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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난나 Dec 29. 2021

역할극을 비틀어 보자, 여자다운 게 어딨어

2020년 3월의 여성작가의 책 | 여자다운 게 어딨어 (에머 오툴)

책속의 말

페미니스트로서, 우리는 다른 여성들의 선택을 가치판단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여성들의 선택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꼭 필요하다. 선택을 진정으로 아해한다는 것은 개인을 넘어 사회를 본다는 것이다. 우리가 태어나서부터 코카콜라나 나이키 운동화를 원하지 않았듯, 태어나서부터 가짜 가슴을 원하거나 무급 가사노동을 기본으로 하는 삶을 원하지는 않았다. 우리의 욕망과 기대는 상당 부분 사회에 의해 창조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개인으로서 사회적 기대에 부응하여, 혹은 반하여 행동할 능력이 있다. (p.71)
내게는 피부를 드러낼 자유가 있었지만, 규범에 맞는 여성적 의상을 입을 때 드러나는 나의 신체 부위들은 ‘여성화’되었을 경우에만 노출에 적합하다고 평가받았다. 그리고 여성화 과정에는 종종 돈과 시간을 들여야 했다.(중략) 여성성은 여성이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여성이 구매해야 하는 것이다. (p.226-227)
언어는 개인적이면서 정치적이다. 언어는 우리를 빚고, 세상을 빚는다. 말은 곧 행동이다. 말은 기대를 만들어내고, 행동을 수행한다. 언어에 함의된 젠더에 자신을 맞추기 어려운 까닭은 우리가 말로써 실제 의도하지 않은 일들을 여럿 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정체성은 수행적이므로 이러한 비의도적인 화행은 우리를 빚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될지를 결정한다. (p. 267)




사실 이 책을 산 지는 벌써 몇 년이 지났다. 사게 된 이유도 지금 생각해보면 조금 어이없다. 나는 당시 남자 선배들과 페미니즘에 대해 이야기를 하며 얼굴을 붉히곤 했고, 종종 ‘지나치게 흥분해’ 그들을 불편하게 했다. 책 선물을 해준다는 선배에게 마치 고집을 부리듯 ‘여자다운 게 어딨어’라는 제목의 책을 사달라고 했다. 그때 선배 얼굴이 어땠더라. 그럴 줄 알았다는 눈빛이었나?

부끄럽지만 막상 사두고 읽지는 않았다. 시간이 흐르고 이제야 꺼내든 책은 그때 읽었으면 더 좋았을걸 싶었다. 몇 년 전의 나에게는 이 책이 정말 새롭고 미지의 세계처럼 느껴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탈코르셋’ 운동이 더는 낯선 말이 아닌 지금, 이 책의 내용이 생각해본 적도 없는,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그만큼 몇 년 사이에 많은 것이 바뀌었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이 책의 저자인 에머 오툴은 아일랜드 출신이다. 아일랜드는 우리와 한참을 떨어져있지만 이 보수적인 가톨릭 국가는 유교 문화가 뿌리깊게 자리잡은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다. 장례식에서 여자들이 쉬지 못하고 음식을 나르는 것, 어디서 많이 본 풍경이 아니던가. 이 책이 쓰일 당시만 해도 아일랜드는 한국처럼 낙태가 금지된 국가였다. (새삼 많은 것이 변했다고 느낀다.) 저 멀리 떨어진 나라에서도 여자로 살아간다는 이유 하나로 이런 동질감을 느낄 수 있다는 건 신기한 경험이었다.

에머는 직설적이고 유쾌하게 자신의 경험을 풀어놓는다. 심지어 반 페미니스트 시절, 페미니스트라면 다들 한번은 겪었고 숨기고 싶을 시절의 이야기도 거침없이 고백한다. 에머는 젠더 이분법적인 사회가 기대하는 여성성을 수행하는 게 아닌, 사회적 구조 때문에 선택하게 되는 역할극을 비틀어보라고 제안한다. 에머처럼 겨드랑이 털을 기르고 나와 번쩍 들어올리며 TV 앞에 설 필요는 없다 해도, 내가 선택했다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 경험은 고통스러울 수도 있고, 해방으로 이를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에머의 톤이 무겁지 않다 해서 이 책의 내용 또한 그저 가벼운 것은 아니다. 에머의 경험 위주인 이 책은 분명 읽기 어려운 책은 아니나, 철학적으로 사유해 볼 거리가 없지는 않기 때문이다. 에머의 말처럼 ‘여자들이 여자가 되는 방식을 선택함으로써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말을 믿으며 과연 어떤 방식으로 이 역할극을 비틀어볼지, 내가 할 수 있는 투쟁은 무엇이 있을지 천천히, 그러나 꾸준히 고민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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