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그림자가 머무는 어느 고서점의 이야기
제3편 노기복력 지재천리(老驥伏櫪 志在千里) : 늙은 말의 몸은 마구간에 있어도 그 뜻은 천리를 달린다
“어르신, 요즘은 타자 속도가 엄청 빨라지셨어요.”
“서희 양이 많이 가르쳐준 덕분입니다.”
정남은 두 손가락으로만 자판을 두드리면서도 제법 빠르게 속도를 내고 있었다. 정남은 돋보기안경을 추켜세우고 온 신경을 자판과 모니터에 집중하며 빠르게 두 손가락을 움직이고 있었다. 양손으로 타자를 쓰는 서희와 비교하여도 크게 뒤지지 않는 속도였다.
“조금만 더 있으시면 저보다 훨씬 빨리 치시겠는걸요?”
“이게 다 뛰어난 스승님 덕분입니다.”
너스레를 떨며 꾸벅 인사하는 정남의 장난기 가득한 모습에 서희는 저도 모르게 웃음이 팡 터져 나왔다. 그녀는 처음 정남에게 컴퓨터나 키오스크 사용법을 가르쳐줄 것을 제안했던 날 그의 반응이 문득 떠올랐다. 늘 인자한 정남이 그렇게 날이 선 모습은 서희에게도 꽤 충격이었다.
“어쭙잖은 동정은 하지 말아요. 서희 양. 내가요. 지금 이날까지, 그런 것 없이도 잘 지내왔어요.”
“어르신, 너무 언짢게 생각하지 마시고 잘 생각해 보세요. 좋아하는 영화도 못 보시고, 불편하신 것은 사실이잖아요.”
“나한테 이럴 시간에 차라리 서희 양 부모님이나 알려드리는 게 어떻겠습니까? 좋아하신다던 영화도 같이 보러 가시고요.”
“…그럴 수 있으면 좋겠지만, 이젠 불가능한 일이라서요.”
“….”
“‘아침 달’, 아직 남아있는 극장이 있던데 같이 보러 가실래요? 보고 싶어 하셨잖아요.”
그 어떤 말을 던져도 요지부동하던 정남이 고집을 꺾었던 순간이었다. 다음 날 아침, 정남은 서희와 함께 영화관에서 약속을 잡았다. 서희의 도움으로 그는 처음으로 키오스크로 직접 영화를 예매할 수 있었다. 영수증처럼 길게 출력되어 나오는 영화표를 보고 쓰레기로 착각하여 표를 버릴 뻔한 해프닝도 있었다.
“서희 양, 이것 보세요.”
정남이 두 손가락으로 자판을 몇 차례 두들기자 유명 포털 사이트의 메인 화면이 떴다. 정남은 손아귀의 마우스를 신중하게 움직이며 천천히 몇 차례의 메뉴를 클릭해 나갔다. 그리고 잠시 뒤 약간의 로딩 표시가 끝나자 매우 친숙한 디자인의 인터넷 페이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머나, 세상에. 어르신, 이제 블로그도 하실 줄 아시는 거예요?”
“저번에 소개해 준 도서관 수업에서 배운 겁니다.”
<정남의 씨네월드>
투박한 기본 디자인과 폰트, 이름까지도 정직하기 그지없는 블로그였다. 하지만 정남에게는 인터넷이라는 거대한 신세계에 도전한 값진 전리품이었다. 그동안 쳐다볼 엄두조차 내지 못했던 세계에 자신의 이름을 남겼다는 것만으로도 정남은 가슴이 벅차올랐다.
“영화 리뷰를 주제로 글을 쓰시는 거군요?”
“이 블로그라는 게 자기가 좋아하는 걸 쓰는 곳이라고 하니까, 부족한 솜씨를 부려 보았습니다.”
정남은 쑥스러운 듯 콧잔등을 찡긋거리며 멋쩍은 웃음을 흘렸다. 서희는 그 모습에서 영화를 사랑하던 젊은 날의 그를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었다.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블로그였지만 제법 많은 글이 쌓여있는 것을 보니 그가 얼마나 이 블로그를 진심으로 운영하는지 알 수 있었다.
“와, 댓글도 꽤 달렸는걸요?”
“다들 고맙게도 늙은이의 헛소리에 장단을 맞춰준 거지요.”
정남은 겸양을 떨며 제 글을 헛소리라 낮추었지만, 서희는 그가 쓴 글이 보통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가 평소 동주와 나누는 영화 이야기를 조금만 듣더라도 그의 영화에 대한 사랑과 이해가 보통 수준을 넘는다는 건 바로 알 수 있었다. 정남의 블로그 글에 달린 댓글들도 대다수 고전 영화에 대한 그의 해박한 지식과 애정에 감탄하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화기애애한 두 사람의 분위기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잘 알고 있네. 얼굴도 모르는 애들이 지껄인 말 몇 마디에 흥분하는 것도 꼴사납지.”
정남이 컴퓨터를 만질 때부터 조개처럼 입을 꾹 다물고 있던 동주가 또다시 밉살스러운 말을 툭 던진 것이다.
“동주야,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
“허허,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니니 너무 나무라지 마세요.”
“아니에요. 어르신. 혼날 건 혼나야죠. 동주 너, 한동안 잠잠하더니 왜 갑자기 심통을 부려!”
정남은 담담한 표정과 말투로 흥분한 서희를 말렸지만 결국 동요한 속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목덜미가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 모습을 본 서희의 속은 말이 아니었다.
‘평소 애가 위아래가 없어도 이 정도로 경우 없진 않았는데….’
결국 어수선한 분위기를 수습하지 못한 채 정남은 평소보다 훨씬 이른 시간에 서점을 떠났다. 동주 역시도 속이 단단히 꼬인 듯 떠나는 정남을 마중 나가는 것조차 하지 않았다. 그런 동주를 유현은 물끄러미 바라보다 곧 아이가 좋아하는 과자들을 한 접시 내어주었다.
보통 때라면 한달음에 달려와 과자를 먹어 치울 동주였건만. 오늘은 이상하게 과자 접시를 쳐다도 보지 않았다. 잔소리를 잔뜩 퍼부어줄 생각을 했던 서희조차도 잔뜩 풀이 죽은 동주의 어깨를 보자 선뜻 말이 나가지 않았다.
“너랑 쟤가 하는 거 이제 그만하면 안 돼? 무연이고 뭐고 혼자 있는 게 문제라면 그냥 여기서 지내도 되잖아.”
“어르신을 많이 좋아하는 것 압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이곳에 어르신을 붙잡아둘 수는 없다는 걸 동주도 잘 알지 않습니까”
“시끄러워. 여기 머무는 것이 뭐 어때서? 지금처럼 다 같이 즐겁게 지내도 충분하잖아.”
“이제 어르신은 무연의 운명을 벗어나실 수 있습니다. 새로운 삶의 기회가 주어진 이는 더는 붙잡을 수도 없고, 붙잡아서도 안 됩니다.”
“….”
고개를 숙인 동주는 유현에게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아슬아슬한 분위기 속에서 어쩔 줄 몰라 하던 서희는 유현이 했던 말 중 한 단어가 머릿속에 꽂혔다. 무연의 운명. 분명 유현이 자신에게 정남을 도와 달라고 부탁하며 했던 말이었다.
“보통 무연의 생을 살아가는 이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삶을 포기하게 됩니다.”
무연의 인생을 벗어났다는 건 정남이 이제 스스로 세상을 미련 없이 떠날 일은 없어졌다는 뜻이었다. 분명 기뻐해야 할 일이었다. 하지만 서희는 무표정한 얼굴로 제 발치만 보고 있는 동주에게 마음이 쓰여 어찌할 줄 몰랐다.
“준비되면 말씀 주세요.”
“일없어.”
동주는 유현을 잔뜩 쏘아보다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이는 평소 죽고 못 살며 끼고 살던 간식 접시에 손도 대지 않은 채 휙 다락방으로 올라가 버렸다. 동주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유현도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 대신 잔뜩 긴장한 채 자신을 주시하던 서희를 향해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했다. 서희는 유현의 돌발 행동에 깜짝 놀랐다.
“유현 씨, 갑자기 왜 그래요?”
“모두 서희 씨 덕분입니다. 곤란했을 제 부탁을 들어주셔서 정말 감사했습니다.”
“아, 혹시 정남 어르신 이야기라면 전에도 얘기했지만, 굳이 유현 씨 부탁이 아니었어도 제가 알아서 도와드렸을 것에요.”
“알지요. 알고 말고요.”
서희의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유현은 빙긋 미소 지었다. 서희는 보기 좋은 그림 같은 유현의 미소를 바라보다 잠시 넋을 놓았다.
‘정신 차려, 강서희. 저 얼굴에 넘어가면 안 돼!’
서희는 보통 유현이 저런 미소를 지을 때는 무언가 꿍꿍이가 있을 때라는 사실을 알기에 급히 정신을 차렸다. 유현은 자신을 경계하는 서희의 모습을 보며 더욱더 짙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서희의 예감은 적중하였다.
“서희 씨, 부탁이 하나 더 있습니다.”
“어르신, 오셨어요?”
서희가 택시에서 내리는 정남을 배웅나왔다. 꽤 늦은 시간이었기에 골목 상가는 어둠에 잠겨있었다. 오직 월영서림만이 홀로 불을 밝히고 있었다. 밤눈이 어두운 정남이 서희의 부축을 받으며 서점에 들어서자 뾰로통한 얼굴의 동주가 유현과 함께 그들을 맞이했다.
“동주 얘는 왜 지금 이 늦은 시간까지 안 자고 나와 있습니까?”
정남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자정에 가까운 시간에 찾아와 달라는 유현의 부탁으로 택시까지 타고 왔지만 지금 시간에 눈을 말똥말똥 뜬 동주까지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늦은 시간 오시느라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어르신.”
유현은 정남을 보자마자 평소처럼 마실 것을 내어왔다. 하지만 다른 때와 달리 유현이 정남에게 건넨 것은 차가 아닌 한 잔의 감주(甘酒)였다. 코끝을 간지럽히는 달콤한 향이 정남의 식욕을 돋웠다.
젊은 시절 술을 꽤 좋아했던 정남은 술자리가 아니더라도 달콤한 감주를 물처럼 즐겨 마셨다. 그 시절엔 지금의 커피나 콜라 같은 음료보다 훨씬 흔하게 마셨던 음료였다. 정남은 식사를 마친 후에는 꼭 감주 한 사발을 어김없이 들이켰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감주를 파는 곳도 보기도 드물어 몇 년 동안 감주를 제대로 구경조차 하지 못했었다. 그 때문에 정남은 유현이 준비한 감주를 보고 적잖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감주를 홀짝이면서도 그는 자신이 감주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유현에게말한 적이 있었는지 잠시 고민했다. 의아했지만 어찌됐든좋은 게 좋은 것이었다.
유현이 내어준 감주는 녹진하면서도 달고 구수한 맛이 일품이었다.
“정말 맛이 좋습니다. 요즘 이렇게 찾기도 힘든 걸 구해서 이 늙은이를 대접해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오늘 저를 보자 한 이유가 이것 때문입니까”
“어르신 입맛에 맞으시다니 참 다행입니다. 제가 오늘 어르신을 뵙자고 한 건 이 감주 때문이 아니라 보여드릴 것이 있어서입니다.”
유현은 정남에게 서가에서 책을 한 권 꺼내 보여주었다. 잠자코 상황을 지켜보던 서희는 익숙한 표지에 깜짝 놀랐다. 정남 앞에 놓인 책은 예의 먹빛 표지의 고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