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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뀨냥 Sep 09. 2024

타인은 타인일 뿐

   장애가 생기고 나서 가장 크게 와닿은 감정은 '외로움'이었다. 그건, 주변에 사람이 적든 많든 상관없이 본질적으로 다가온 감정이었다. 가족과 친구가 공감하고 함께 울어주어도 결국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은 나였다. 주변에서 보내오는 마음과 격려가 아무리 단단한들 스스로가 꺾이면 소용없는 거였다.


  결국 내 삶을 이끌어 나가는 것은 나였다. 내 감정을 책임져야 하는 사람도 나였다. 사람이 큰일을 으면 세상을 보는 눈이 좀 더 넓어진다고 했던가. 나는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나의 경우는 세상이라기보다는 사람을 보는 눈이 이전과는 조금 달라졌다.


   관계에 있어서 가장 충격은 나의 불행을 양분 삼아 자신의 행복을 키워 나가는 사람이었다. 사실 그는 평소에도 불평불만이 많은 사람이었다. 자신의 외모와 형편을 끊임없이 주변과 비교했다. 타인을 통해 자신의 자존감을 채우려는 유형이었다. 사람이 내가 쓰러지고 나서 나를 비웃은 것을 알게 되었다. 상대할 가치도 없었기에 조용히 사람을 밀어냈다. 조금 일찍 그의 손을 놓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내게 좋은 일이나 축하할 일이 있을 때에도 축하를 방패 삼아 나의 장애를 걸고넘어지는 이들이 있었다. 말로는 축하한다 하면서 꼭 한마디를 덧붙인다. '그 몸으로 괜찮겠어?' '약은 끊었어?' '무리하지 말고 포기하는 게 어때.'라고. 내가 바보가 아닌 이상 진심 어린 걱정과 걱정을 빙자한 떠보기는 구분할 수 있었다.


  그들은 꼭 내가 당연하게 불행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네가 지금 행복하다고? 그럴 리가 없을 텐데? 정상인인 나도 이렇게 아등바등 힘든데, 장애가 있는 네가 행복하면 반칙이잖아.' 이런 생각을 하는 이가 아예 처음부터 모르는 타인이 아닌, 나와 어느 정도 관계를 맺은 이라는 게 더 끔찍했다.


  학교에서 일할 때는 끊임없이 내 외모를 트집 잡는 교직원이 있었다. 그 여자는 나를 보면 '얼굴이 부었는데 약 때문인가?' '선생님 뒤에 머리가 많이 빠졌는데 그것도 부작용이에요?' '선생님 얼굴이 누가 봐도 아픈 사람이네.' 하며 마주칠 때마다 외모지적을 했다. 한창 외모로 스트레스를 받던 때에는 그의 말 하나하나에 분노했지만 지금은 그런 말을 들으면 오히려 씩 웃고는 '괜찮아요! 좋아지고 있어요.'라고 말하며 자리를 뜬다.


  꽤 오랜 시간을 함께했던 모임에서 한 명이 내게 '그런데 시댁은 괜찮대?'라고 물었다. 처음에는 그 의도가 이해되지 않아서 '뭐가?'라고 되물었다. 이에 모임의 다른 구성원이 '아니 너 결혼하고 많이 아프고 힘드니까 시댁에서 안 좋게 보지는 않나 하고.' 하고 대답했다. 시댁에서는 전과 다름없이 나를 사랑해 주시지만, 굳이 답변하고 싶지 않았을뿐더러 왜 그런 게 궁금한 건지 의아해 고개를 갸웃했다.


  진짜 나를 소중히 생각하는 이들이라면, 내가 장애가 있든 없든 한 사람으로서 행복하고 평온하길 바라야 하는 거 아닌가. 하지만 왜 당연히 내가 불행할 것이라 생각하는 걸까. 내가 불행한 것이 그들의 삶에 도움이 되는가. 그래서 나는 말한다. '타인은 타인.'이라고.


  비혼주의인 지인이 미래에 대해 이야기하며 '마음에 맞는 친구들이랑 여행도 가고, 늙으면 실버타운에 들어가 살 거야.'라고 이야기했다. 예전 같았으면 나도 '오, 자유롭고 멋진 삶! 응원합니다!'라고 했을 거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마음이 꽤나 삐뚤어져 있었기 때문에 '사람 너무 믿지 말아요 언니.'라고 대답하고 말았다. 언니의 표정이 살짝 구겨졌지만, 그때의 내 진심은 그랬다. 각자의 가치관을 존중하는 것에 앞서서, 타인과 친구가 나의 삶을 챙겨주거나 진심으로 응원한다는 것을 의심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성선설이 옳은지, 성악설이 옳은지는 모르겠다. 다만 세상에는 생각보다 음흉하고 질투가 가득한 사람이 많다는 것을 느꼈다. 웃고 있는 가면 뒤의 표정들은 정말 다양했다. 굳이 그들 앞에서 괜찮은 척 연기를 하며 자존감을 세우고 싶지도 않았기에, 조용히 내 삶에서 썩어버린 인맥들을 잘라내는 것부터 시작했다.


  정말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단 한 명의 친구를 제외하고 '힘들다.'는 말을 굳이 꺼내지 않았다. (그나마 이 친구 한 명이라도 있어서 마냥 실패는 아닌 삶이라고 위안한다.) 나의 힘듦이 누군가에게는 즐거움이 되었고, 약점이 되어 나를 공격했다. 힘들다는 말을 들어주는 이는 신경정신과 선생님과 남편이면 충분했다. 내가 모르는 나의 이야기가 돌고 돌고, 나의 이야기가 단지 씹기 좋은 수다거리가 되는 일에 환멸을 느꼈다. '사람은 참 악하구나.' 그런 생각들을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른다.


  지금도 굳이 불필요한 관계를 맺지 않는다. 직장 내에서도 딱 몇 명의 인연들과만 관계를 맺는다. 그리고 이들 또한 언젠가는 뿔뿔이 흩어질 시절인연임을 내심 생각한다. 인간관계 좌우명 첫 번째. 기대하지 않는다. 두 번째. 나를 너무 드러내지 않는다.


  '난 그래도 친구 많은데? 친구랑 노는 게 제일 재미있는데? 너무 비관적인 거 아냐?'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겠다. 먼저, 그런 인연을 갖고 있는 분들께 많은 부러움과 박수를 보낸다. 타인과 타인이 그런 관계를 맺기까지 얼마나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했겠는가.


  그러고 나서 냉정하게 생각해 보길 바란다. 내가 스스럼없이 나의 바닥과 깊은 내면까지 그 사람에게 보여줄 수 있는지. 나의 감정을 그 사람이 부담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을지. 내가 그에게 질투의 대상이 되지는 않을지. 나의 행복이 그에게 불행이 되지 않을지 등등을. 조금이라도 주저하게 된다면 생각해 보길 바란다.


  내가 정말 죽고 싶었던 그날, 내가 먼저 스스럼없이 전화를 걸고 연락할 수 있는 '타인'은 없었다. 타인은 나의 우주가 아니다. 그저 타인은 타인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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