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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칠월의 도서관 Oct 10. 2024

[연재소설] 월영서림 3편 (3)

달그림자가 머무는 어느 고서점의 이야기

제3편 노기복력 지재천리(老驥伏櫪 志在千里) : 늙은 말의 몸은 마구간에 있어도 그 뜻은 천리를 달린다


정남은 그 이후에도 종종 월영서림을 찾았다. 올 때마다 정남은 자신이 즐겨 먹는 막과자를 한 아름 사 들고 왔다. 정남이 선물하는 막과자는 동주가 최근 가장 좋아하는 간식거리였다. 동주는 정남이 오는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왜 이렇게 늦게 왔어. 기다리다 목 빠질 뻔했다고.”

“미안하다. 오는 길에 잠깐 다리가 아파서 쉬엄쉬엄 온다는 게 그만…”     


동주의 위아래 없는 말투만 아니었다면 영락없이 사이좋은 할아버지와 손주의 모습처럼 보였다. 동주와 정남은 다락방에 올라 그들이 좋아하는 고전 영화를 하나하나 꺼내 보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흑백의 스크린을 홀린 듯 바라보는 백발의 정남과 동글동글한 동주의 뒷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서희는 왠지 모를 뭉클함을 느꼈다. 세대를 초월해 영화를 사랑하는 이들의 모습은 오래된 옛 영화의 한 장을 떠올리게 했다.     


정남은 돌아가는 길에 꼭 월영서림의 책 한두 권을 품에 안고 돌아갔다. 유현이 그냥 다녀가도 된다는 말을 여러 차례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정남은 공으로 신세를 지는 것을 지독히도 싫어하는 양반이었다. 그 와중에 데려가는 책들은 꼭 영화와 관련된 책들이었다. 참 한결같은 정남의 영화 사랑이었다.     


“곧 다시 봅시다.”

“안녕히 가세요. 어르신.”     


계산을 마치고 정남이 서점을 떠난 후, 뒷정리를 돕던 서희에게 유현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서희 씨, 한 가지 부탁을 해도 되겠습니까?”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부탁이라는 단어에 서희는 깜짝 놀랐지만, 고개를 선선히 끄덕였다. 부탁하는 유현의 얼굴이 매우 진지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무슨 부탁인데 그렇게 심각한 표정을 지어요?”

“정남 어르신 관련된 일입니다.”

“아…, 정남 어르신이 왜요?”     


서희는 손으로는 마감을 하면서도 방금 전 헤어졌던 정남을 떠올렸던 터라 내심 놀랐다.     


‘이 남자, 안 그런다고 말하면서도 사실 속내도 읽는 것 아니야? 역시 초능력자인가?’     


다행히도 유현은 서희의 생각까지는 읽지는 못한 것 같았다. 대신 언제나 여유 넘치던 평소의 모습과는 다르게 조금 굳은 표정으로 서희를 바라보았다.     


“정남 어르신이 가게를 찾으실 때, 인터넷이나 디지털 기기를 다루는 방법을 조금씩이라도 알려주실 수 있습니까?”

“아, 난 또 뭐라구요. 네, 좋아요. 안 그래도 어르신이 좀 걱정되던 참이었거든요.“     


서희는 영화관에서 키오스크와 씨름하던 정남과의 첫 만남을 떠올렸다. 그 모습이 내심 마음에 걸렸었던 서희는 유현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하지만 동시에 유현에 대한 의구심은 깊어졌다. 갑자기 왜 유현이 자신에게 이런 부탁을 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자신이 예전에 정남과 있었던 일을 유현에게 말한 적이 있었던가?     


"그런데 갑자기 왜 그런 부탁을 하는 거예요?"     


유현은 제 속내를 읽는 것보다도 더 공교로운 부탁을 했다. 서희는 눈앞의 남자는 무슨 조화로 자신과 정남의 사연을 알고 있는 것일지 살짝 소름이 돋았다. 귀신에 홀린 것 같은 기분으로 서희는 유현을 바라보았다. 유현은 잠시 망설이다 무겁게 입을 뗐다.     


“이대로라면, 정남 어르신은 곧 돌아가실 겁니다.”

“이봐요. 그게 무슨 헛소리예요? 농담도 정도껏 해요.”     


서희는 자신도 모르게 날카롭게 소리쳤다. 유현은 그녀의 신경질적인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서희는 그 초연한 반응에 왠지 모를 짜증이 울컥 치솟아 올랐다.     


“무슨 근거로 그런 어처구니없는 말을 하는 거예요!”

“보통 무연의 생을 살아가는 이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삶을 포기하게 됩니다. 정남 어르신은 지금 무연의 삶을 살아가고 계십니다.”

“대체 그 무연의 삶이란 게 어떤 건데요?”

“세상과 연결된 인연의 실이 모조리 끊긴 상태입니다. 끈이 떨어진 연과 같지요.”     


서희는 흥분을 가라앉히고 유현의 말을 천천히 곱씹어 보았다. 생각해 보니 정남은 일찍 세상을 떠난 아내 외에 다른 가족이나 지인의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다.     


“이대로 있다가 저분은 곧 세상을 스스로 떠나실 겁니다.”     


마치 끈이 떨어진 연처럼. 서희는 제 양팔에 살짝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눈앞의 남자가 과연 자신과 같은 존재일까. 귀신에 홀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경계심 가득한 서희의 눈빛을 마주한 유현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어르신이 무연의 삶을 살고 있다는 건 어떻게 알게 된 거예요?”

“제가 인연의 실을 본다는 건, 이미 저번에 말씀드렸죠? 어르신의 주변에는 그 어떤 인연의 실도 없었습니다.”

“그럴 리가요! 저랑 동주도 있잖아요.”

“이곳의 인연은 속세의 연과 조금 다릅니다. 안타깝지만 지금의 어르신께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하지만….”

“제 말을 믿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지만 정남 어르신을 위해서라도 속는 셈 치고 한 번만 도와주실 수 없겠습니까?”   

  

유현의 간절함 가득한 청을 서희는 외면할 수 없었다. 유현의 부탁이 아니더라도 정남이 어려움을 느낀다면 기꺼이 도와줄 수 있었다. 그보다 서희의 마음에 걸리는 것은 왜 유현이 정남의 일에 이토록 관심을 두고 자신에게 부탁하냐는 것이었다.     


“유현 씨가 직접 도와드리면 되는 거 아니에요? 왜 이렇게까지 저에게 부탁하시는 거예요?”     

유현은 누구보다 초연한 삶을 살아가는 것 같은 사람이지만, 아버지와 자신, 연우, 그리고 정남까지 누군가의 삶에 지독히도 깊이 관여한다. 사람 간의 인연에 집착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그들과 인연이 깊어지는 것을 꺼린다.     


“저와 어르신의 연은 이미 끝난 인연입니다. 더 이상 서로 엮이면 현생을 어지럽히는 악연이 될 뿐입니다.”     

알 수 없는 말을 하는 그에게 더 따져 물으려던 서희는 그의 얼굴을 보고 할 말을 삼켰다. 유현은 정남과 자신이 더 이상 이어져서는 안 되는, 악연이 될 거라는 모진 말을 제 입으로 말하면서도 스스로의 발언에 상처받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결국 서희는 유현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유현 씨가 그렇게 부탁하지 않아도 제가 먼저 도와드렸을 거라고요.”

“네, 서희 씨는 분명 그러셨을 겁니다. 누구보다 제가 가장 잘 알고 있지요.”     


유현은 다시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와 미소 지었다. 서희는 그 미소를 보자 다시 목구멍 너머에서 감정의 응어리들이 울컥 치솟아 올랐다. 화가 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애잔하기도 한 그 복잡하게 튀어나오는 감정들을 그녀는 가까스로 목구멍 너머로 꾹꾹 밀어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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