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그림자가 머무는 어느 고서점의 이야기
제3편 노기복력 지재천리(老驥伏櫪 志在千里) : 늙은 말의 몸은 마구간에 있어도 그 뜻은 천리를 달린다
‘아버지가 남겼던 책과 비슷해. 아니 조금 다른가?’
정남은 유현이 보여준 책이 예사 물건이 아니라는 걸 느꼈는지 조심스럽게 표지를 넘겼다. 그의 손길을 따라 넘어간 표지 뒤로 묵빛 종이 위에 빼곡히 쓰인 금빛 글씨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서희가 가져온 아버지의 책과 달라보였다.
“이게 대체 무엇입니까?”
“어르신, 세상 사람들은 모두 각자의 인연으로 맺어있습니다. 이건 오래전, 어르신과의 인연을 맺은 이가 써 내려간 책입니다.”
“정말 저와의 인연으로 쓰인 책이 맞습니까? 저를 위해 책을 써줄 정도의 인연이 있는 이가 세상에 있을지 잘 모르겠습니다….”
회한에 젖은 노신사의 눈가가 금세 붉게 물들었다. 젊은 시절에는 정남도 많은 이들과 인연을 맺었었다. 하지만 불의의 사고로 가족을 일시에 잃은 후 그는 마음의 문을 굳게 닫았고 곁에 남은 사람들은 결국 그를 포기하고 하나둘씩 떠나갔다. 어느 날 갑자기 정신을 차리고 무심히 흘려보낸 지난 세월을 후회하여도 이미 늦어버린 후였다. 그랬기에 내일 당장 사라져도 그의 빈소를 찾을 이 하나 없던 무연의 삶을 살아가던 그였다. 때문에 정남은 자신과의 인연을 기리며 책까지 써 내려간 이가 있다는 유현의 말을 믿지 못했다.
“누가 대체 이런 저를 위해 책까지 쓴다는 겁니까. 다른 사람과 착각하신 것이겠지요.”
“착각할 리가 없습니다. 책을 쓴 사람을 아주 잘 알거든요.”
유현은 정남의 말에 단호한 태도로 반박했다. 정남을 바라보는 유현의 얼굴엔 그리움과 슬픔과 괴로움이 가득했다. 자신을 바라보는 유현의 눈빛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낀 정남은 다른 말을 꺼내는 것 대신 제 앞에 놓인 감주를 다시 홀짝였다. 그런 정남의 빈 잔을 빠르게 다시 채우며 유현이 말을 이어나갔다.
“어르신, 이 책은 제가 쓴 책입니다.”
“그게 대체 무슨 말입니까.”
정남은 깜짝 놀라 유현을 바라보았다. 자신은 유현을 이곳 월영서림에서 처음 만났다. 아무리 기억을 뒤져보아도 유현이라는 이름은 낯설었다. 그가 건넨 책도 몇십 년, 혹은 그 이상의 시간을 지나 온 물건으로 보였다. 그런데 그걸 본인이 썼다니, 아무리 많이 쳐보아도 유현의 외모는 이십 대 후반쯤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저와 어르신의 인연은 아주 오래전에 시작되었습니다. 어르신의 이전 생에서 한 스승님 밑에서 가르침을 받은 동문수학한 사이였지요.“
곁에서 대화를 듣던 서희 역시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손자뻘인 유현이 정남의 동문일 리가 없었다. 생귀신이라도 되는 것일까. 그게 아니라면 분명 정남을 골리는 것일 텐데 장난이라 하기엔 지나치게 번잡스러웠다. 정남도 비슷한 생각을 하였는지 평소의 온화한 모습과 다르게 그의 목소리에서는 은은한 노기가 느껴졌다.
“그 말인즉슨 그럼 내 눈앞에 있는 자네가 귀신이라도 된단 말인가!”
“그럴 리가요. 저는 제 육신에 혼과 백이 온전히 깃들어 있는 엄연한 산 사람입니다. 그저 남들보다 조금 더 많이 오래 살았고, 조금 더 많이 볼 뿐입니다.”
서희는 순간적으로 어떤 단어 하나가 떠올랐지만, 입 밖으로 꺼내지 않고 다시 삼켰다. 유현도 그런 서희의 기색을 눈치챘는지 살짝 눈을 흘겼다.
“그럼 대체 어찌 된 일인지 설명해 보게나.”
유현은 정남의 질문에 대답 대신 그의 숨을 책 위로 쏟아내고 부드럽게 책장을 쓸어내렸다. 그의 숨결과 손길이 닿은 금빛 글자들은 스스로 빛을 뿜어내며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 글자, 한 글자씩 오랜 속박을 벗어나듯 금빛 글자들은 검은 종이를 벗어나 튀어 오르기 시작했다. 책을 벗어난 금빛 글자들은 몸풀기라도 하듯 공중을 날아다니며 정남의 시야를 어지럽혔다.
“허억! 지금 내가 꿈을 꾸는 건가.”
서울 외곽의 오래된 헌책방에서 마주한 비현실적인 풍경을 바라보며 서희는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닌지 의구심이 들었다. 어두운 서점을 낮과 같이 환하게 밝히며 빛나는 황금빛 글자들 사이에서 그녀는 잠시 동안 우주를 유영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빙글빙글 춤을 추듯 허공을 날아다니던 글자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하나의 대형을 이루었다. 글자들은 마치 파도처럼 밀려들고 물러나기를 반복하다가 유현이 손가락을 튕기자 일제히 성난 파도처럼 높게 치솟아 오르더니 그대로 정남을 덮치며 그의 눈과 입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으아아악!”
“어르신!”
정남은 필사적으로 팔을 허우적거리며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그 무엇도 막을 수 없었다. 정남은 쏟아지는 빛무리 속에서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전생과 현생을 아우르는 엄청난 양의 기억과 정보가 그의 머릿속으로 순식간에 흘러들어왔고 결국 그는 탈진하고 말았다.
애써 진정하려고 해도 지난 삶의 기억과 흔적, 그가 놓쳐버리거나 끊어버린 인연들이 정남의 머릿속을 빙글빙글 돌며 그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정남의 주름진 얼굴 위로 못다 핀 삶에 대한 미련과 비통함의 눈물이 가득 흘러내렸다. 너무도 짧은 삶이었고, 너무도 한스러운 삶이었다.
기억을 되찾은 사형 정남에게 유현이 다시 깍듯한 예를 다해 인사를 올렸다. 무서울 정도로 흘러간 세월 속에서도 어찌 된 영문인지 막내아우 유현의 얼굴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이유를 알 수 없지만 홀로 그 긴 세월을 견뎌온 아우님이 너무도 안쓰러워 뜨거운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형님,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우리 유현 아우님은 그간 잘 지내셨는가?”
“네, 보다시피 당부하신 대로 잘 살아남았습니다. 언젠가 다시 만나자던 형님과의 기약을 기억하면서요.“
”이걸 내온 걸 보면 날 아주 잊은 건 아닌가 보아.“
정남은 지난 생에서도 자신이 즐겨 마시던 감주를 다시 쭉 시원하게 들이켰다. 학문보다도 시와 노래에 더 관심이 많았던 그가 전날의 과음으로 괴로워할 때마다 막내아우가 내어주었던 해장술이었다. 지난밤의 숙취로 목이 탈 때 들이켰던 감주 한 모금의 기막힌 맛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유현은 변함없는 정남을 묵묵히 지켜보며 지난 생의 추억들을 떠올렸다. 유현은 아버지와도 같은 스승님과 호형호제하며 동문수학하던 사형들의 품속에서 고이 자라난 화초와도 같았다. 하지만 스승이 역모의 죄를 뒤집어서 쓴 이후로는 유현을 둘러싼 모든 것들이 달라졌다. 형님들과 함께 수학하던 정든 서원은 순식간에 불에 타 사라졌고, 피를 나눈 가족, 형제와도 같았던 이들은 생사조차 알 수 없이 뿔뿔이 흩어졌다.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들자는 달콤한 꿈을 꾸며 세상을 바꾸고자 모여든 이들이었다. 하지만 결국 그들 모두 너무도 다디단 꿈을 꾸었기에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았다.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난리 통 속에서도 정남과 형님들은 목숨을 걸고 아우들이 안전하게 도망칠 수 있도록 사력을 다했다. 하지만 아우 중 가장 어렸던 유현은 제 살길을 찾지 않고 정남과 형님들의 곁을 지키겠다며 서원을 떠나지 않았다.
“저도 여기 남겠습니다. 함께 하게 해주십시오.”
“잘 새겨듣거라, 현아. 우리는 꼭 다시 만날 것이다. 네가 잘 숨어만 있다면, 모두 다 정리하고 다시 너를 불러들일 것이야.”
아직 세상 물정을 몰랐던 유현은 순진하게도 그 약속을 믿었다. 하지만 결국 처음부터 지킬 생각조차 없이, 그저 어린 아우의 목숨을 달래기 위한 거짓부렁이었다는 것을 유현은 너무도 늦게 깨달았다. 유현이 다시 돌아왔을 때 그의 곁에는 아무런 인연도 남아있지 않았다.
홀로 남은 유현은 언젠가 스승님과 형님들에게 빚진 목숨값을 갚을 날이 올 것이라는 믿음만으로 죽음을 지척에 둔 무연의 삶을 버텨왔다.
“이 모자란 아우를 위하여 어찌 모든 걸 희생하셨습니까. 이 빚을 어떻게 보답하여야 할지 알 수 없어 지난한 시간을 견디며 살아왔습니다.”
“유현아, 그날의 모든 것은 우리 스스로 한 선택이었다. 나는 지금까지도 내가 한 선택에는 한 치의 후회도 없다.”
정남은 유현의 어깨를 부드럽게 다독여주었다. 스승 못지않게 엄한 큰 사형 앞에서 실수로 벌벌 떨던 어린 날. 그런 유현을 다정하게 감싸주었던 넉살 좋은 손위 사형의 모습 그대로였다.
“네 덕분에 이번 삶은 좀 더 세상을 가까이할 수 있겠구나. 그것만으로도 네가 말한 빚은 이미 넘치도록 충분히 갚았다.”
정남은 지난 삶의 미련을 떨치려는 듯 술잔에 남은 감주를 훌렁 털어 마셨다. 전생의 유현이 기억하는 호쾌한 그 모습 그대였다. 정남은 텅 빈 검은 책을 툭툭 손으로 두드리며 물었다.
“그럼 이제 우린 어떻게 되는 것이냐.”
“서점 문을 나서게 되는 순간, 전생의 기억과 인연 모두 정리될 것입니다.”
“가차 없구나.”
“전생의 기억을 고스란히 품고 이곳을 계속 가까이하신다면 지금 간신히 붙잡은 세상과의 끈은 결국 또 끊어지게 될 것입니다.”
유현은 미련이 남은 듯한 정남을 단호하게 밀어냈다. 그 모습은 정남이 기억하는 여리고 정이 많던 막내 유현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500년이란 긴 세월 동안 유현도 많은 것을 경험하고 변화하였을 것이다.
“그래, 네 뜻은 잘 알겠다. 나도 건강히 지낼 터이니, 너도 몸 건강히 지내거라.”
얼마 남지 않은 생이라도 홀로 세상을 등지지 않을 것이다. 세상이 또다시 나를 두고 홀로 앞서가더라도 기를 쓰고 악을 쓰며 쫓아가마. 저세상에 갈 때까지 내가 여기 있었노라 큰소리치다 미련 없이 떠날 것이라, 정남은 다짐하고 또 다짐하였다. 정남은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뒤돌아보지 않고 망설임 없이 서점 문을 넘는 정남의 뒷모습을 유현과 서희, 동주는 말없이 지켜보았다.
서희는 그날 이후 하고 싶은 말도, 묻고 싶은 말도 많았지만 유현과 동주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혹시라도 잘못 말을 꺼냈다간 유현애개 자신에게도 정남처럼 이곳을 떠나야 한다는 말을 들을까 두려워 어떤 것도 보지도 듣지도 않은 척 그렇게 일상을 보내오던 터였다.
마침 정남도 그날 밤 이후론 월영서림을 찾는 발걸음이 점점 드물어져 갔다. 서희도 더는 정남에게 알려줄 것이 없었기에 왕래는 자연스럽게 줄어들었다. 하지만 요즘은 다들 그러하듯 서희는 수시로 바뀌는 메신저의 프로필 사진을 통해 정남이 매우 잘 지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서희는 잠시 핸드폰을 하던 중 포털 메인에 뜬 익숙한 이름을 보고 깜짝 놀랐다. 평소처럼 그냥 못 본 척 넘길 수 없는 빅뉴스였다.
“세상에, 정남 어르신 블로그가 포털 메인에 떴어요.”
<정남의 씨네월드>라는 블로그를 소개하는 기사였다. 각 분야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는 어르신들, 이른바 ‘신중년’ 세대를 집중 조명하는 기획 기사였다. 기사를 클릭하자 반가운 얼굴이 보였다. 특유의 멋스러운 정장을 입고 영화관을 배경으로 인터뷰 사진을 찍은 정남이었다. 기사는 고전 영화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적극적인 소통으로 금세 유명 영화 블로거가 된 정남을 다루고 있었다.
“동주, 너는 어르신 소식 안 궁금해? 블로그라도 알려줄까?”
“됐어, 누가 저런 배신자 녀석을 궁금해한다는 거야. 블로그니 뭐니 그런 요란한 건 딱 질색이거든!”
톡 쏘아붙인 동주는 쪼르르달려나가더니 이내 시야에서 모습을 감췄다.서희는 환갑은 훌쩍 넘었을 어르신에게 배신자 운운하는 동주의 성질머리에 학을 뗐다. 서희는 오늘이야말로 이 건방진 꼬맹이와 한바탕 대거리를 할 생각으로 잔뜩 벼르며 동주를 찾았다. 한참을 찾아 헤맨 끝에 서희는 다락방 구석에 박혀있는 동주를 발견했다.
동주는 무얼 그리 열심히 보는지 서희가 그의 아지트를 급습했다는 사실조차 눈치채지 못했다. 서희는 동주가 몰래 숨겨두고 보고 있던 것의 정체를 알자마자 끓어오르던 전의는 순식간에 사그라트렸다. 대신 동주가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다.
동주의 손에는 마니아들 사이에서도 구하기 어렵다 소문이 난 영화 무가지가 있었다. 얼마 전 정남이 자신이 글이 처음 실렸다며 보내왔던 우편물이었다. 쳐다도 안보는 척을 하더니 그새 꽤 여러 번을 반복하여 읽었는지 잡지 표지가 벌써 나달나달 헤져 있었다.
‘하여튼 진짜 하나도 안 귀엽다니까.’
서희는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으며 동주를 방해하지 않기 위하여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