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위험 지구에서 에펠탑 앞까지
배낭 멘 여행자들
여행 전, 몇 리터의 배낭을 들고 가야 할지 고민이 참 많았다. 우선 촬영용 삼각대가 큰 부피를 차지할 것이 자명했고, 겨울철 여행이라 옷의 부피들이 상당한 압박감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원래 약 40L짜리 배낭이 있었기 때문에 더 큰 배낭을 사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은 점점 더 커져갔다. 결국 장고 끝에, 추가로 5L를 더 탑재할 수 있는 60L 배낭을 구매했다. 20% 세일하는 제품을 발견하여 겨우겨우 구매한 배낭이었다.
그리고 여행 전날, 나는 크게 안도했다. 새로 배낭을 사지 않았다면, 여행을 못 갔을지도 모른다. 삼각대가 배낭의 1/4이었기 때문에.
왜 우리는 묻고 따질 것도 없이 배낭을 선택했을까?
사실, 정말 촬영장비가 많고 짐도 많은 장기 여행이라면 캐리어가 정답일 수도 있다. 렌즈를 보호하기 위한 박스가 겸비되어야 하고 여러 가지 촬영 액세서리를 챙기다 보면 한도 끝도 없이 늘어나는 게 촬영용 짐이기 때문에 그렇다. 하지만 우리는 최대한 '가성비'있게 촬영용 짐을 꾸렸기에, 캐리어는 선택지에서 일찌감치 탈락했다. 묻고 따질 것도 없이 당연히 배낭을 선택했다.
그리고 배낭을 멨다는 건, 지난날 여행지의 꾸밈 노동에서 벗어나는 일종의 상징적인 행위였다.
'배낭+여행'이라는 합성 명사가 지닌 그 뜻을 드디어 온전히 실천하기 위해, 나는 배낭을 멨다. (캐리어여행이라는 말은 없잖아?)
배낭을 메고 여행을 가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2015년 유럽여행에서도 시작은 배낭이었다. (나중에 짐이 많아져서 캐리어를 샀지만.) 2016년 베트남을 호치민에서 하노이까지 훑었을 때도, 앞서 언급했던 40L짜리 배낭을 멨었다. 하지만, 그 안엔 화장품과 고데기 그리고 원피스가 들어있었다. 베트남 여행을 갔을 때는 머리가 무척 길어서 헤어 에센스까지 들고 갔던 걸로 기억한다. 2017년 말, 세부에 갔을 땐 한 쌍에 20만 원이 넘는 귀걸이를 담을 파우치까지 챙겨갔었다. 지금에서야 생각해보건대, 파란 원피스와 배낭은 정말 모순 그 자체였다. 나는 여행지에서 예쁘고 싶은 마음과, '배낭여행'이라는 이름이 주는 젊고 힙한 이미지는 놓치기 싫었던 것이다. (아마 캐리어를 끌고 동남아를 다니는 여자가 아니라는 개념녀 짓을 하고 싶었던 것 같다.) 여행지에서 헐값에 주고 샀던 거적데기 원피스와 여행자들의 배낭은 아무리 생각해도 어우러지지 않는다. 두 가지를 억지로 합치려고 애썼던 지난날의 노력이 허망하기까지 하다.
때문에, 이제야 나는 정말로 '배낭여행'을 떠나게 된 것이다. 몸에 지닌 그 어느 것도 거칠 것이 없는 진정한 배낭여행.
파리는 에펠탑 하나면 충분하다
수많은 유럽의 도시들 중, 파리를 첫 번째 여행지로 선택했던 이유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로, 인천에서 직항으로 들어가는 도시들 중 가장 가격적으로 만만했고, 두 번째는 동행자가 '에펠탑'이라는 랜드마크를 보길 원했기 때문이었다.
이 같은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우리는 에펠탑 지척의 에어비앤비에 자리를 잡았다. 처음부터 다른 구는 눈길도 주지 않고, 무조건 에펠탑 근처의 구를 뒤졌고 하루에 약 10만 원 정도의 숙소를 어렵사리 찾아 예약했다. 에펠탑이 코 앞에 있다는 것 빼고 그렇게 좋은 숙소는 아니었다. 무려 8층인데도 엘리베이터가 없는 건물이었고, (배낭 메고 올라가다가 저세상 갈 뻔했다.) 시설도 가격 대비 무척 좋은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에펠탑 근처라는 큰 메리트 하나만 보고 선택했기에 그 점에서는 무척 훌륭한 곳이었다. 덕분에 우리는 파리에 있던 내내 에펠탑을 지겹도록 봤다. 숙소를 나갔다가 들어오면 그냥 눈 앞에 에펠탑이 있던 셈이니까.
에펠탑을 볼 때마다 느꼈던 격세지감
2015년 파리를 방문했을 때, 에어비앤비 두 곳에서 묵었는데 한 군데가 무려 위험지역으로 분류되는 곳이었다. 심지어 자리를 잡은 나중에야 그 사실을 알았다. 당시 여행은 성수기임에도 불구하고 유럽 남부에서 위로 올라가며 즉흥적으로 숙소를 구하던 스타일의 여행이었기에 위험 지역을 꼼꼼히 알아보지 못했던 탓이 컸다. 때문에 해가 지고 동네가 어두워지면 마음속으로 큰 불안을 안고 다녔다. 에펠탑과의 거리는 대중교통으로 약 1시간이었다. 다른 유명 여행지와도 거리가 굉장히 멀었다. 그때부터 숙소의 위치가 정말 중요하다는 큰 깨달음을 얻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은 반드시 돈과 직결되는 문제였다. 마음먹은 대로 쉽게 해결할 수 있는 사안은 아니었다.
그로부터 약 3년 반 뒤, 에펠탑 앞에 입성했다. 영상에서도 나오지만, 에펠탑을 실제로 본 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구글맵을 따라 숙소 근처에 도착하자마자 정말 놀랐다. 코너를 도니 숙소와 에펠탑이 한눈에 들어왔다. 동시에 '나... 나 조금 놀랐어.'라며 말을 더듬었다. 위험지역에서 에펠탑 앞까지 진출했다니, 내가 이 만큼 컸다는 사실에 말을 더듬었을 것이다. 내 힘으로 여길 다시 왔다니, 내색은 전혀 안 했지만 울컥하기도 했다.
'인생샷 없는 인생여행'
이제 여행에서 인생샷 따위는 필요 없다. 언제부턴가 인증샷이라는 말이 인생샷으로 바뀌더니, 순식간에 인스타 감성의 인생샷이 한국 여행자들에게 들이닥쳤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 인생샷이 무엇인지는 글을 읽는 분들 모두 아시리라 생각한다.) 나 역시도 그 바운더리 안에 있었다. 동행인이 찍어주는 사진에 만족하지 못해 울상이 되는 경우가 다반사였고,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이 곳에서 인생샷 하나를 남겨야 한다는 생각이 사명감처럼 들기도 했다.
사진이 뭐길래. 내가 여행지에 다녀온 것을 추억으로 남긴다면 그것은 말 그대로 내가 그 장소에 있었다는 '인증샷'으로 족했어도 될 텐데 나는 어느새 '인생샷'에 집착하고 있었다. 연속으로 10장씩 찍기는 물론이고, 후보정도 빡세게 했다. 찍고 나서 그 사진을 볼 때도 첫 번째로 시야가 향하는 곳이 그 도시의 인상이 아니라 내 다리, 얼굴 밝기, 표정, 각도, 손짓, 발 끝, 모든 신체를 파편화하여 사진 당 점수를 매겼다. 그러면서도 무심히 찍은 척, SNS에 사진을 업로드했다. 나 말고도 숱한 여성들이 겪었을, 겪고 있을 이야기일 것이다.
돈을 들여 해외에 나가서까지 내 신체를 파편화하는 것. 에펠탑을 보는 것이 아니라 에펠탑을 등지고 앉아있는 내 허리의 굵기와 머리카락의 놓임 새를 살펴보는 것. 모두 내가 내 자신에게 열심히 했던 일이다. 내 자신이 에펠탑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내가 그곳에서 무슨 감정을 느꼈는지, 정말 놀랍게도 2015년 파리의 기억이 없다. 센 강 앞에서 찍었던 사진만 남아있을 뿐이다. 물론 그것을 실패한 여행이라고 부르고 싶지는 않지만, 적어도 내가 이제야 진정한 '배낭여행'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게 깨달았다. 2019년이 되어서야 진정한 여행을 시작한 것이다.
디폴트립 : [명사] Default Value+Trip, 사회가 정한 허구의 여성성을 벗어던진 디폴트인의 여행.
그리고 남은 사진들
앞으로 절대 찍을 일 없는 애티튜드의 여행 사진. 비교해보며 글을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