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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난나 Mar 31. 2022

과거로부터 들려오는 목소리는 누구의 것, 사악한 목소리

2022년 3월 여성작가의 책 | 사악한 목소리 (버넌 리)


“사악한 목소리”는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시즌 1, 여성과 공포 시리즈 중 하나이다. 지난번에는 도러시 매카들의 “초대받지 못한 자”를 읽었고, 이번에는 버넌 리의 “사악한 목소리”를 읽게 되었다.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은 이미 다른 출판사 버전으로 읽었기에 조금은 생소한 작가인 버넌 리의 작품을 독서 모임에서 함께 읽게 되었다.

버넌 리라는 이름은 언뜻 들으면 성별이 짐작 가지 않는 중성적인 필명이다. 실제 이름은 ‘바이얼릿 패짓’이었던 그녀는 자기 삶 또한 어떤 하나의 성별로 규정짓기 어려운, 경계를 넘나들던 삶을 살았다. 실제로 그녀는 남자처럼 차려입고 여성과 깊은 관계를 맺었으며 영국인이지만 이탈리아에서 머물며 작품 활동을 했다. 소설가이자 미학자이기도 했던 그녀는 생전 유명했으나 사후에는 잊히게 되었는데, 이는 바로 전에 읽은 도러시 매카들을 떠올리게 했다. 버넌 리 본인이 전기를 저술하지 말아 달라고 하기도 했지만, 그녀가 반전주의자라는 이유로 영국에서 외면받았으며, 남성 위주의 학계에서 그녀를 아마추어 취급했고, 주로 여성과 교류했다는 점 때문에 그녀가 잊힌 것도 사실(성은애, 유령보기의 미학: 버논 리의 ‘유령 애인’)이다.

그녀의 작품은 그런 작가의 모습이 짙게 묻어난다. “사악한 목소리”는 그녀의 단편 소설인 ‘유령 애인’, ‘끈질긴 사랑’, ‘사악한 목소리’ 세 편이 수록된 소설집인데, 작품에서 독자에게 공포를 유발하는 근원은 어떤 하나로 정의되지 않는 존재라는 낯섦이기도 하다. 특히 ‘사악한 목소리’에서 사람을 파멸로 이끄는 목소리는 남자의 것도 여자의 것도 아닌 모호한 목소리로 묘사된다. ‘유령 애인’에서 또한 특이하고 매력적인 오크 부인이 등장하는데, 오크 부인은 자신과 동명이인의 선조에 푹 빠져 마치 그녀처럼 분한다. 그녀는 때로 남장을 하기도 했는데, 오크 부인은 그것을 따라 하며 좌중을 혼란에 빠트리기도 한다.

버넌 리가 그리는 여성 캐릭터는 전형적인 악녀처럼 보이지만 막상 자세히 살펴보면 그렇지만은 않다. 우리는 ‘미친 여자’ 이야기를 수도 없이 들어왔다. 하지만 ‘유령 애인’이나 ‘끈질긴 사랑’을 읽다 보면 정말 미친 게 여자가 맞나? 하는 의심이 든다. 여성이 미친 게 아니라 남성이 여성을 미치게끔 했고, 나아가 ‘미친 여자’나 ‘나쁜 여자’처럼 보이는 여성을 대하는 남성의 태도 또한 미쳐간다. 심지어 ‘끈질긴 사랑’처럼 죽음을 택하기도 한다. 그들의 어리석음이 독자의 눈에는 보인다. 정작 화자인 남성은 눈치채지 못하지만 말이다.

마지막으로 이 소설집에서 자주 등장하는 키워드는 ‘과거’다. ‘유령 연인’에서도 오크 부인은 2세기 전 살았던 자신과 동명이인인 여성에게 감정 이입하고, ‘끈질긴 사랑’에서는 트렙카라는 역사학자가 르네상스 시대 인물인 메데아에게 사랑에 빠진다. ‘사악한 목소리’에서도 마찬가지로 과거의 목소리에 천착하며 이를 ‘사악하다’라고 느낀다. 이를 보고 리의 유령소설은 과거의 역사와 현재의 미적 체험이 어떻게 연관되는지 탐구하는 기획이라는 해석을 보았다. (앞의 논문) 이처럼 리의 유령소설은 단순히 고딕 소설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리 본인이 치열하게 탐구했던 미학에 대한 본인의 철학이 담겨있었다. 2세기가 지난 지금, 17세기 자신과 동명이인인 여성을 쫓았던 오크 부인처럼 우리도 21세기에서 19세기 버논 리의 흔적을 쫓고 있게 될 것이란 걸, 리는 알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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