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사서 유 Mar 11. 2021

<인생 참 재밌는데 또 살고 싶지 않음> 웃픈 내 인생

고연주작가의 에세이를 읽고

몇 해 전 드라마작가과정 공부를 하겠다며 호기롭게 '한국방송작가협회교육원'에 면접을 본 적이 있었다. 당시 내 면접관은 노희경작가였고, 그 선생님에게서는 일반인이 범접하기 힘든 어떤 아우라가 있었다. 면접장 뒤로 커다란 창이 있어서인지, 실제로 그분에게 후광이 나와서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무튼 그분 앞에서 독대로 면접을 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그분께 내가 썼던 단편소설에 대해 말했고, 줄거리를 말해보라며 이야기를 하신 덕에 내 소설에 대해 말씀드릴 수 있었다. 명지대 문창과 학생이 될 거라는 꿈을 안겨주었던 그 소설은 내가 쓴 첫 번째 비자전적 소설이자, 이타적인 소설이었다. 비록 명지대 문창과로 향하는 백일장에선 낙방하였지만 아무튼 간에 그 소설로 나는 한국방송작가협회교육원에 합격할 수 있었고, 나는 거기서 두 분의 선생님을 만나 극본이란 것을 배워볼 수 있었다.


몇 주 전 교육원 기초반에서 함께 습작을 했던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친구와 나는 당시 빠른이라는 이상한 제도를 공감할 수 있는 빠른년생이었고, 우리는 서로 동갑내기라는 공통점과 거리상 그 누구보다 집을 먼저 가야 한다는 점에 꽤 빨리 친해졌다. 부산에 사는 친구와 나는 교육원 기초반을 수료한 이후로 함께 만나진 못했지만, 종종 안부를 주고받으며 연을 유지하고 있었고 최근에 그 친구에게서 자신이 쓴 대본을 봐달라며 카톡이 온 것이다. 누군가의 대본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할 능력은 안되지만, 나는 최소한의 도움이라도 되고자 그 친구의 대본을 내 나름대로 집중해서 읽어보았고 최대한 무례하지 않는 선에서 내 감상을 긴 카톡으로 남겼다. 최근에서야 다 읽을 수 있었던 고연주작가의 에세이집 <인생 참 재밌는데 또 살고 싶진 않음>은 그 친구와 나를 떠올리게 했다.


에세이를 좋아해서 에세이만 읽다 보면, 어느새 에세이가 다 거기서 거기인 것 같은 현상에 도착한다. 그중에서 유독 기억에 남는 에세이가 되려면 그 사람의 인생이 유달리 특별하다거나, 또는 유달리 특별하지 않아서 매 문장 문장마다 공감이 된다거나. 혹은 최근 리뷰한 <거의없다의 방구석 영화관>처럼 작가의 특징이 뚜렷하거나 등등 제각기 장점을 가져야 한다. 게다가 에세이는 그 화자가 너무 잘나면 너무 잘난 대로 딴 세상 사람 같아 자기계발서로 취급되기 마련이고, 에세이가 한없이 우울하면 나까지 없던 우울증이 생긴다. 그러니까 내게 좋은 에세이란 적당히 공감하되, 쉽게 다른 글들과 머릿속에서 섞이지 않도록 특별한 구석이 있어야하며 나와는 너무 동떨어진 인생 같지 않아야 한다. 그러한 점에서 고연주작가가 쓴 글들의 정서는 웃프다. 해학과 농담으로 글들을 재밌게 꾸며쓰려 애쓰지 않는다. 부산에 사는 또 다른 친구 D는 자신의 인생이 힘들 때마다 개그로 승화하는 버릇이 있는데,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참 닮았다. 나는 그 친구에게 우리는 살려고 개그를 하나봐라며 말했고 그 친구는 '그냥 더 슬퍼지면 힘드니까 웃음으로 승화하는 슬픈 광대랄까'라고 말했다. (놀랍게도 실제로 우리가 주고받은 대화를 옮겨 적은 것이다.) 고연주작가의 책을 읽는 내내 그 친구의 그 말이 떠올랐다. 나는 웃음으로 승화하는 공통점을 가진 슬픈 광대를 친구로 둔 것으로도 모자라 그런 책들을 또 골라 읽고만 것이다. 아무튼 나는 그녀의 글과 D의 농담이 좋다.


소설을 꾸준히 쓰지 못하는 자신을 웃프게 탓하면서도 그걸 또 글로 써서 책을 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나처럼 '언젠가 내 책을 내고 말 거야'라는 말만 꾸준히 하면서 그 꿈 하나로 10년 넘게 글을 올리는 사람도 있다. 그녀의 글들을 읽다 보면 글쓰는 사람들이 으레 갖고 있는 소명의식(아니다 싶은 사회적 문제들을 글로 적어야만 할 것 같은 것)이라든지 습관처럼 갖고 있는 꿈에 대해 퍽 공감이 간다. 그녀의 글이 글쓰는 사람으로서의 어떤 공감을 불러일으킨 것은 둘째 문제이고 사실 그녀의 글은 재밌다. D의 말처럼 슬퍼지면 더 힘드니까 웃음으로 승화하는 슬픈 광대로서의 어떠한 동질감이랄까. 나는 티 없이 맑은 사람보다도, 한줌 티는 있을지언정 그것을 어쩌겠어하며 헛웃음을 지어 보이는 사람들에게 더욱 애정이 간다. 겉으로는 내 인생 참 재밌다며 다른 사람의 것인 양 웃음 소재로 팔지언정 스스로를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들일 것만 같아서.

매거진의 이전글 <거의없다의 방구석 영화관> 염세적인 나에게 그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