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이켜보건대, 내가 영화를 보고 공부하고 찍었던 역사들은 여성 혐오의 역사 그 자체다. 지금의 눈으로 생각해보면 단 한편도 두 다리를 뻗고 볼 수 있는 영화가 없다. 당연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머리가 깨이지 않았던 그 시절은 어떤 합리화의 연속성 위에 늘 놓여있었다. 영화 이야기를 하기 위해 예전에 써놓았던 글을 몇 개 찾아보며, '이런 생각을 했었다니' 내 스스로 소스라치게 놀랐다. 모니터 앞에서 몇 번이고 숨을 죽였다.
소위 '예술 영화'로 분류되는 영화들이 있다. 그것들은 흔히 <상업성을 배제한, 사회 부조리를 고발하는, 영화적 문법을 비트는, 발칙한 문제작>과 같은 수식어들을 가진다. 사실 영화 콘텐츠를 준비하면서 가장 먼저 생각났던 영화는 프랑수아 오종의 <Water drops on buring rock>이었다. 촬영 당시 대다수의 사람들이 알 법한 영화만 언급해도 시간이 부족했기에, 오종의 영화는 다소 마이너해 언급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아직 이 영화가 맴돈다. 하도 본 지가 오래되어 전부 다 기억나지는 않는데, 두 명의 여자와 두 명의 남자가 카메라 정면으로 나란히 서서 춤을 추는 시퀀스가 생각난다. 그런데 그 장면에서 가장 어린 여자만 홀로 속옷 차림이다. 영화는 퀴어 영화를 표방하며 수많은 영화들이 그토록 좋아하는 '개방적인 성'에 대한 고찰을 내세우지만 그 스틸컷만 생각해보아도 가장 낮은 권력이 어디에 있는지 뚜렷하게 알 수 있다.
△ 프랑수아 오종, <Water drops on burning rock>
정말 혹시나 해서 덧붙이지만 100% 볼 필요 없는 영화입니다.
유럽, 특히 프랑스 예술 영화들은 항상 그랬다. 늘 여성의 신체를 가감 없이 보여주는 것이 영화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상위의 개념인 듯, 여성의 가슴 정도는 아무렇지 않게 내보였다. 대표적으로 국내에도 뚜렷한 팬층이 있는 <몽상가들>이 그랬고, <셰임>이 그랬다. 성에 집착하고, 성적인 욕구를 주체하지 못하는 남자가 주인공이 되면 영화적 평론은 이내 '성에 대한 고찰'로 바뀐다. '진정한 사랑이란 무엇인가?', '진정한 섹스란 무엇인가?'
한편, 문제 있는 남자들이 주인공일 때는 늘 여성이 그 삶을 바꾸는 도구가 되거나 그 악행을 받아내기 바빴다. 대표적으로 <버팔로66>, <나는 엄마를 죽였다>와 홍상수의 갖은 영화들이 생각난다. 언급했던 영화들 모두 그들이 주장하는 '예술성'을 토대로 마니아층이 탄탄한 영화다.
한 때는 그런 표현들이 예술적이라고 느꼈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그건 세뇌였다. 그런 일련의 시퀀스들을 내 안에서 예술적으로 소화하지 못하면, 아니 소화해내지 못하면 나는 예술성이 없는 사람이 될 것처럼 느꼈다. 때문에 영화를 보며 불편함을 느껴도 그것을 피력할 겨를도 없이 뇌 안의 프로세스는 그것을 금방 예술로 치환했다. 이건 모두 내 저변에 깔린 가스 라이팅의 결과였다. 이건 예술이야. 이건 예술이야.
방금 이 문장을 쓰고 나니 불현듯 <셰임>의 첫 장면이 생각난다. 마이클 패스밴더의 성기가 적나라하게 처음부터 등장하는데, 처음 그 장면을 봤을 때 나는 분명 흠칫했지만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혼자 영화를 보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보기 싫으면 안 보면 되는 것인데도 나는 꾸역꾸역 그런 것들을 참았다. 똑바로 직시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나와 같은 과정을 겪었던, 혹은 겪고 있는 여성들이 태반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사고는 정말, 무척이나 흔한 일이었다.
아래는 실제로 내가 이마무라 쇼헤이의 붉은 살의(1964)를 보고 작성했던 2015년의 글의 일부다.
사다코(여성 주인공)를 강간하고 죽이려 했던 히라오카의 살의가 결국 사다코의 잠재되어있던 욕망을 깨어나게 했다는 점에서, 영화를 지배하고 있는 살의는 긍정의 의미로 볼 수 있다. 사다코를 억누르고 있던 가부장제의 관습이 해제될 때 비로소 터져 나온 그녀의 욕망은 일본의 전후 세대 여성성을 그린다. 또한 이것은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에서 대표되던 여성의 전형적인 삶, 가족애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것은 오즈의 다다미샷을 그대로 차용하는 듯하면서도 그 안에서 전개되는 장면들이 가부장제에 반하는 내용들을 담고 있어, 기존의 관습에 저항하려는 감독의 의도가 그대로 묻어난다. 더욱이 그녀가 강간을 당하고 방황할 때 카메라를 위로 올려 그녀를 찍어 내리던 샷이나 벗은 몸을 적나라하게 풀샷으로 담아내는 앵글은 이러한 의도에 힘을 실어준다.
영화에서 중요하게 쓰인 미장센은 단연코 영화의 타이틀이 뜨던 때부터 등장하는 두 마리의 쥐다. 철장 안에 갇혀 끝없이 쳇바퀴 만을 돌리는 쥐의 모습으로부터 사다코의 삶이 어떠했고, ‘별 일 없으면’ 어떻게 흘러갈 것인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비유는 절망적이기까지 하다. 그러나 한 쥐가 다른 한 마리를 죽이고, 뻥 뚫린 쥐 속을 들여다보는 아들의 불편한 클로즈업이 지나면 사다코는 성욕에 따라 행동하기 시작한다. 이때 내러티브는 결코 사다코의 행위를 나쁜 치정으로 보이게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십 년 넘게 다른 여자와 내연 관계를 맺고 있던 남편의 행위를 교차 편집해 ‘정당방위’처럼 보이게 한다. 심지어 사다코에게 권위적이던 남편이 내연 관계 속에서는 약자의 입장으로 그려지면서, 위선적이면서도 병약한 남자의 모습이 제시된다. 역전극이다.
이것은 그야말로 '있어 보이게' 깔아놓은 영화적 장치에 그대로 속아 넘어간 불쌍한 과거다. 정말 부끄러운 과오다. 이런 글이 한 두 개가 아니다. 놀랍게도 <시계태엽오렌지>를 긍정하는 글도 있다. 영화적 충격을 받고 싶으면 볼만 하다는 식으로 짧게 적혀있었는데, 발견 즉시 입을 틀어막았다. 동시에, 이렇게 바뀐 내가 현실을 살고 있어 참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긴 세월은 아니지만, 해가 여러 번 바뀌면서 참 많은 것이 뒤집어졌다.
'앞으로는 무슨 영화를 보면서 살아갈까.'
이 글을 마칠 생각을 하다 보니 이런 궁금증이 든다. 앞으로 웬만해서는 영화관에 돈을 쓰지 않는 똑똑한 여성들이 점점 더 많아질 텐데, 시류가 바뀌고 페미니즘에 반하는 말이 부끄러운 것이 되는 세상이 왔을 때 우리가 어떤 미디어를 소비하고 있을까. 그런 세상에 한 번도 살아보지 않았기에 일말의 기대감이 생긴다. (갑자기 훈훈한 마무리)
▼ 발행 콘텐츠 <문제작이 아니라 문제, 그때도 틀리고 지금도 틀리다 (스포有) | 영화 속 여성 혐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