 세계관을 공유해야 하는 어려운 과제를 부여받았는데, 이는 어쩌면 케빈 파이기의 과욕이었는지도 모른다. 다만 전작들은 특색이 뚜렷한 감독을 기용하면서 감독이 자신의 색을 잃지 않으면서도 드라마 시리즈에 선보인 내용들을 어떻게 해서든 이어갔지만, 최근 개봉작 앤트맨 3는 '정복자 캉'을 무소불위의 빌런으로 묘사하는 데에 실패하고 만다.


캉의 서사를 서술하는 것과 스크린관에 캉을 데뷔시키는 것은 꽤나 좋은 시도처럼 보였으나, 정복자 캉이 아무리 멀티버스로 인하여 여러 명이 존재한다 할지어도 해리포터의 볼드모트만큼이나 이름만으로도 모두가 무서워 벌벌 떨어야 하는 존재로 관객들을 각인시키는 것에는 성공시켜야 했다. 그러나 정복자 캉을 결국 무너트린 주체가 앤트맨도 아니고 와스프도 아닌 지구에서 약한 존재라는 사실(극 중의 서사를 넘어 떠오르는 이미지 만으로도)에서 물음표를 남긴다.

더불어 앤트맨3는 개그캐릭터로 소비되는 서브빌런, JK필름표 신파를 떠오르게 하는 '캐시를 위하여', 다소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설정구멍 등을 차치하더라도 되려 마블시리즈에 몰입도를 방해하고 마는 중대한 실수를 저지른다. 애당초 영화에서 등장하는 양자역학(또는 양자영역)은 현실에 존재하는 양자역학의 개념과는 전혀 다른 것이며 '마이크로버스'라는 원작의 시공간을 현실적인 판권문제로 인하여 결국 '양자영역'이라는 이름만 빌려온 가상의 공간이다.


그러나 마블시리즈 내에서 이에 대한 설명이 불충분했던 관계로 실제 양자역학과 마블에서 등장하는 양자역학의 차이점에 대하여 혼동하는 관객들이 생겨났고, 유튜브에서는 이를 정리한 내용이 등장하기도 하였으며 출판계에서는 이를 이용하여 양자역학에 대하여 쉽게 풀어쓴 책들이 출판되고는 하였다. 그러나 엄연히 이는 다른 개념이었으므로 MCU는 이를 분명하게 구분지을 작품이 필요하였고, 그 작품은 앤트맨3가 되어야 했으나 정작 앤트맨3는 확률, 슈뢰딩거의 고양이를 직접적으로 언급함으로써 되려 혼동을 야기하고 만다. 오히려 구분 지을 역할을 부여받은 작품이 되려 혼동을 넘어 혼돈을 야기한 형국이다.


<앤트맨과 와스프:퀀텀 매니아>는 참으로 기묘한 작품이다. '재미'가 없다고 표현하기에는 나름의 기승전결이 있는, 앞서 서문에도 밝혔듯이 부담 없이 보기에는 나쁘지 않을 히어로영화임은 틀림없다. 그러나 남는 것이 없다. MCU 내에서 부여받은 과제도. 기존의 팬들을 위한 감동도. 신규팬들의 영입을 위한 매력도. 빌런에 대한 공포와 각인도 없다. 심지어 쿠키영상이 드라마 로키임에  마블영화는 진입장벽을 더욱 공고히 쌓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현존하는 그리스 로마 신화를 꿈꾸었다던 케빈 파이기는 이제 자신이 태초의 신인 문명의 전설이 되고자 하는 듯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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