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첫 만남
작년 이맘때 신입생이었던 그는 선배가 주는 술을 넙죽 받아 마시고는 이틀 내내 잠만 잤다고 한다. 일어나 정신 차려보니 어느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듯, 처음부터 MT는 가지도 않았던 것처럼 집이었다고 한다. 나름 전설로 포장된 이 이야기를 들으며 우리들도 술을 받아 마셨다. 또 한 번의 청출어람하는 전설을 원했던 것일까 이삼일 자고 일어나는 것쯤 별일 아니었을까 아님 우리 마음 속에도 영웅이 되고 전설로 남고 싶은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치기 싫었을까 눌려있던 욕망을 자유롭게 풀어헤치며 술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는 그 날의 일을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을까 오히려 우리에게는 영웅전설처럼 각인되어 남은 그 사건을 정작 본인은 어떤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을까 궁금해졌다. 술과의 첫 만남하면 그가 먼저 떠오른다.
그녀가 내 눈에 처음 들어온 그날 그녀를 바래다 주었다. 환영회라는 이름으로 골동품이 되어 버린 과 트로피에 소주 한 병을 그대로 부어 원샷을 하고 난 뒤였다. 대학 오기 전 치아 교정을 시작한 시골 녀석은 치아가 알코올에 닿는 것을 막기 위하여 빨대를 이용하여 그대로 한 병을 내장으로 보내버리는 기술을 선보여 박수 갈채를 받았다. 이 트로피를 들어올려 안에 내용물을 몸 속에 쏟아 넣고 머리 위로 뒤집어 올려 툭툭 털어야만 일원이 되었음을 인정받을 수 있었나 인정받고 싶었나 고조되고 시끄러운 그러나 머리 속은 무언가가 불같이 타오르고 흔들리고 고요하고 우주를 떠다니는 듯 꿈길을 걷는 듯 설명할 수 없는 이질감이 내 몸을 감싸던 그러한 순간, 테이블 몇 개 건너 그녀가 트로피를 받아들고는 몇 날 며칠을 준비하여 학예회 발표장에 나와서는 갑작스런 조명과 시선들에 해야 할 몸짓을 잊어버리고 어찌할 바를 몰라 엄마의 모습만을 찾는 유치원생처럼 눈을 약간 찌푸리고 도움을 요청하듯 두리번 거리고 있었다. 술이 깨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이상형과 마주치는 것!!!!!!!!
자세한 기억은 술이 가져가 버렸지만 나는 트로피 속 소주 한 병을 원샷하고도 살아남아 그 이후에도 우월감으로 몇 잔의 술을 더 마셔댔고 그럼에도 그녀를 계속 살폈고 결국 그녀가 발그레해진 얼굴로 더 이상은 힘들다는 표정으로 집에 가겠다고 일어섰을 때 내가 바래다줄게 그녀 옆에 서 있는 어색한, 나를 발견하게 된다.
나는 사실 그런 사람이 아니다.
어색한. 그렇다. 나는 누군가에게 내 의견을 적극적으로 말하는, 특히 눈 속에 들어와 버린 그녀 앞에서 내가 바래다줄게 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절대 아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지금 여기서 자세하게 설명하기는 쉽지 않으나 하나 분명한 건 나는 스스로 굉장히 강한 사람이다. 속으로는 쫄고 있지만 겉으로는 쿨한 척 하는 것도 잘하고, 반대로 겉으로는 손 발 음성 다 떨고 있지만 정신은 말짱히 응전의 태세를 갖추는 상황도 잘 만들곤 한다. 군대 이등병 시절 쳐다보기도 힘든 말년 병장 선임 한 명이 갑자기 나를 불러세우고는 말한다.
너 싸움 잘하지?
이병 ㅇㅇㅇ. 아닙니다.
내가 관상을 좀 볼 줄 아는데 딱 보니 너는 싸움할 때 눈을 안 감아. 맞지?
순간 속으로 당황했다. 내가? 주먹이 내 면상으로 날아오는데도 눈을 안감는다고? 내가?
너 같은 사람들이 절대 안쫄고 죽어라 덤비는 스타일이거든. 한번 물면 놓지않는 짐승처럼 말이야. 무섭다 너...
이병 ㅇㅇㅇ. 아닙니다.
뭔 개소리야? 난 태어나서 싸움이라고는 한 손 가락 겨우 꼽을 정도? 그것도 어렸을 적 인생 모르고 자라던 시절에 누가 더 힘세네 내가 우리반에서 몇 번째로 싸움 잘하네 자랑하며 다니던 코흘리개 시절 주변 친구들과의 전쟁이 끝인데...
새삼 누군가와 싸움 한 번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 지는건,,, 나 스스로 굉장히 강한 사람임을 인정하는 것인가? 아님 내가 모르는 전투적인 나의 모습을 만나고 싶은 것인가.
그 친구가 나의 정신력을 부여잡고 강한 모습을 가끔 뿜어내는 지도 모르지.
난 굉장히 강한, 더 강해지고 있는 사람이다 라고 나는 스스로 생각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사실 그런 사람이 아니다.
어색한, 그렇다. 나는 누군가에게 내 의견을 적극적으로 말하는, 특히 눈 속에 들어와 버린 그녀 앞에서 내가 바래다줄게 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절대 아니다.
결국 그날의 어색한 나는 내가 아닌게 분명해 졌지만 무튼 술을 마셔서 얻어낸 용기로 난 그녀와 함께 택시에 올랐고 그녀 집 앞까지 가는 호사로움을 누리게 된다.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어 버린 강렬한 첫 만남! 함께 있었던 시간에 주고 받았던 대화, 느낌, 분위기는 술이 차비로 가져가 버렸지만 아름답게 퇴색되어 버린 첫 만남을 기억하고 그리워하며 술에게 고마워 하고 그래서 술잔을 항상 함께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술에 의지했던 그녀와의 첫 만남은 지금의 우리처럼 빈 껍데기로만 남아 버렸는데도...
술과의 첫 만남은 그녀와의 첫 만남으로 기억되고, 이제 그녀를 다시는 만나지 못할 거라는 믿음으로 순수하고 아름다웠던 대학 새내기 그 첫 모습을 영원히 간직할 수는 있지만, 또 다시 어색한! 나를 만나고 싶지는 않아서이제 술은 추억이 아니다. 간직의 대상이 아니다. 꿈 속에서 하늘을 날아다니는 나와 상관없는 영웅 이야기였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