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그림자가 머무는 어느 고서점의 이야기
딸랑-.
유독 선명하게 울리는 종소리와 함께 중년의 남자가 가게 문을 열고 들어선다. 어둑한 저녁, 오렌지빛 전등불 아래 조용히 가게를 지키고 있던 유현이 반가운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어서 오세요.”
“초행길이라 좀 헤맸습니다. 잘 지내셨죠?”
“저야 뭐 정신없이 지냈습니다.”
강우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콧잔등을 긁었다. 바빴다는 그의 말은 으레껏 하는 인사말이 아닌 사실이었다. 그날 밤 이후, 강우는 딸을 괴롭혔던 가해자들을 신고하고, 아이의 전학을 진행하느라 정신없는 하루하루를 보냈다. 겨우 신변을 정리한 끝에야 유현과 했던 약속이 떠오른 것이다.
"괜찮으실 때 제 가게에 한 번 들려주시죠. 여기 제 연락처입니다."
며칠 전 겨우 연락하자, 유현은 오늘 저녁 서점에 들러달라고 말했다. 조금 이상한 청이었지만 은인의 부탁이니 크게 대수로운 것도 없었다. 강우는 밀린 회사 일을 급히 처리한 후 곧바로 이곳 서점으로 달려왔다.
“그날 이후 감사하다는 말도 제대로 드리지 못했습니다. 이 신세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이미 충분히 값을 치르셨으니, 신세 갚지 않으셔도 됩니다.”
“네, 그게 무슨?”
“괜찮으시다면 차를 한 잔 대접해 드리고 싶습니다.”
“아, 예!”
깜짝 놀라 찻잔을 쥐면서도 면목이 없다는 듯 머리를 벅벅 긁으며 계면쩍어하는 강우를 바라보며 유현이 살짝 미소 지었다. 그는 미리 준비해 두었던 차를 강우에게 내려 주었다. 차보다는 커피가 익숙한 강우였지만 은인이 내어주는 것이니 군말 없이 받아들였다. 그리고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깜짝 놀랐다.
“차가 이런 맛이 날 수도 있다니, 신기하군요.”
“입맛에 맞으시다니 다행입니다.”
강우의 인생에서 차라고는 보리차나 탕비실의 녹차 티백이 전부였다. 하지만 방금 유현이 내준 것은 차에 무지한 그가 느끼기에도 탁월한 맛이었다. 차를 마신 뒤에도 입안을 맴도는 상쾌한 풀향기에 오장육부가 깨끗이 씻겨나가는 기분이었다. 머릿속의 안개가 확 걷히는 듯, 오감이 일시에 깨어나는 감각은 난생처음 느끼는 것이었다. 보통 차가 아니라는 생각으로 신기한 차를 내어준 유현을 바라본 강우는 첫 만남 이후 오늘까지도 그동안 간간이 생각했던 이야기를 조심스레 꺼냈다.
“그런데 우리 어디서 본 적 있지 않습니까. 저번 말고 훨씬 전에요.”
“그렇게 느끼셨습니까.”
유현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얼굴을 찬찬히 훑어보던 강우는 점점 더 확신에 찼다. 어째서 처음 보았을 때 알아보지 못한 것인지 이상할 정도였다. 저 시원한 눈매의 깊고 진한 검은 눈동자가 특히 눈에 익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를 알고 있다는 것만큼은 확신할 수 있지만 언제, 어디에서 보았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강우는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무엇 때문인지 몰라도 유현은 그런 강우의 모습을 차를 우리던 손길도 멈춘 채 멍하니 바라보았다. 갑자기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유현의 시선에 강우도 조금씩 위화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정신 차려, 유현! 이 접싯물에 코를 박아 죽을 녀석아!”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놀란 강우가 고개를 돌리자, 한복을 입은 남자아이가 잔뜩 성이 난 얼굴로 저를 노려보고 있었다. 강우는 순간 자신이 서점이 아닌 무당집에 온 건 아닌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웬 동자가….”
“동자 아니고, 동주!”
동주는 얼떨결에 속마음을 입 밖에 꺼낸 강우를 향해 야무지게 호통을 쳤다. 강우는 이 야심한 시간, 고서를 취급하는 헌책방에 어린아이가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런 그와 달리 유현은 아이의 소란스러운 등장에도 놀란 기색 하나 없었다.
“뭘 걱정하시는지 알겠지만 괜찮습니다. 방해하지 마시고, 저기서 얌전히 기다리세요.”
유현은 익숙한 손길로 코코아를 듬뿍 넣은 초코우유를 아이에게 건넸다. 평상시보다 진한 초코우유를 받아 든 동주는 입을 비쭉거리며 자주 앉는 의자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면서도 불이라도 뿜을 듯한 기세로 두 사람을 노려보고 있었다.
유현은 익숙한 듯 작게 한숨을 쉬며 검은 책들이 꽂혀있는 서가 앞에 섰다.
여러 책 중 유현은 한 권의 책을 단숨에 뽑아 들었다. 강우의 머리에서 뻗어 나온 금빛 실이 연결된 책이었다. 오로지 그의 눈에만 보이는 인연의 실로 연결된 책은 오로지 강우만을 위해 그의 기억으로 쓰인 책이었다. 유현이 책을 펼치자 겉표지뿐만 아니라 속지도 먹으로 검게 물들인 책에는 금빛 글씨들이 빼곡히 쓰여 있었다.
“이 책은 뭔가요?”
“그리운 누군가를 추억하며 제가 써 내려간 책입니다.”
“유현 씨가 직접 쓰신 책이라고요?”
한문을 휘갈겨 쓴 책의 내용을 대부분 알지 못했지만, 강우는 저도 모르게 홀린 듯 밝게 빛나는 금빛 글씨를 감상했다. 절로 감탄이 나왔다. 하지만 그 정도로 감탄하기엔 아직 일렀다. 유현이 조심스럽게 책장을 쓸어내리자, 달필로 쓰인 금빛 글씨들이 너울거리며 두 사람을 휘감았다. 어두운 서점을 헤엄치듯 유영하는 글자들은 하나, 둘 강우의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허억!”
자신을 둘러싼 금빛 글자들을 보며 강우는 놀란 숨을 삼켰다. 분명, 그를 처음 만난 순간부터 유현이 평범한 사람은 아닐 거라 짐작했었다. 하지만 꿈인지 생신지도 모를 비현실적인 광경을 마주하자, 담이 제법 강한 강우도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뭐, 크게 해코지하지는 않겠지.’
무엇보다 강우는 유현이 불러낸 이 글자들이 자신에게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묘한 확신이 있었다.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어봤다. 금빛 글자가 휙휙 손 주변을 맴돌더니 곧 천천히 그에게 스며들었다.
한 글자, 두 글자, 점점 더 많은 글자가 강우의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그리고 곧이어 책 속에서 흘러나온 금빛 글자들이 빠르게 강우의 몸으로 빨려 들어갔다. 글자들이 만들어낸 금빛 홍수 속에서 정신을 차리지 못했던 그는 두려움과 혼란을 느끼는 와중에도 한 가지 깨달음을 얻었다.
이 책은, 이 금빛 글자들은 모두 본래 강우의 것이었다.
이 모든 것은 지난 생의 그가 전생에서 그의 벗, 유현과 나누었던 기억의 파편들이었다. 강우가 살아 지냈던 짧았던 지난 생의 기억들이 무너진 댐을 타고 넘어오는 물살처럼 빠르게 그의 머릿속에 휘몰아쳐 흘러들어왔다.
책에 담겨있던 지난 인연의 서사는 고스란히 강우에게 되돌아갔다. 이전 생의 기억과 현생이 뒤섞였지만, 자신을 잃어버릴 정도로 혼란스럽지 않았다. 벗이 기억을 되찾았을 때, 힘겨워하지 않도록 오랫동안 제 벗이 갈무리해 왔던 기억이 차곡차곡 제자리를 찾아갔던 것이다.
긴말을 나누지 않아도 몇백 년의 시간을 거슬러 다시 만난 두 벗은 서로의 마음을 헤아렸다. 매일 같이 얼굴을 맞대고 함께 하던 동무의 속을 어찌 몰라볼 수 있단 말인가. 강우는 드디어 제 눈앞에 선 이가 누군지, 왜 연우를, 그리고 자신을 구원하였는지 품고 있던 의문의 모든 실마리를 찾았다.
“아…, 그런 것이었구나. 이제야 알겠다, 유현.”
“참으로 오랜만이지. 강우 씨라고 불러야 할까. 아니면 예전의 이름으로 불러줘야 할까.”
옛 기억을 되찾은 강우에게 유현이 자연스레 말을 놓았다. 강우는 500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 조금도 바뀌지 않은 제 친우의 얼굴을 바라보며 신기해했다.
“난 이렇게 아저씨가 되었는데, 자넨 어찌 변한 게 하나도 없나.”
“자네도 그리 많이 변한 것 같지 않은데….”
“나도 눈이 있고 양심이 있다네, 이 사람아.”
너스레를 떠는 강우를 보며 유현도 함께 웃었다. 500년 전, 지기들의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었다. 강우는 유현의 손을 잡았다.
”내 딸을 구해주어 고맙네. 자넨 내 생명보다 더 소중한 걸 구해주었네.“
“내가 자네에게 신세 진 걸 생각한다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지. 자네가 내 어머니를 극진히 보살펴 드렸다는 걸 알고 있네.”
“벗이라면 당연한 것을….”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도 삼년상을 대신 치르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
“…자네도 나와 같은 처지였다면 분명 그리했을 것이네.”
스승이 역모의 죄를 뒤집어쓰고 유현의 집안이 풍비박산났을 때, 이 귀한 벗은 그의 어머니를 안전한 곳으로 모셨다. 역적의 누명을 쓰고 생사조차 제대로 알릴 수 없는 자신을 대신해 어머니의 여생을 책임지고 돌보아드렸다. 뿐만 아니라, 어머니의 죽음 이후에도 자신을 대신하여 삼년상을 치러 자식의 도리를 다하였다.
“이 은혜는 내가 죽다 다시 살아난다고 하여도 잊을 수 없을 것이네.”
“그래서 이번엔 자네가 내 가족을 지켜준 것인가.”
“귀여운 아이더군. 더 늦지 않아 다행이야.”
“연우가 내 딸이라는 건 어떻게 안 것인가.”
“나처럼 오래 살다 보면 그쯤은 꿰뚫어볼 수 있는 재주 하나를 갖게 된다네.”
유현은 처음 연우를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강우의 기억이 담긴 책이 그의 딸인 연우에게 반응하는 것을 보고 무척 놀랐었다. 순간 연우가 제 벗인 기준의 환생이 아닐까 싶었지만, 곧 아이가 그의 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강우의 책이 기억의 주인인 강우와 연결된 물건인 연우의 토끼 인형에 더 강하게 반응했으므로.
애틋한 두 부녀를 연결하는 인연의 끈은 토끼 인형을 매개로 단단히 얽혀있었다. 그 인연의 실을 훑어낸 덕분에 강우도, 연우도 모두 구해낼 수 있었다.
“그래서 자네 아이는 이제 괜찮은 것인가.”
”꽤 마음의 상처를 많이 입었다네. 괴롭힘을 당하던 친구를 도와주다 오히려 괴롭힘을 당하게 되었더라고.“
강우가 엄지로 저를 가리켰다.
“내가 이래 보여도 기자야. 학폭이니 왕따니 이런 것들을 그동안 숱하게 다뤘는데 설마 내 딸이 당할 줄이야.”
강우는 쓰게 웃었다. 불의를 참지 못하는 자신의 성격을 고스란히 닮은 딸. 그 때문에 이런 위험에 처하게 된 줄은 상상도 못 하였다. 자신의 딸은 친구 때문에 상처를 입었지만, 자신은 친구 덕분에 구원받았다.
“상처가 커. 그 나이 때 아이에게 친구는 세상 전부니까 말일세.”
유현은 눈앞에 앉은 자신의 친구를 복잡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 역시도 어린 시절의 우정만큼은 5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었으니까. 유현은 울적해하는 친우의 빈 찻잔을 다시 채워주었다.
“좋은 아이이니, 분명 좋은 벗을 다시 만날 수 있을 게야.”
“자네처럼 말이지?”
“그래, 우리처럼 말이지.”
강우는 찻잔을 훌쩍 비워내고 시원스레 웃었다. 그 미소가 전생의 모습과 똑 닮아있었다. 유현은 다시 올 수 없는 시절에 대한 그리움과 반가움에 가슴이 시큰거렸다. 오랜 벗의 얼굴에서 숨길 수 없는 서글픔을 읽어낸 강우는 조심스레 물었다.
“앞으로 다시 볼 수 있는 것인가.”
“물론이지. 이곳에 오면 나를 만날 수 있을 것일세.”
“오랜 친우로서 말인가?”
웃음기를 지우진 않았지만, 강우의 눈빛은 날카로웠다. 유현은 예전도 지금도 남다른 감을 지닌 벗은 역시 속일 수가 없었다. 조용히 홀로 감내하려 했건만 강우는 조금의 거짓도 용납하지 않았다.
“내가 이곳에서 자네를 오랫동안 기다린 것은 모두 오늘을 위해서였네. 전생에 닿았던 우리 인연의 빚을 정리하기 위해서였지. 그러니 여기까지네. 이제 저 문을 나서면 전생의 기억은 모두 사라질 것이야.”
“매정하구먼, 꼭 그리해야만 하나.”
강우의 목소리가 잠겨있었다. 500년을 넘어 이어진, 한때 제 목숨처럼 귀하게 여기던 인연을 다시 잃고 싶지 않았다. 딸아이가 친구를 잃고 고통스러워했던 마음이 이런 것이었는지, 새삼 깨닫게 되었다. 간절한 마음을 담아 유현을 바라보았지만, 유현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전생의 기억이 계속 남아있다면, 언젠간 필시 자네의 발목을 잡을 것일세. 그러다 결국 나처럼 길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네.”
“하지만…”
“자네에게 지금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잘 생각해 보게.”
유현은 자신의 오랜 친구를 위해 마음을 다해 조언했다. 강우와 지난 추억을 나누며 그리움을 달래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였지만, 그의 가장 소중한 것들을 지켜주고 싶었다. 강우가 전생에 그러했듯, 자신 역시 그리할 것이다. 이번 생의 그들의 만남은 오롯이 그것을 위한 것이었다.
유현과 강우, 두 사람은 말없이 천천히 남은 차를 마셨다. 그리고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서는 강우의 뒷모습을 유현은 끝까지 지켜보았다. 뒤돌아본 친구를 향해 환한 미소로 배웅하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작별 인사였다.
겹겹이 얽혀있던 두 사람의 인연의 끈은 강우가 서점 문을 닫고 나감과 동시에 툭 끊어져 허공으로 흩어졌다. 유현은 강우가 떠난 후에도 하염없이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더 쥐고 있으면 결국 미련으로 남아 악연이 될 것임을 잘 알지 않느냐.”
동주의 단호한 목소리 덕분에 유현은 다시 이성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렇죠. 이미 진즉 흘러갔어야 할 인연이었죠.”
테이블 위에는 텅 빈 책 한 권만이 덩그러니 남겨졌다. 모조리 비워낸 전생의 인연이 존재했다는 것을 알리는 유일한 흔적이었다. 유현은 우는지, 웃는지 모를 표정을 지으며 책을 소중하게 갈무리한 뒤 서가에 꽂았다.
딸랑-.
저녁 어스름한 시간, 가게 문에 달린 종이 울리며 월영서림에 반가운 얼굴이 나타났다.
“어머, 이게 누구야? 어서 와!”
서희는 반가움에 손을 흔들며 단숨에 마중을 나갔다. 쭈뼛쭈뼛 어색한 걸음으로 가게에 들어서는 소녀와 아버지. 연우와 강우였다.
“…안녕하세요.”
“연우야, 잘 지냈어? 보고 싶었는데 이렇게 다시 찾아주어 고마워.”
서희는 연우의 손을 덥석 잡았다. 갑작스러운 스킨십에 놀라 움찔거렸던 연우가 곧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서희는 달라진 연우의 교복을 보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날, 정말 감사했습니다.”
우물쭈물하는 딸아이를 대신해 강우가 말문을 열었다. 강우가 유현과 서희에게 깊게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제 손에 들었던 쇼핑백을 불쑥 서희에게 내밀었다. 요즘 구하기 힘들다던 고급 제과점의 쇼핑백이었다.
“아니, 왜 이런 걸 가지고 오셨어요!”
“감사한 마음만 받겠습니다.”
서희와 유현의 단호하지만 부드러운 거절에도 강우는 요지부동이었다. 그는 결국 양손 무겁게 들고 온 쇼핑백을 유현과 서희, 동주의 손에까지 남김없이 들려주었다.
“작은 성의입니다. 딸아이가 꼭 드리고 싶어 해 가져온 것이니 부디 받아주시길 바랍니다.”
“뭐, 이리 사정 하니 어쩔 수 없지. 성의를 무시하는 것도 예의는 아니지 않느냐.”
잠깐의 실랑이가 벌어진 사이 동주는 제 손에 들린 쿠키 상자를 뜯어 순식간에 과자를 날름 삼켰다. 서희는 강우와 연우 부녀 앞이라 애써 화를 누르며 동주를 타일렀다.
“동주야, 그걸 바로 받아 먹어버리면 어떻게 해.”
“내가 받은 선물, 내가 먹겠다는데 왜 네가 웬 참견이냐. 맛만 좋구먼. 먹기 싫다면 다 나를 다오.”
동주는 서희의 눈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거침없이 과자봉지를 뜯어 순식간에 해치웠다. 서희와 동주의 투덕거림을 지켜보던 연우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강우의 눈이 크게 떠졌다. 지난 사건 이후로, 딸아이가 조금이라도 미소 짓는 걸 본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앞으로도 딸아이와 종종 이곳을 찾아와도 괜찮겠습니까?”
딸아이의 얼굴을 잠시 쳐다본 후 강우는 유현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연우는 깜짝 놀라 강우를 바라보았다. 강우는 그런 연우의 어깨를 작게 토닥여주었다.
“아이가 어릴 때부터 책을 많이 좋아해서 서점도 참 좋아합니다. 그래서인지 이곳 이야기도 자주 하더군요.”
“아빠!”
연우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강우를 향해 소리쳤다. 하지만 강우의 반응은 변함이 없었다. 그런 두 부녀의 모습을 보며 유현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물론입니다.”
“이렇게 예의 바른 손님들이라면 언제든지 환영이란다.”
동주도 과자를 우물거리며 씩 웃어 보였다.
“후배님, 밥 한번 꼭 사주고 싶었는데 너무 잘됐다.”
“저도요. 서희 언니…,라고 불러도 되나요?”
“물론이지, 연우야!”
서희는 연우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오랜만에 느껴진 간질거리는 따스한 온기에 연우는 겨우 긴장을 풀 수 있었다. 연우는 쑥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서희의 손을 꼭 마주 잡았다. 유현은 순간 발견했다. 두 사람의 사이에 빛나는 인연의 실이 이어져 매듭을 짓는 것을.
강우와 자신 사이에 겹겹이 쌓아 올렸던 인연의 매듭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가느다란 실 한 가닥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 새로운 인연을 맺기 위하여 저 작은 소녀가 얼마나 큰 용기를 냈는지를, 서희가 얼마나 많은 마음을 쏟았는지를 알고 있었다.
유현은 고개를 들어 묵묵히 아이 곁을 지키고 선 강우를 보았다. 그와 자신 사이에도 가느다란 빛의 선이 이어졌음을 확인한 유현이 조용히 미소 지었다. 새로운 인연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