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이것은 소리 있는 달리기.

by librehee


한 해의 마지막달이 되니

올해는 또 어떻게 보냈는지 정리하고 싶어졌다.
심플한데 단단한 삶이 담겨있는 마스노 슌묘 스님 책도 꺼내서 훑어보고 적어놨던 일기들도 다시 읽어본다.

나이키 러닝 기록들도 쫙 보며 달린 날들을 돌아본다.
안 입었던 옷, 책, 효용을 다한 물건들까지
버리고 비워가며 천천히 새해를 준비하고 있다.

뭔가 지금 달라지고 싶거나 불안이 고개를 들면
몸과 마음을 비우고 루틴을 다시 세운다.
그런데, 루틴이 있는 게 좋으면서 어떨 때는
지루하다. 반복됨이 뿌리를 만들어 주기도
하지만 계속 같은 것을 하면 뒤로 가는 컨베이어 벨트에
올라탄 기분이다.

올해 깨달은 건 루틴도 큰 틀은 그대로 두고
세부적인 내용은 바꾸거나 같은 것도
새롭게 시도하는 게 훨씬 재밌다는 거다.
매일 앉아서 하던 명상을 누워서 하거나
매일 아침 마시는 커피를 말차로 바꾸는 식이다.
'그게 뭐 별 거라고' 할 수 있지만 원래 별 거는
별 거 아닌 데서 나오는 법.

이번엔 음악 비트에만 의지하던 달리기를

음악 없이 해보기로 했다.

우울한 날엔 쾅쾅 울리는 음악에 의지한 채 신나게
발을 디뎌나가는 나에게 이건 큰 도전이다.
거리 안내는 들어야 해서 골전도 이어폰을 착용했다. 횡단보도에 서있는데 역시 뭔가 심심하고
중요한 걸 집에 두고 온 것 같은 찜찜함이 있다.
지나가는 자동차소리도 되게 크게 들린다.
재생 버튼을 누르고 싶은 충동을 누르며

자주 달리는 코스로 나갔다.

확실히 흥이 없으니 페이스가 느리다.
발이 슬로 모션처럼 움직인다.
빠르게 달리려고 나온 것도 아니고
누가 시킨 게 아닌 자발적인 나와의 약속이니
'에라 모르겠다'란 자세로 호흡을 다시 고른다.
삼삼오오 산책하는 어르신들의 혈당이야기가 들려온다.
'운동도 하시고, 건강이야기도 하시다니 부지런하시네'
갑자기 우는 오리에 깜짝 놀라기도 한다.
제일 당황스러웠던 건 내 호흡.
음악에 취해서 제대로 듣지 못했던 거친 숨소리가
생각보다 컸다. 헉헉거리는 동물 같달까?
'원래 이렇게 컸었나? 마스크 껴서 그런 거겠지?'
이런저런 핑계를 대다가 옆에 사람이 지나가면
민망해서 잠시 숨을 멈추고 재빠르게 달렸다.

양팔이 번갈아 움직이는 소리,
지면과 러닝화가 만나며 내는
리듬, 물 흐르는 소리에 집중해 봤다.
그리고 음악 없이 9km를 달리는 새로운 도전을 끝냈다.
처음엔 어색했다. 1km씩 거리가 늘어날수록

음악이 사라진 자리엔 새로운 소리들이 들어왔고

오히려 차분하고 정신이 명료해졌다.
거칠게 내뿜던 숨도 내 것이며 나로부터 나온
것들이니 점점 부끄럽지 않았다.
현재 순간에 나와 내 주변을 인식하는 처음 시도해 본
달리기였다.
음악을 들으며 달리는 게 여전히 좋긴 하다.
음악 없는 러닝도 종종 하려고 한다.
이건 온전히 내 몸 리듬과 호흡하는 다른 장르에
달리기라는 걸 알게 됐기 때문이다.

아. 이것은 소리 있는 달리기.
그러나 마음은 어떤 달리기보다 조용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