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그림자가 머무는 어느 고서점의 이야기
“너 뭐야 이 새끼야. 납치범이야? 스토커야? 우리 애 지금 어딨어, 말해. 이 새끼야!”
“이과장님! 잠시만요 좀 진정하시고.”
결국 강우의 일행까지 나서 그를 진정시키기 위해 달려들었다. 유현은 미동도 없이 그런 강우의 모습을 낱낱이 지켜보고 있었다. 조금만 더 있다가는 주먹다짐까지 할 것 같았다. 결국 서희는 다급히 부연 설명을 붙였다.
“선생님, 잠시만요. 이것 좀 내려놓으시고.”
“댁은 또 누구요, 너도 얘랑 한패야?”
“저희 가게 사장님이에요. 그것보다 가방을 좀 자세히 살펴보시겠어요, 연우 아버님?”
강우는 유현보다 서희가 더 말이 잘 통한다고 생각했는지 대화의 대상을 바꿨다. 다행히도 조금 전의 살벌한 분위기는 다소 누그러졌다. 서희는 이 틈을 놓치지 않고 가장 중요한 본론을 꺼냈다.
“아까 비가 많이 내릴 때 따님이 비에 다 젖어서 저희 가게에서 쉬어갔어요. 중간에 갑자기 급한 연락을 받았는지 가방도 챙기지 못하고 나가더라고요. 저희는 가방을 돌려주려고 따님을 찾고 있었고요.”
서희는 흥분한 강우를 진정시키려고 일부러 마지막에 힘을 주어 말했다. 덕분인지 강우는 선선히 서희가 말하는 대로 가방을 열어 살폈다. 무심한 손길로 가방을 살피던 남자의 얼굴은 곧 새파랗게 질렸다. 그는 안간힘을 내 평정심을 유지하려는 듯 보였다.
“애 가방이 왜 이 지경인 겁니까?”
“저도 자세한 내막은 모르지만… 따님이 괴롭힘을 당하는 것 같아요.”
“지금 뭐라고…?”
서희는 강우의 타는 듯한 눈길을 마주하기 힘들어 애써 피했다. 딸의 가방을 든 강우의 손이 파르르 떨려왔다. 두려움과 분노, 초조함이 뒤섞인 그에게서 조금 전까지 피곤함에 찌든 회사원의 면모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제 자식의 위험을 감지한 아비의 방어본능만이 야생의 동물처럼 번뜩일 뿐이었다.
“자세한 사정은 나중에 확인하더라도 일단 당장은 한시라도 빨리 연우 양을 찾아야 합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유현의 턱을 당장이라도 한 대 칠 것만 같았던 모습은 온 데 간 데 없었다. 강우는 떨리는 손으로 딸의 가방을 움켜쥐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일행들도 심상치 않다는 걸 눈치채고 강우를 서둘러 배웅했다.
“이과장님, 일단 얼른 가보세요.”
강우는 동료들과 인사를 나눌 겨를도 없이 곧바로 학원이 밀접한 거리로 뛰어들었다. 조금 전 가방 안에는 너덜너덜한 모습이었지만 지갑도 고스란히 들어있었다. 핸드폰을 들고 가긴 했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으니, 그리 멀리 가진 않았을 것이다.
“연우야, 어딨니! 이연우, 대답해!”
강우는 중년 남성이라곤 믿기지 않을 속도로 골목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며 미친 듯이 연우의 이름을 불렀다. 강우는 우산도 쓰지 않은 채 비가 내리는 골목들을 샅샅이 뒤져나갔다. 유현과 서희도 주변을 함께 찾았지만, 강우의 속도에 비할 순 없었다.
그는 주변 사람들과 부딪히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딸의 이름을 외치며 미친 사람처럼 연우를 찾았다. 다짜고짜 부딪힌 사람들이 화를 내려다가도, 절박한 강우의 얼굴과 외침을 마주하곤 잠자코 제 갈 길을 가거나 길을 터주었다.
“연우야, 연우야! 제발 대답 좀 해봐, 어딨어!”
악을 쓰며 달려가던 그가 어느 학원가의 골목을 스쳐 지나갈 때였다. 정신없이 달려가던 그가 갑자기 우뚝 멈춰 섰다.
“왜 그러세요? 연우 찾았어요?”
서희도 달려와 보았지만 한 무리의 학생들이 있을 뿐 연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강우는 후미진 골목 안으로 망설임 없이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아, 또 뭐야? 아저씨. 여긴 우리끼리 노는 데거든요? 그냥 가던 길이나 가세요.”
“내가 그냥 갈지 말지, 그걸 왜 네가 판단해.”
남학생 하나가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던지며 강우를 노려보았다. 다른 아이들도 강우 일행을 향해 적대적인 눈길을 던지며 위화감을 조성했다. 하지만 강우는 망설임 없이 그들 무리 사이로 성큼 뛰어들었다.
“아, 그냥 좀 가라고요. 씨발, 존나 귀찮게 하네.”
“연우야, 이연우, 거기 있니? 아빠 왔어!”
“그냥 좀 꺼지라니까, 귀가 먹었나?”
남학생 하나가 강우의 어깨를 거칠게 붙잡았다. 하지만 강우는 그 손길을 뿌리치며 학생들이 몰려 있는 골목을 헤집고 들어섰다. 이미 어른 남자만큼 자란 건장한 남학생이 여럿 달려들었으나, 강우를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이 아저씨가 미쳤나!”
“비켜, 이 새끼야. 연우야, 아빠야. 대답해!”
“야, 보고만 있지 말고 빨리 와서 막아!
우르르 몰려든 아이들이 필사적으로 강우의 어깨와 팔을 붙잡았지만 날뛰는 그를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저를 막아선 것들을 모조리 뿌리친 강우는 골목 깊숙한 곳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마침내 그가 애타게 찾던 것을 찾아냈다.
“딸, 아빠가 부르면 대답을 해야지.”
제 어깨에 둘러멘 가방의 주인이자 그의 하나뿐인 딸, 이연우.
“…아…빠.”
“괜찮아? 다친 곳은 없어?”
“없어! 난 괜찮으니까 아빤 얼른 가!”
“네가 여기 있는데 아빠가 가긴 어딜 가.”
골목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자신을 바라보는 연우를 본 강우는 발밑이 무너져 내리는 기분을 느꼈다. 방금 자신을 막아섰던 애새끼들을 모두 갈가리 찢어 죽이고 싶었다. 하지만 그 전에 먼저 비에 젖어 볼품없는 몰골로 추위에 떨고 있는 연우를 품에 안았다.
“아빠가 너무 늦게 왔지? 미안해. 아빠가 잘못했어.”
“몰라, 여긴 또 어떻게 알고 왔어!”
“어떻게 알고 오긴. 부모는 원래 제 새끼 울음소리는 천 리 밖에서도 들어.”
강우의 무뚝뚝한 대답에 연우는 서럽게 울음을 터뜨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강우의 눈 속엔 불이 일었다. 그는 새끼를 품고 천적을 마주한 짐승처럼 주변을 노려보았다. 그의 살기 어린 눈빛을 마주한 아이들은 순간 움찔거렸지만, 그 나이 때의 객기를 믿고 버티려 애를 썼다.
“그렇게 보면 뭐, 어쩔 건데 아저씨.”
“당장 나랑 내 딸 눈앞에서 꺼져.”
“뭐래, 씨발. 아저씨가 여기 전세 냈어요? 갑자기 와서 왜 지랄인데?”
다시 분위기가 험악해지려던 그때, 강우를 따라 달려온 서희와 유현도 곧 골목에 합류했다. 서희는 곧바로 스피커폰이 켜진 핸드폰을 들이밀며 크게 소리쳤다.
“경찰서죠? 네, 지금 길에서 어떤 학생들이 행인을 폭행하려고 해서요. 신고하려고요!“
“이 미친x은 또 뭐야?”
거친 욕설을 던지며 흥분한 몇몇 아이들이 서희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곧 그녀에게 닿기도 전에 비에 젖은 더러운 골목길 바닥에 볼품없이 나뒹굴었다. 유현은 길게 뻗은 다리를 천천히 거두어 들었다. 마치 일부러 다리를 걸었다는 사실을 똑똑히 보여주고 싶어 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썅!”
목덜미가 시뻘게진 덩치 있는 녀석들이 유현을 붙잡기 위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유현은 적당히 몸을 틀며 요령 좋게 아이들의 손길을 피했다. 아슬아슬하게 피한 덕분에 대다수 녀석이 균형을 잃고 길바닥에 나자빠지기를 반복했다.
단순히 몸놀림이 좋다고 하기에는 기묘했다. 아이들은 유현의 털끝 하나 건드리지도 못하고 저희끼리 날린 헛발질과 헛주먹질로 점점 더 엉망인 몰골로 변해갔다. 이쯤 되면 멈출 법도 한데 놈들은 우스꽝스러운 몸놀림을 멈추지 않았다.
처음엔 이성을 잃고 달려들던 녀석들도 뭔가 잘못되었음을 서서히 감지하기 시작했다. 세상에 겁낼 것 없던 오만한 얼굴들은 땀인지 빗물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이 줄줄이 흐르며 축축이 젖어 들어갔다.
가벼운 몸놀림으로 아이들을 가지고 노는 유현의 입술엔 비틀린 미소가 걸려있었다. 세상 나쁜 성질머리를 지닌 듯한 그 얼굴을 보며 서희는 순간 평소 제가 알던 유현이 맞는지 두 눈을 의심했다. 결국 아이들의 입에서는 곡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잘못했어요. 살려주세요. 제발.”
“당장 꺼져.”
유현이 나지막한 소리로 욕지거리를 내뱉은 순간, 놈들은 긴장이 풀린 듯 빗물로 얼룩진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제대로 일어날 생각도 못 한 채로 네발로 기듯 온 힘을 다해 골목 밖으로 달아났다. 한바탕 소란이 끝난 뒤에 조용해진 골목으로 연우의 울음소리가 조용히 울려 퍼졌다.
놈들이 떠난 후에도 강우는 한동안 딸의 어깨를 껴안고 있었다. 연우는 강우의 품속에서도 몸을 잔뜩 웅크리고 떨고 있었다. 비단 비에 젖어 떨어진 체온 때문만은 아니었다. 강우는 애를 써보았지만 결국 삼키지 못한 울음이 짓이겨져 잇새로 새어 나왔다.
“아빠, 미안…. 이런 거 보여주기 싫었는데, 진짜 싫었는데…!”
“아냐, 넌 아무 잘못도 없어. 무조건 다 아빠 잘못이니까. 제발 울지마….”
유현과 서희는 부녀의 곁에서 서서 우산을 받쳐 들었다.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거칠게 쏟아지는 거센 여름비로부터 지친 두 부녀를 막아 주었다. 고통 젖은 울음소리가 잦아들 때까지 한참 동안 그들은 말없이 서로의 곁을 지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