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알약
그 약을 먹을 때 나는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가. 아니면 흥분하고 있었던가. 기대하고 있었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이다. 기대! 인생에는 3번의 기회가 찾아온다는 데 바로 지금 이 기대감이 그 기회가 아닌가. 지루했던 삶을 마감하고 새로운 세계에서 다시 태어나 이전의 나는 깨끗하게 잊어버리고 나다운 나로 살 수 있는 기회 말이다.
내가 그를 만난 것도 그러고 보면 기회였다. 회사에서 별 이유 없이 잘리고 집에는 말을 못 한 채 출근하는 척하며 공원을 기웃거리고, 어두워지기만을 기다렸다가 회식하는 양 술집을 전전하는 날들이 반복되고 있었다. 아이들은 어느새 고등학생이 되고, 돈 들어갈 일은 점점 많아지고, 그만큼 아내의 흰머리도 점점 늘어가는 때에 직장 없는 자의 직장 없다고 말하지 못하는 설움은 술집에서 말고는 해결할 한 평의 공간조차 나에게는 없었다.
“삶이 피곤혀?”
전날 마신 술이 안 깨어 푸석해진 피부를 문지르며 공원 벤치에 앉아 있던 나에게 그가 말을 걸어왔다. 뭘 팔러 다니는가. 난 천 원짜리 음료수 하나 사 먹을 돈도 없다 이 사람아!
“돈 없어요. 다른 데 가보세요.”
“돈 없다고? 얼굴을 보아하니 나를 위해 대출이라도 냉큼 받아와야 할 쌍판인데?”
대꾸할 기운도 없어 얼굴을 손으로 가린 채 벅벅 문지르는 사이 그가 다시 말을 걸어왔다.
“약 하나 줄까? 이거 먹으면 조금 전까지 하던 고민들이 싹 사라질 텐데?”
결국 약 장수였구나. 아 이 약 한번 좝서봐. 아침 밥상이 틀려져. 얘들이 막 생겨. 자 한 번뿐인 기회를 잡아. 어릴 적 골목에서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는 목청 좋게 능글거리며 약을 팔던 아저씨의 이목구비가 갑자기 생각났다. 그 사람도 약을 팔며 부끄러웠을까? 많은 사람들 앞에서 거짓말하는 자신이 창피해서 저녁에는 혼자 술을 마셔댔을까?
“이 약 먹으면 10년으로 돌아가는겨. 몸도 젊어지지. 몸은 젊어지는 데 정신은 지금 그대로거덩? 그럼 어케 되겠어? 뭘 고민혀? 10년 앞을 내다보는 사람이 되는 거지. 회사를 가봐. 보고서를 썼다 하면 무조건 되는거여. 초고속 승진! 뭔 말인 줄 알겠지?”
“그런 약 있으면 아저씨가 드시고 승진하시지 왜 공원에서 약이나 팔고 있어요? 대출받아 주식 사고 대박 나서 리무진 타고 다니셔야죠.”
“그러게 말여. 근데 나한테는 이 약이 쓸모가 없어서 말여. 난 지금처럼 사는 게 좋거덩.”
무튼 어찌저찌해서 난 그 약을 사서 먹게 된 것이다. 먹고 죽어도 괜찮겠다는 생각도 좀 들었다. 아내와 아이들, 어머니에게는 좀 미안하지만, 그냥 이렇게 살기에는 일분일초가 너무 힘들었다고 하면 이해가 좀 될까. 약을 먹을 때 그는 나에게 마지막으로 한마디 했다.
“내 말이 안 믿기지? 근데 진짜여... 한 가지만 명심혀. 세상 모든 걸 다 바꿀 수는 없는 거여. 자신의 힘으로 안되는 건 아무리 바꾸려 해도 안되는 거라구. 알면서도 어쩔 수 없는겨. 자네만 바뀌는 거여. 알겄지?”
내시경할 때 마취약이 몸 전체로 퍼지는 것처럼 스르륵 그 약을 먹고 잠이 들었던가. 쓰러졌던가. 술 퍼마시고 필름이 끊어진 것처럼 눈을 떠 보니 그 공원 그 벤치에 그대로 앉아 있고 휴대폰 전화벨이 울려대고 있었다. 그는 보이지 않았다.
“김대리, 어디야? 부장님 곧 오신다는데 지각하는거야? 성과평가 날 지각하는 놈은 너밖에 없을걸? 이미 다른 사람들은 옷 쫙 빼입고 자리에서 PT 준비하고 있다고.”
“오늘이 며칠이죠?”
“뭔 소리 하는 거야? 봉창 두들기는 것도 아니고. 오늘이 바로 2003년 7월 1일 아니냐? 승진 평가가 있는 날이고... PT는 다 된 거야?”
“아 일단 끊으세요. 사무실 바로 들어갈게요. 커피 사 간다고 조금 늦는다고 좀 해 주세요.”
일단 사무실로 가자. 내가 짤리지는 않았나 본데... 근데 이과장은 나보다 먼저 강제 명예퇴직 당하고 치킨집 차린 게 벌써 5년인데 사무실에 있다고? 나에게 전화를 걸었다고?
나보다 먼저 승진한 이과장은 그래도 나름 인간적인 품성으로 나를 챙겨주고 있었고 나는 그를 유일하게 회사에서 믿을 만한 친구라고 생각했었다. 그런 그가 회삿돈을 개인적으로 유용한 것이 발각되어 명예퇴직하는 것처럼 회사를 떠날 때는 나름 아군을 모두 잃어버린 것처럼 슬프기도 하고 그의 삶을 위로해 주기도 했었는데 말이다.
“여보”
“자기야. 민서와 시우는 학교 잘 갔어. 열은 좀 있는데 괜찮대. 아이들 걱정 말고 자기나 오늘 잘하고 와. 알았지?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보니 그가 나에게 판 약의 효과가 실감 나는 대화가 들려왔다. 정말 딱 10년 전으로 돌아갔다. 내 몸도 탱탱하고 아내와 아이들도 10년 전이다. 그럼 사무실도 그렇겠지? 조금은 촌스러운 회색 건물에다가, 앉아 있으면 엉덩이가 아픈 의자도 그대로겠지? 근데 정신은 그대로잖아? 그럼 오늘 내가 발표할 PT는?
그날 나는 PT를 하지 않았다. 아니 전날까지 준비했던 PT는 쓰레기통에 처박아 버리고 당당하게 조만간 있을 회사 합병을 언급하며 미래 그림을 슬쩍 던졌다. 부장들, 이사들 모두 놀라는 사이 속으로 난 승진이구나 흐뭇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아, 이제 내 삶은 탄탄대로다. 투자할 주식 몇 개 골라놓고, 대출받아 조만간 쭉쭉 값이 오를 아파트 몇 채 사고, 아이들에게는 공부 열심히 해야 한다는 잔소리도 그만하고, 테니스나 치고 건강관리 잘해야지. 내가 내년에 맹장 수술을 받던가 고지혈증에 통풍까지 생길 거니까 오늘부터 육류도 줄이고 술도 끊고 건강하게 살자. 정말 지루했던 삶을 마감하고 나다운 나로 살아가는 거다. 오늘부터 말이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한 번도 못 해본 아이들 선물을 사 가자. 첫째가 좋아하는 초코 생크림 케이크에 둘째가 좋아하는 레고까지. 집사람을 위해 소고기도 많이 사고 구워 먹으면서도 술은 안 마셔야지. 아이들이 안 좋아하니까. 아버지를 닮아 그동안 술을 너무 많이 먹었어. 아!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근데 오늘이 며칠이었지? 2003년 7월 1일? 갑자기 울리는 전화벨에 섬뜩해진다. 어머니 전화다. 받으면 안 되는 전화다. 아니 받아야만 했으나 그때는 술 마시느라 받지 못했던 전화였다. 어머니의 음성은 메시지에 남겨져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에나 확인했었다.
‘아비야. 니 아부지가 눈을 안 뜨신다. 숨소리는 들리는 듯한데 좀 이상타. 뭘 혀야 하나?’
“네. 어머니.”
“아비야. 니 아부지가 눈을 안 뜨신다. 숨소리는 들리는 듯한데 좀 이상타. 뭘 혀야 하나?”
아버지는 2003년 7월 2일 돌아가셨다. 아니 곧 돌아가신다. 근데 또 아버지의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고? 돌아가신 분을 또 돌아가시게 만든다고? 어머니의 한숨을 또 매일 들어야 한다고? 전화기를 내팽개치고는 집 대신 공원으로 달려갔다. 그를 만나야 했다. 알면서도 어쩔 수 없는 일들이라는게 이런 거였어? 공원에 달려갔을 때 그는 내가 앉아 있던 그 벤치에 내가 앉아 있던 자세와 똑같이 앉아 있었다.
“오늘 말이여. 이 공원에서 한 남자가 죽어. 아마 자살로 처리될거여. 새벽까지 술 마시다 전화기를 확인했더니 그 남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거지. 얼른 집으로나 가볼 일이지 무서웠던가 슬펐던가 힘들었던가 공원을 흐느적흐느적 걷다가 말여. 갑자기 주머니에 가지고 다니던 알약을 먹고 쓰러지거덩. 먹고 죽어도 괜찮겠다는 생각도 들었다던가......”
가만히 듣고 있던 내가 갑자기 미소를 지었던가 마취약이 몸 전체로 퍼지는 것처럼 스르륵 잠이 들었던가......
[2025.04.06. 김원중.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