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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칠월의 도서관 Oct 08. 2024

[연재소설] 월영서림 3편 (1)

달그림자가 머무는 어느 고서점의 이야기

제3편 노기복력 지재천리(老驥伏櫪 志在千里) : 늙은 말의 몸은 마구간에 있어도 그 뜻은 천리를 달린다



서희는 외출 전 옷매무새를 다듬은 후 콧노래를 불렀다. 핸드폰으로 자주 쓰는 영화관 앱을 열고 남아있는 시간을 다시 한번 꼼꼼히 확인하였다. 시작 시각도 넉넉히 남아있고, 영화를 다 관람한 후 느긋하게 출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게 얼마만의 조조영화야.”     


영화를 좋아하던 아버지는 주말마다 늦잠을 자던 서희를 깨워 함께 영화를 보러 갔었다. 저혈압으로 아침에 일어나기 힘들어하는 그녀를 기필코 끌고 나갔었기에 서희는 처음에 아버지의 고집스러움을 원망했다. 하지만 점차 멋모르고 따라갔던 아침의 영화관에서 본 영화들의 매력에 서희 역시 푹 빠져들었고 어느새 그녀는 아버지 못지않은 조조영화 애호가가 되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그녀가 아침의 영화관을 찾는 일은 좀처럼 없었다. 아니, 영화관 자체를 찾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는 것이 더 정확했다. 영화를 보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던 아버지의 빈자리를 스스로 느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다시 영화관을 찾을 결심을 하게 된 건, 며칠 전 서점에서의 동주와의 대화 덕분이었다. 작업을 위해 켠 노트북 화면을 훔쳐보던 동주가 포털 메인의 작은 기사 하나를 보고 크게 흥분했었다.     


“나 이 사람 알아! 신작이라도 나온 건가?”     


눈동자를 반짝반짝 빛내며 동주가 말한 감독은 서희와 그녀의 아버지가 제일 좋아하는 감독이었다. 노장이지만 섬세한 감정선과 아름다운 미감을 지닌 작품을 만들어내는 것으로 유명한 이였다.     


“아니, 회고전이라고 이분의 작품들을 함께 보며 추억하는 상영회가 열리는 거야. 올해가 데뷔한 지 50주년이라네?”

“뭐, 회고전? 영감탱이가 벌써 죽기라도 한 거야?“     


노년의 나이에도 왕성한 작품활동을 했던 감독은 작년에 갑작스럽게 건강이 악화하여 세상을 떠났다. 그 사실을 몰랐는지 실망한 동주의 입이 비죽 튀어나왔다. 그의 작품은 잘 알지만, 작년에 그가 죽었다는 사실까지는 몰랐던 것이다.     


“이분 작품 좋아하면, 이번에 같이 보러 갈래?“

“…됐어. 이미 나온 건 질리도록 봤으니 너나 실컷 봐라.”

“그래, 일단 그럼 나 먼저 보고 좋으면 얘기해 줄게.”     


뾰족한 말을 내뱉었지만, 동주의 얼굴엔 슬픔이 가득했다. 진심으로 좋아하는 감독이었는지 퍽 속상해 보였다.     


‘흠, 어린아이가 좋아할 만한 작품을 만든 감독은 아닌데….’     


밉살스럽지만 하루 종일 잔뜩 풀이 죽은 동주의 모습을 보니 안쓰러웠다.     

동주를 열심히 설득해 보았지만 결국 서희는 혼자 영화를 보러 가게 되었다. 언제나 그렇듯 이런 영화는 극장에 아주 반짝, 찰나처럼 걸려있기 때문에 바로 움직이지 않으면 타이밍을 놓치고 후회하기 일쑤다. 서희가 이번에 예매한 영화는 감독이 해외 영화제에서 상을 받기 직전에 만들었던 작품이었다.     


「아침 달」     

‘아침 달’이라는 작품은 거장이라고 불리는 감독의 필모그래피 중 가장 인지도가 없는 작품이기도 하였다. 이 작품으로 흥행에 대참패했기 때문에 한때는 이 작품을 끝으로 영화감독의 길을 포기할 생각까지 했다는 감독의 인터뷰를 읽은 기억이 있다.     


하지만 감독조차 인정하는 망한 작품인 이 영화는 아버지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기도 하였다.   

  

“흥행은 못 했지만, 이 감독이 지닌 날 것의 감성이 가장 선명하게 들어간 작품이란 말이지.”     


어린 날의 서희는 몇 번이고 아버지와 함께 극장을 찾아가 이 영화를 함께 보았다. 몇십 번은 족히 봤었지만 아버지는 늘 볼 때마다 마치 처음 영화를 본 사람처럼 화면에 빠져들어 넋을 잃으셨다. 서희는 영화를 보는 틈틈이 곁눈질로 눈에 담았던 아버지의 옆모습을 무척 사랑했다.     


한동안 영화를 볼 여유도, 아버지와의 기억을 돌아볼 여유도 없었지만, 이제는 상실의 아픔이 조금은 무뎌진 것인지. 불쑥 아버지와의 추억을 곱씹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느긋하게 영화관에 도착했을 때, 평일 아침 시간에 예술영화답게 로비까지 텅텅 빈 모습이 보였다. 그래서일까? 보이는 직원이라곤 매점을 지키고 서 있는 한 명뿐이었다. 제법 이름난 감독의 회고전이건만 서희는 왠지 자신이 홀대받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씁쓸함을 느꼈다.    

 

“시끄럽고 복잡한 것보단 낫지. 오히려 잘 됐다.”     


서희는 어두운 기분을 떨쳐내기 위해 입 밖으로 제 생각을 끄집어 내뱉었다. 여유롭게 커피 한 잔을 시켜두고 입장 시간을 기다리던 그녀는 곧 눈길을 묘하게 끄는 이를 발견했다. 한눈에 보아도 멋스러운 차림의 노신사가 한참을 키오스크 앞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은빛 머리칼과 잘 어울리는 짙은 회색 중절모와 잘 다린 셔츠와 조끼, 칼주름이 선 바지에 반질거리게 광을 낸 구두까지. 누가 보아도 한껏 멋을 부린 노신사였다. 명품은 아니었지만 잘 관리한 옷을 걸친 그는 풍채까지 좋아 로비에서도 단연 눈에 띄었다.     


하지만 멋지게 차려입은 그의 옷차림이 무색하게도 노인은 몇 차례나 키오스크 앞을 떠났다, 다시 다가서기를 반복했다. 축 늘어진 두 어깨와 목덜미까지 벌겋게 달아오른 모습을 보고 서희는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서희는 커피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노인에게 다가갔다.     


“아, 이게 왜… 또 나오네. 허, 참….”     


예상했던 것처럼 노인은 키오스크 조작이 서툴러 어쩔 줄을 몰라 하는 것처럼 보였다. 보아하니 서희가 보려던 영화와 같은 영화였다. 서희는 조금 고민하다가 어르신의 예매를 도와드리기 위해 다가갔다.     


“어르신 괜찮으시다면 제가 좀 도와드릴까요?”

“아, 아닙니다. 내가 할 수 있어요…”     


서희가 다가가 도움을 주려 하였지만, 노신사는 손사래를 치며 거절했다. 허둥지둥거리며 터치 화면을 건드리던 손이 바르르 떨리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노신사는 꿋꿋하게 다시 화면으로 손을 뻗었다. 그 모습을 본의 아니게 가까운 곳에서 지켜보게 된 서희는 난감함으로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결국 결제하기를 포기하고 키오스크 앞을 떠나는 어르신의 발걸음에는 힘이 하나도 없었다. 결국 그 뒷모습이 못내 마음에 걸렸던 서희는 예약했던 영화표를 취소하고 노신사를 따라나섰다. 서늘했던 영화관과 달리 밖은 그늘 하나 없는 땡볕이었다.     


이글거리는 햇볕과 뜨거운 공기로 숨이 턱 막혔다. 열사병에 걸리기 딱 좋은 날씨였다. 서희의 시선은 자연스레 앞서가는 노인의 뒷모습으로 향했다. 영화관을 나설 때부터 위태로워 보였던 그가 아니나 다를까 중심을 잃고 휘청거렸다.     


“어르신, 괜찮으세요?”     


급히 달려 나간 서희가 무너지는 노신사의 몸을 붙잡았다. 다행히도 그는 의식을 잃지 않았지만 똑바로 서있는 것조차 버거워 보였다. 정장 차림으로 더운 햇볕을 받고 있었던 것 때문인지 땀이 너무 많이 흘렀다. 서희는 비틀거리던 노신사를 부축하여 잠시 쉬어갈 곳을 찾았다.     


“일단 밖이 너무 더우니까 카페라도 들어가시는 게 어떠세요?”

“아가씨, 신세를 져서 미안합니다.”     


노신사는 최대한 자신의 힘으로 몸을 가누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는 결국 지친 표정으로 서희에게 몸을 의지하였다. 서희는 우선 주변에 보이는 가장 가까운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냉방이 되는 카페에 안에 들어선 어르신은 그제야 숨통이 트이는 듯, 한결 표정이 좋아졌다. 기력을 차리자마자 그는 꼿꼿하게 허리를 펴고 자세를 다잡았다.     


“고마운 아가씨에게 내가 차 한 잔이라도 사리다.”

“아니에요. 누구든지 당연히 할 일이었습니다. 어르신 너무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되어요.”

“이 늙은이가 마음이 쓰여서 그렇습니다. 잠시만 자리에 있어요.”     


서글서글한 미소를 지으며 노인은 차를 주문하기 위하여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매장을 둘러보던 그의 얼굴은 곧 급격히 어두워졌다. 서희는 어르신의 급격한 표정 변화에 의아함을 느꼈다.     


“어르신 무슨 일이세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노인의 목소리가 당황한 듯 살짝 떨렸다. 그의 불안한 시선을 따라 매장을 살핀 서희는 그가 당황한 이유를 바로 눈치챌 수 있었다. 그들이 들어온 매장은 키오스크로만 주문하는 매장이었던 것이었다. 서희는 조금 전 극장에서도 한참 동안 키오스크 기계 앞에서 어려움을 겪던 그의 모습을 떠올렸다.     


‘급하게 들어오느라 미쳐 못 봤네.’     


어르신의 어깨가 다시 눈에 띄게 축 처진 것이 보였다. 안쓰럽게 자신을 바라보던 서희의 눈빛을 읽었는지 노신사의 얼굴에 씁쓸한 웃음이 번졌다. 그는 가볍게 한숨을 쉬며 서희에게 사과했다.     


“맛있는 차 한 잔을 대접하려 했는데 늙은 머리라 제대로 아는 게 없어 그것도 쉽지 않아요.”     


서글퍼 보이기까지 하는 노인의 모습에 서희는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동안 기사 등을 통해서 키오스크나 무인 매장 이용을 어려워하는 어르신들이 많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이렇게 눈앞에서 자신감을 잃고 힘겨워하는 분을 보니 마음이 불편했다.     


마음 편히 영화 한 편, 차 한 잔도 즐길 수 없는 상황을 직면한 어르신의 표정에서는 왠지 모를 서글픔이 느껴졌다. 아마 세상으로부터 나 홀로 떨어져 나간 듯한 기분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나이도, 상황도 달랐지만, 서희는 그의 마음을 충분히 헤아릴 수 있었다.     


서희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 그냥 두고 가기엔 조금 전 노인의 상태가 심각했다. 아까처럼 한여름의 땡볕을 홀로 걷다가 자칫 큰일이 날 수도 있다. 그렇다고 계속 그의 곁에 머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어르신, 혹시 책 좋아하시나요? 제가 일하는 서점이 이 근처에 있는데 잠깐 쉬었다 가시는 건 어떠세요?”

“내가 가면 아가씨에게 방해가 되지 않겠소?”

“가게에 손님이 오시는 게 방해라면, 그런 가게는 망해야죠.”

“하하, 그렇다면 어서 가봅시다. 서점이라니…, 내 이래 봬도 왕년에 글 깨나 쓰던 문학도였습니다.”

“왠지 그러실 것 같았어요. 여기서 멀지 않으니 금방 가실 거예요.     


서희가 털털하게 웃으며 농을 던졌다. 어르신은 그제야 마음이 놓이는지 편안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는 곧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꼿꼿하게 허리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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