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우승자 박철순
■ 등장인물: 김전인(남, 삼십대 초반, 마라토너), 남동일(남, 삼십대 초반, 마라토너), 박철순(남, 삼십대 초반, 마라토너), 아나운서 1, 아나운서 2, 사회자, 완주자 1, 완주자 2
제1막, 제1장 ‘후반부’
[잠실대교 위. 오전. 김전인이 앞에 서고 남동일이 뒤따라 달리고 있다. 인도에서는 마라톤 크루별로 삼삼오오 모여 선수들에게 파이팅을 외치는 동시에 본인 크루원들이 달려오지 않나 주로를 살피는 몸짓들로 시끌시끌하다.]
김전인 (뒤를 돌아보며) 후, 후, 이대로 가면 순위 안에 들기는 어려워. 남은 3킬로 모험을 걸어보는 거 어때?
남동일 (숨을 크게 몰아쉬며) 후.흡, 후.흡, 오른쪽 햄스트링 쪽에 통증이 오고 있어. 학.흡, 잘못하다간 쥐 나고 멈춰서야 할 것 같아...
김전인 (앞을 바라보며) 후, 후, 우리가 같이 뛸 수 있는 마지막 무대인데... 잠실대교를 뛰어서 건너는 것도 마지막일 것 같네.
남동일 (결연한 표정으로) 학.흡, 학.흡, 학.흡, 가자. 가는 데까지. 저 앞이 고지인데 멈출 수도 없네. 어디 한 군데 끊어져도 가보자.
[잠실대교 위. 선두 중계차 안. 아나운서 1과 아나운서 2가 차 뒤편에 앉아 마이크를 들고 마라톤 중계를 하는 중이다. 외국인 선두 3명이 나란히 중계차를 따라 달리고 있다. 50미터 뒤로 김전인과 남동일이 보인다.]
아나운서 1 (선두 선수들을 바라보며) 남은 거리는 약 2킬로. 이제 6분 후면 구지 마라톤 우승자가 결정됩니다. 마라톤에서 이때쯤이면 모두가 지쳐있고 체력은 바닥이죠. 정신력으로 버티는 수밖에 없습니다.
아나운서 2 (약간 흥분된 목소리로. 본인이 마라톤 선수할 때의 느낌을 추억하며) 맞구요. 선두는 3명, 그 뒤를 우리 나라 선수 2명이 뒤쫓고 있는 상황이죠. 50미터가 별거 아닌 것 같지만 비슷한 실력을 가진 선수들 사이에서는 먼 거리로 느껴질 수 있거든요. 기록은 3위까지만 기억하게 됩니다.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이 순간 정신력으로 모든 것을 극복하고 몸을 불태워야 합니다.
아나운서 1 (아나운서 2를 살짝 바라보며) 아, 너무 팽팽합니다. 긴장을 조금이라도 늦추는 순간 연 줄이 끊어지듯 숨이 끊어질 듯 다리 힘줄이 터질 것만 같습니다. 자 이제 선수들은 마지막 선택을 해야 합니다. 순위권을 향해 스퍼트를 하느냐 아니면 안정된 완주를 선택할 것인가를 말이죠.
제1막, 제2장 ‘골인’
[골인 지점. 오전. 우승 테이프를 양쪽에서 든 사람 두 명이 긴장하며 줄을 잡고 있다. 사회자는 우승자 발표를 위해 마이크를 고쳐잡고 선수 번호를 확인하기 위해 한 발 더 앞으로 나아간다. 골인 지점 양 쪽으로 응원단, 마라톤 크루들, 구경 나온 일반인들로 꽉 차 있고, 우승자가 누구인지를 보기 위해 시야를 확보하기 위한 자리 싸움이 치열하다.]
저 멀리 달려오고 있는 1등이 보인다. 아직 누군지 확실하지는 않으나 독보적인 1등이 분명하다. 뒤따라 오고 있는 선수들은 훨씬 뒤쪽이다. 선두 중계차도 보이지 않는다. 선두 중계차를 앞질렀다고 하기에는 뭔가 좀 이상하다. 순간 골인 지점은 슬로우 모션처럼 움직임이 둔해지기도 하고, 진공 상태가 된 것처럼 적막이 흐르고 있다. 이제 남은 거리는 30미터. 1위로 달려오는 선수의 모습이 클로즈업된다.
박철순 (가쁜 숨을 몰아쉬고 그렇지만 희열에 찬 우승자의 웃음으로) 훕.하, 훕.하, 훕.하, 훕.하, 훕.하, 하, 하, 하, 하하하.
사회자 (마이크를 고쳐 잡으며) 어, 우승자는 13번을 달고 있습니다. 13번이면 아, 어, 박철순 선수네요. 아, 박철순 선수입니다. 박철순 선수가 1등입니다. 아, 대단합니다.
환호성 속에 박철순은 약간 가슴을 내밀고 두 팔을 높이 치켜들어 우승을 확신하며 우승 테이프를 끊고 골인 지점을 통과한다. 주로 양쪽으로 박수 갈채가 쏟아지고, 우승자의 영광스러운 골인 장면과 인터뷰를 담으려는 방송사 카메라가 박철순을 따라간다.
사회자 (다소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아, 박철순 선수가 골인했습니다. 우승입니다. 예상 밖이네요. 우승권에 있던 외국인 선수들이 아직 보이지 않는데요. 박철순 선수는 중후반부 10위권으로 달리던 선수였는데요. 마법을 썼나요 아니면 막판에 날개라도 달았나요. 대단합니다. 아무튼 우승입니다. 우리 나라 선수가 구지 마라톤 역사상 처음으로 우승을 했습니다. 기록은 02:07:18입니다. 대단합니다. 박철순 선수. 대단합니다. 축하합니다...... 뒤따라 들어오는 선수들도 모두 대단합니다.
저 멀리 선두 중계차가 보이기 시작한다. 사회자가 중계 방송중인 화면을 보지 않고 골인 현장의 흥분을 담아내는 동안 선두 중계차의 조용한 비밀 무전이 골인 지점 본부로 전달되고 있다.
아나운서 1 (당황한, 좌절한 표정으로 마이크가 아닌 무전기를 잡고. 중계에 잡히지 않도록 조용하게) 본부 나오세요! 중계차가 잠깐 길을 잘못 들었어요. 선두권 선수들은 중계차를 따라 지금도 치열하게 달리는 중입니다. 중계차 방향이 잠깐 틀어졌는데 이걸 어떻게...
아나운서의 목소리도, 선두 중계차의 모습도, 선두였던 우승 후보자 외국인 선수 3명의 모습도, 그 뒤를 바짝 쫓던 우리나라 선수 김전인, 남동일의 모습도, 골인 지점의 웅성거림과 환호도 땀방울이 되어 하늘 위로 사라져 간다.
제2막, 제1장 ‘우승자 박철순’
[카페 안. 오후. 마라톤 완주자들로 시끌한 가운데 일반인 완주자 두 사람이 시원한 음료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고 있다.]
완주자 1 (지친 다리를 주무르며) 오늘 누가 우승했나?
완주자 2 (시원한 음료를 마시며) 박철순이라는 데?
완주자 1 아 그래? 외국인 선수들 겁나 빠르던데, 한국 선수가 우승한 거네? 대단한데?
완주자 2 근데 선두 중계차 운전하던 사람이 예전에 박철순과 같은 소속 선수였다는데...
완주자 1 (의아한 목소리로) 그래? 근데 그게 왜?
완주자 2 아니 그냥 그렇다고...
[2025.03.30. 김원중.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