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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칠월의 도서관 Oct 09. 2024

[연재소설] 월영서림 3편 (2)

달그림자가 머무는 어느 고서점의 이야기

제3편 노기복력 지재천리(老驥伏櫪 志在千里) : 늙은 말의 몸은 마구간에 있어도 그 뜻은 천리를 달린다

딸랑-.     


종소리와 함께 서희가 노신사와 함께 들어서자 동주가 쪼르르 달려 나왔다.     


“웬일로 일찍 출근했다 싶더니, 이번엔 또 누굴 데려온 거야?“

“너는 일찍 출근해도 잔소리야. 직원이 가게에 손님 데려온 건데 왜 또 뭐가 불만이야.“     


가게로 들어서자마자 또 서희와 동주의 작은 말다툼이 일어났다. 유현은 이제는 거의 일상이 되어버린 두 사람의 말다툼을 말릴 생각조차 없어 보였다. 대신 그는 서희와 함께 가게를 찾은 손님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정남은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남자의 시선에 의아함을 느끼며 먼저 인사를 건넸다.      


“이 가게의 주인장 되십니까? 저는 김정남이라고 합니다.”

“아, 어르신. 인사가 늦었습니다. 저는 이 서점을 운영하는유현이라고 합니다.”

“내 이름은 동주야!”     


서희와 투덕거리는 와중에도 동주는 제 소개를 잊지 않았다. 동주는 나이가 지긋한 정남에게도 거리낌 없이 반말로 말을 걸었다. 서희는 동주의 위아래 없는 태도에 어르신이 언짢아하실까 급히 동주의 입을 틀어막았다. 하지만 정남은 허리를 낮추고 동주와 눈 맞춤하며 빙긋 미소 짓곤 손을 내밀었다.     


“동주야, 반갑구나.”     


지금껏 월영서림을 찾아와 처음 동주를 본 사람들은 아이의 대단한 버르장머리에 하나같이 당황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제 또래들은 학교에 있을 시간에 색동한복을 차려입고 수상쩍은(?) 책방에 들어앉아 있는 동주의 범상치 않음을 눈치채고 알아서 몸을 사렸다. 그러나 산전수전을 다 겪어온 정남에게 동주의 다소 기이한 모습과 언행은 그리 큰 흠은 아니었다. 오히려 거칠 것 없는 그 당돌함이 몹시 귀여워 절로 웃음이 나왔다.     


“날이 무척 덥습니다. 다들 시원한 물 한 잔 드시죠.”     


유현이 살가운 미소를 지으며 정남에게 차가운 보리차를 건넸다. 얼음을 가득 넣은 구수한 보리차를 한 모금 넘기니, 엉망이었던 더운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요즘은 어딜 가나 정수기뿐이라 이런 보리차를 마시는 것도 얼마나 오랜만인지 몰랐다. 정남은 다디달게 느껴지는 시원한 보리차를 거침없이 들이켰다.     


“고맙습니다. 덕분에 살았습니다.”

“별말씀을요. 편하게 천천히 둘러보셔도 좋습니다.”

“그럼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다시 기운을 차린 정남은 월영서림의 구석구석을 부지런히 살폈다. 왕년의 문학도였다는 그의 말은 허튼소리가 아니었는지 정남은 아이 같은 얼굴로 책방의 이곳저곳을 살폈다. 유현은 그의 그런 뒷모습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서가를 훑고 지나가던 정남은 서가에서 조금 빛이 바랜 책 한 권을 꺼내 들었다. 어느 고전 영화의 시나리오집이었다. 서희는 순간 그것이 그들이 오늘 보려고 극장을 찾았던 감독의 책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에게 정작 알은 채를 한 것은 서희가 아니었다.     


“영화 좀 깨나 보나 봐?”     


동주는 어느 사이에 정남 곁에 다가와 그가 펼쳐 든 책을 가리키며 배시시 웃었다. 정남은 깜짝 놀라 동주를 바라보았다.     


“네가 태어나기도 전에 나온 영화인데 알고 있다니 놀랍구나.“

“나는 재밌는 이야기라면 뭐든지 다 좋아해!“

“그래, 동주 너는 어떤 작품을 제일 좋아하지? 할아비는 이 감독님의 데뷔작인 ’아침 달’을 가장 좋아한단다.“ 

    

서희는 그들의 대화에서 ‘아침 달’이라는 작품이 언급되자 깜짝 놀랐다. 서희는 아버지와 같은 작품을 좋아하는 정남에게서 돌아가신 아버지가 떠올라 코끝이 살짝 시렸다. 그녀는 왜 오늘 아침 정남이 키오스크 앞에서 온갖 고생을 하면서도 영화를 보기 위해 애를 썼는지 이해가 되었다.     


정남과 동주는 감독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으로 한참 동안 영화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야기를 나눌수록 정남은 동주의 영화에 대한 지식과 애정에 매우 놀랐다. 동주도 자신을 마냥 아이로만 취급하지 않고 동등하게 대화해주는 정남에게 호감을 느꼈다.     


”이 손님 좀 마음에 드네, 기분이다. 오늘은 특별히 내 보물창고를 열어줄까?“

”허허, 무얼 숨겨두었기에 보물창고라고까지 하는 거냐. 퍽 궁금하구나.“

“날이면 날마다 열리는 곳이 아니라고! 거기 네 녀석도 오늘만큼은 특별히 구경시켜 주지.”

“나? 왜 나까지?”     


서희는 반문했지만, 잔뜩 흥분한 동주는 귀담아듣지 않았다. 엉겁결에 함께 보물창고에 초대된 서희는 거절의 말을 꺼내려다 동주의 표정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동주의 신이 나 어쩔 줄 모르는 모습이 오늘만큼은 제 또래의 아이 같아 보였다. 서희는 그 모습을 어쩐지 오랫동안 지켜보고 싶었다. 유현도 마찬가지였는지 묵묵히 동주의 행동을 지켜볼 뿐이었다.     


동주는 작고 통통한 손으로 정남의 손을 잡고 그를 서점 구석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어디선가 놓여있던 작은 사다리를 끌고 오더니 다람쥐처럼 쪼르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곧 모습을 감췄다. 자세히 살펴보니 가게 구석의 낮은 천정에 다락방으로 통하는 입구가 보였다. 동주는 싱글벙글 웃는 낯으로 다락방 입구에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서점에 이런 공간도 있었어?”

“어서 올라와!”     


매일 같이 가게에 드나들던 서희도 오늘 다락방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됐다. 정남 역시 다락방의 존재에 매우 놀란 눈치였다. 그곳은 좀처럼 눈에 띄지 않는 가게 구석인지라, 웬만해서는 쉽게 알아차리기 어려워 보였다. 동주의 말처럼 그의 초대가 없었다면 아마 끝까지 모르고 지나갔을 것이다.     


“초대해준 건 고맙지만, 내가 여길 올라갈 수 있을는지….”     


정남은 가파른 사다리를 타고 다락방에 오르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조금이라도 삐끗한다면 몇 달간 꼼짝없이 병원 신세를 져야 할지도 몰랐다. 최악의 상황들을 상상하자 정남은 자기도 모르게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르신, 괜찮아요. 너무 무리하실 필요 없으셔요.”     


눈치 빠른 서희가 상황을 중재하려고 했다. 하지만 정남은 고개를 들어 자신을 바라보는 동주의 얼굴을 보았다. 동주의 반짝이던 눈빛을 마주하니 왠지 모르게 가슴이 뛰었다. 순간 아이의 어깨 너머에 있는 미지의 공간에 대한 호기심으로 그의 심장이 빠르게 박동하였다. 무언가에 대한 기대와 호기심은 정남이 실로 오랜만에 느끼는 감정이었다.     


“괜찮아요. 괜찮을 겁니다.”     


정남은 한 번, 두 번, 세 번. 힘차게 허리를 좌우로 돌리며 몸을 풀었다. 우드득 소리와 함께 몸이 삐걱거리는 것이 느껴졌지만 그는 동작을 멈추는 대신 눈을 부릅뜬 채 두 팔, 두 다리에 힘을 잔뜩 주었다. 조금이라도 삐끗한다면 그대로 하늘나라로 먼저 간 할멈을 만나게 될지도 몰랐다. 정남은 끝까지 긴장을 풀지 않고 한발씩 조심스럽게 사다리를 올랐다.     


“조심하세요!”     


서희는 사다리를 꽉 붙잡으며 불안한 표정으로 정남을 응원했다. 정남보다도 더 걱정 가득한 얼굴이었다. 자신을 기다리며 눈을 빛내는 동주와 걱정은 많지만 자신을 믿고 지켜봐 주는 서희를 보니 갑자기 두 다리에 힘이 불끈 솟았다. 왕년에 이름 높은 산봉우리들은 죄다 밟고 다녔던 젊은 시절의 김정남이가 다시 고개를 휙 쳐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사다리에서 삐그덕거리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정남의 두 손 가득 흥건히 땀이 배어 나왔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한 발…, 두 발…. 그렇게 보는 사람이 더 조마조마한 정남의 사다리 오르기가 끝났을 때 서희는 자신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정남 역시도 땀으로 흠뻑 젖은 두 손을 손수건으로 닦으며 다락방에 주저앉아 자신도 모르게 앓는 소리를 흘렸다. 그는 다락방 위에 후들거리는 두 다리를 뻗고 앉은 후에서야 겨우 주변을 살필 수 있었다. 그리고 팔십 노인의 입에서는 곧바로 아이와 같은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우와….”     


 3, 4평이 될지 모르는 작은 다락방에는 온갖 영화 포스터와 비디오테이프, DVD, 잡지들이 가득하여 빈 공간을 찾을 수가 없었다. 방 한쪽에는 작은 소파와 스크린, 빔프로젝터까지 구색을 갖추어 놓아 아늑한 영화관 같은 느낌이 들었다. 뒤늦게 사다리를 타고 올라온 서희 역시 생각지도 못했던 광경에 입이 떡 벌어졌다.     


“이게 다 동주 네 거야?”

“그렇지. 하나하나가 다 내가 엄선한 보물들이라고!”     


놀람을 감추지 못하는 두 사람의 반응을 보며 동주의 어깨는 더욱 높이 올라갔다. 동주의 자부심을 증명하듯 다락방에 있는 영화들은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는 명작들뿐이었다. 꽤 오래전 출시된 포스터나 테이프들도 많았는데 하나같이 어제 구입했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만큼 보관 상태도 완벽했다. 정남뿐만 아니라 서희까지도 동주의 보물창고를 이곳저곳 구경하느라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다들 즐거운 시간 보내고 계시나요?”

“아, 깜짝이야. 기척 좀 내고 다니라고 했지!”     


어느새 올라온 유현이 간식거리를 들고 나타났다. 한창 신나게 대화에 빠져들었던 동주가 유현에게 툴툴대면서도 그가 가져온 유과를 신나게 집어먹었다. 정남은 아담한 다락방에 옹기종기 사람들과 모여 앉아 음식을 나누며 수다를 떠는 지금 이 순간이 꿈만 같았다. 이곳은 가난했던 어린 시절, 그가 어머니, 아버지, 누이와 형제들과 함께 살았던 자그마한 단칸방과 똑 닮아있었다.     


정남은 순식간에 어린 시절 부모님의 어리광쟁이 막내아들로 돌아간 듯한 기분을 느꼈다. 살아생전 다시는 느낄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사람들의 온기를 다시 마주하며 정남은 버석하게 말라붙었던 마음이 조금씩 누그러지는 것을 느꼈다.     


시간이 훌쩍 흘러 어느덧 해가 넘어갈 시간이 되었다. 낡은 손목시계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정남은 짧은 한숨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살짝 굳은 얼굴로 유현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괜찮다면 이 늙은이가 종종 이곳을 찾아도 되겠습니까?”

“어르신 같은 손님은 언제든지 환영입니다. 부디 마음껏 이곳을 자주 찾아주세요.”     


유현은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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