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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서 유 Mar 05. 2021

<거의없다의 방구석 영화관> 염세적인 나에게 그는

거의없다(백재욱)의 책을 읽고

나는 염세적인 사람이다. 여기서 염세적인 사람이라며 선포하기 전 간략한 뜻이라도 살펴보자면, 염세적이다는 국어사전으로 '세상을 싫어하고 모든 일을 어둡고 부정적인 것으로 보는 것.'이라 한다. 내가 세상을 그렇게 싫어했던가?라고 생각해 본다면 나는 모든 친절엔 대가가 따르고 성악설을 믿는 사람이라 영 틀린 말도 아닌 것 같다. 얼마나 꼬였냐면 요즘 한창 유행하는 브이로그들을 볼 때 출연자의 얼굴이 뛰어나게 괜찮다면 굳이 영상을 끝까지 보기가 싫다. 그 들의 일상을 기록하고 함께 공유하는 것이 아닌 마치 외모덕을 보는 또 하나의 방법 같달까. 외모를 기준으로 편집자의 노고를 인정하지 않는 것도 아닌 데다가 스스로 괴팍함을 알기에 더 이상 말을 이어가지 않겠다. 요지는 내가 그만큼 꼬인 사람이라는 것이다.


더불어 잘 되는 사람의 성공기보다는 주로 망한 사람의 성공기가 더 와닿기도 하다. 성공한 사람들은 그들이 아침에 마시는 커피가 아메리카노가 아닌 노란색 믹스커피여도 그것이 성공의 한 가지 요소 같아 보이는 데다가, 그들은 어느새 유명한 것으로 유명한 사람들이 되어있었다. 물론, 이 중에서도 물론 배울 점이 많은 분들이 있고 성공은커녕 하루살이에 가까운 내가 이런 말을 논하는 것이 매우 조심스럽지만 이것 역시 요지는 내가 그만큼 꼬였다는 것이다.


책을 소개하기 전에 앞서 하도 내가 이렇게 꼬인 사람이라는 것을 늘어트리는 이유는, 이러한 연유로 나는 잘 된 영화보다 왜 이 영화가 이따위로 망했는지에 대해 설명하는 유튜버를 좋아하게 되었고 그런 그가 책을 낸다고 했을 때 반갑지 않을 수 없었다. 유튜버 <거의없다>로 활동하고 있는 작가의 채널은 앞서 말한 것과 같이 망한 영화가 왜 망했는지에 대해 다룬다. 그는 방구석1열에 납품(?) 하기 위한 영상들을 더러 제작하기도 하며 종종 예고 없이 라이브방송을 켜 몇 시간가량을 구독자들과(또는 악플러들과) 함께 소통한다. 그가 라디오를 출연해서인지 아니면 여타 다른 방송에도 얼굴을 비추고 있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는 말솜씨가 매우 좋은 편이고, 글을 잘 쓰는 사람은 말도 잘한다는 것을 그를 통해서 다시 알았던 것 같다. 그의 라이브방송을 들으며 책을 정리하는 나는 사서임에도 불구하고 책 정리를 매우 싫어하는 사람이었지만, 그의 방송을 들으며 지루한 육체노동을 꽤 잘 버티기도 했다. 망한 영화를 다루는 그의 영상들은 다른 기타 영화들의 장면들을 어디서 보았는지 시의적절하게 갖고 오는 데다가 그 장면이 내가 아는 장면일 때면 반가운 마음마저 든다. 영화적 지식이 깊은 그는 이론을 앞세워 이 영화가 이렇게 쓰레기야라고 말한다기보다는, '잘 만들어진 영화는 이러한 특징이 있어. 근데 넌 왜 이따위지?' 라는 식의 화법을 쓴다. 물론, 난 그의 화법이 좋다.


그런 그의 책 역시 그의 화법이 그대로 들어있다. 물론 그가 직접 대본을 써서 제작한 영상을 먼저 좋아했기에 글을 읽으면 그의 목소리가 저절로 떠올랐고, 장시간 지치지 않는 긴 장편 영상을 본 기분마저 들었다. 그의 에세이는 그가 영화를 좋아하게 된 계기와 기타 그의 생각들을 영화에 빗대어 쓴 글이었고 단순한 영화의 소개라기보다는 그의 인생관이 오롯이 녹아있었다. 직업적으로 보았을 때 책을 보면 현기증을 느끼는 독서 거부자들도 그의 책을 시작으로 책에 흥미를 느낄 만큼 글자체가 맛있고 재밌다. 더군다나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염세적인 그의 글은 자세히 읽어보면 그 안에 그만의 따뜻함이 들어있다. 세상을 삐딱하게 보는 남자로 소개되며 아침마다 라디오방송에 출연하고 있는 그는 사연자에게 조언을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아마도 내가 그의 팬은 이유는 바로 그 지점이 아니었을까. 우리는 사실 성공한 이들과는 거리가 멀고, 하루를 그저 살아내면 다행인 하루살이 인생들이 대부분이다. 지난 6년간 계약직 신세를 면치 못했던 나는 늘 1년짜리 인생을 사는 기분이 들었고 그 기분은 한국을 떠나서 외국을 갔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한국으로 돌아와 준공무원이라는 타이틀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공기관의 계급사회에서 나는 분명 보이지 않는 노비출신이나 다를 바 없음을 종종 느꼈다. 진골과 선골에서조차 끼지 못하는, 조선으로 치면 중인과 천민 사이 그 어디쯤.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애써 성악설을 믿으며 이 세상의 부조리에 대해 귀를 쫑긋 세우지만 감동적인 이야기에 눈시울을 붉히며 세상의 온기에 희망을 갖는다. 성공한 이들이 '나는 이래서 성공했어요'라는 글에 혹하여 마음이 동요하다가도, 실패한 이들이 '너만 실패한 거 아냐. 나도 이렇게 되고 말았네.'라는 처연한 공감에 위로가 된다. 마치 날선 비판을 하는 것처럼 말을 시작하다가도 종국에는 '그래, 뭐. 어쩔 수 없어. 괜찮아.'를 말하고 있는 듯한 그의 글처럼. 티 없이 해맑게 '앞으로 좋은 일만 생길 거야.'를 말하는 애니메이션의 주인공보다, 둘리의 고길동에게 더욱 마음을 뺏기고 마는 우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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