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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서 유 Dec 28. 2020

<오리지널스> 가족이라는 굴레, 가족이라는 구원

비정하고도 다정한 뱀파이어 가족극

오랜만에 서점을 갔더니 <나의 다정하고 무례한 엄마>라는 책이 있었다. '다정함'과 '무례함'과 '엄마'라는 세 단어가 한 문장에 들어가자 묘한 이질감마저 느껴졌다. 이처럼 혈연으로 묶인 가족은 때로는 구원이자 굴레가 되어 종종 고통으로 돌아오곤 한다. 가족이 주는 안정감과 지지, 심리적인 충만함과 함께 따라오는 선택할 수 없는 인연들에게서 벗어날 수 없는 속박감이랄까. 미드 <오리지널스>는 뱀파이어의 기원이 된 가족들이 이처럼 서로가 서로에게 구원이자 굴레가 되는 과정을 선혈이 낭자한 뱀파이어물을 통해 보인다. 어둡고 음습하지만 때때로 처연하고 따뜻하기까지한, 비정하지만 다정한 가족극으로.

<오리지널스>는 미국의 The CW방송사에서 2013년부터 방영한 <뱀파이어 다이어리>의 스핀오프작이다. 전작에서 뱀파이어 기원으로 등장한 오리지널스 가족(마이클슨 패밀리) 중 늑대인간이면서 동시에 뱀파이어인 하이브리드 클라우스와 늑대인간 헤일리 사이에서 아이가 생기며 이야기는 전개된다. 자신이 형 일라이자와 함께 일군 도시 뉴올리언스로 돌아온 클라우스는 자신의 양아들이었던 마르쉘과 대치하게 되고, 조카가 자신의 동생 클라우스를 구원할 유일한 존재라 믿던 일라이자는 자신의 동생을 임신한 여자 헤일리를 사랑하고 만다.


한 문장으로 요약해도 기구한 이 가족의 역사는 천년부터 이어진 애정과 증오로 점철되어있다. 심지어 판타지임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내면과 그 상처를 살펴보자면 꽤나 현실적이다. 가정폭력을 휘두르다 못해 종국에는 자식들을 부정하다 못해 죽이려 하는 아버지와 막내의 죽음과 그로인해 자식들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불멸의 삶을 자신의 손으로 선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식을 괴물이라 칭하는 어머니까지. 본디 예술성이 풍부한 아이였음에도 불구하고 폭력적인 아버지 밑에서 늘 약하다는 이유로 가정폭력을 당해왔던 데다가 심지어 자신이 어머니의 외도로 낳은 이붓아들이었음을 알게 된 클라우스가 온화한 성품을 가진 채 불멸의 삶을 살기란 불가능에 가까웠을 것이다.


어릴 적 납치된 장녀와, 어머니만 따랐던 장남, 동생의 폭력을 방관했다는 죄책감에 삶의 목적이 동생의 구원이 돼버린 셋째와 망가져버린 가족구성원 속에서 고통받으며 셋째 오빠의 과보호 안에 사랑하는 사람을 늘 잃어야만 했던 여동생, 형과 여동생 사이에서 소외감을 느끼며 살아온 넷째까지. 이 가족에 대해 하나의 논문이 나오면 어떨까싶을 정도로 기구한 가족 사이에 천 년 만에 한 생명이 찾아온다. 그런데 가정폭력의 피해자인 클라우스와 하룻밤으로 임신을 하고만 헤일리 역시 역시 친부모를 잃고 어릴 적 입양된 것도 모자라 늑대인간의 저주가 발현되어 가출한 아픔이 있다. 이처럼 기구하고 복잡한 가족사가 <오리지널스>의 시작인 것이다.

전작 <뱀파이어 다이어리>가 사랑과 우정, 가족 내 갈등, 불멸의 삶에 대한 고찰 등 꽤 다양한 주제가 내포되어 있었다면 <오리지널스>는 가족이란 주제로 명확하게 돌진한다. 오히려 <뱀파이어 다이어리>를 시즌 1부터 결말까지 놓지 않고 보았던 나로서는 중간에 이내 산으로 가고만 전작과는 달리 하나의 주제로 전 시즌을 이끌어간 <오리지널스>가 더욱 마음에 남는다. 게다가 뱀파이어와 마녀, 늑대인간 등이 주인공인 드라마임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겪는 갈등구조는 꽤 현실적이다.


가정폭력을 휘두른 아버지 밑에서 자란 남자가 느닷없이 생긴 자신의 딸을 거부하다 이내 받아들이는 과정과, 서로 부모의 온전한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한 남녀가 어느 날 부모가 되며 겪는 갈등이라던지. 과보호가 사랑이라고 믿는 비뚤어진 애정이라던지. 동생을 구하고자 애썼지만 언니를 버리고 남자를 택한 동생에 대한 언니의 분노와 용서라던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이들이 과연 진정한 가족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고찰이라던지, 동생을 자식처럼 사랑한 형의 비정한 애정이라던지, 자신의 딸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내놓은 부모의 애끓는 사랑이라던지 등등.


주인공들은 보는 나까지도 불안증이 올 정도로 끊임없이 외부의 적들과 전쟁을 치른다. 그 안에서 서로의 이해관계로 인하여 배신과 복수, 용서가 뒤엉키는 가족사를 보인다. 비현실적인 존재들이 겪는 현실적인 고뇌들은 오히려 느닷없이 뱀파이어가 된 이들의 불멸의 삶 적응기보다도 더욱 몰입도를 가져온다. 주인공들의 심리에 꽤 공감하게 되고, 안쓰럽고 처연한 시선을 보내기도 쉽다. 감정을 건드리다 못해 쑤시기를 좋아하는 한국의 드라마와는 다르게 내가 봐온 외국드라마들은 특유의 '신파'가 없어 주인공들에게 감정이입이 깊이 되지 않는 이상 눈물을 흘리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오리지널스>를 보며 나는 몇 번이고 눈물을 훔쳤고, 결말에 여운마저 남을 정도였다.


물론 이 드라마에 위같은 장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중간에 별안간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설정이 등장하여 당혹스럽기도 했고, 주인공들의 행동 중 '굳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답답한 순간도 있던데다가, 시즌 마지막에 한 캐릭터가 완전히 붕괴하여 팬들의 미움을 받자 그 캐릭터를 연기한 배우가 자신의 SNS에 글까지 올리는 사태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속도감 있는 전개와 뱀파이어물에 거부감이 없는 이라면 한번 즈음 권해보고 싶다. <뱀파이어 다이어리>를 재밌게 본 팬들이라면 더할 나위 없고. 비현실적인 존재들이 겪는 현실적인 아픔과 속도감 있는 전개에 어느덧 정신을 차려보면 다섯 개의 시즌을 모두 끝낸 자신을 발견할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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