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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거짓말의 거짓말 Nov 16. 2019

블랙티 by 야마모토 후미오

22p

나는 두려웠다. 

많은 사람들 속에서 분명하지 않은 상대의 마음을 사로잡거나 연애를 하는 것이 두려웠다. 기대하고 또 기대하다가 마지막까지 한 송이 장미도 받을 수 없을지 모르는 인생이 두려웠다. 


34p

내가 여자와 함께 사는 것은 처음이다. 물론 그녀도 남자와 함께 사는 일은 처음이다. 

나쁘지 않다. 조금도 나쁘지 않다. 

나는 대롱대롱 편의점 봉투를 흔들며 건들거리듯 걸었다. 

여자는 당사자뿐만 아니라 그녀가 지닌 물건에서까지 좋은 냄새가 난다. 칫솔에서도 파자마에서도 손거울에서도 곰인형에서도, 모두 좋은 냄새가 난다. 

게다가 뭐니 뭐니 해도 깔끔해서 좋다. 개수대에 사용한 접시가 쌓인다거나, 내놓는 것을 잊어버린 쓰레기봉투로 부엌을 점령 당한다거나, 오디오에 먼지가 쌓이는 일이 없다. 

날씨가 좋은 휴일에 파란 하늘 아래 빨래가 펄럭거리며 날리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아, 정말로 여자란 좋은 거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51p

여자가 느끼는 진정한 절정은 침대 안에 있는 게 아니다. 그것은 많은 사람들 속에서 주인공이 될 때 찾아온다. 

오늘, 나는 결혼을 한다. 


54p

그가 천천히 일어나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오늘부터 나는 이 손에 기대어 살아가게 된다. 그가 나를 구원해주었다. 크고 넓은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는 나를, 커다란 크루저에 타고 있던 왕자님이 튜브를 던져서 구해준 것이다. 

온 세상의 모든 신에게 감사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63p

긴장한 그를 편하게 해주려고 나는 시시한 얘기들을 늘어 놓아서 그를 웃게 만들었다. 이렇게 웃어보기는 참 오랜만이라고 그가 말했다. 나는 순진한 그의 말과 웃는 얼굴을 보며 가슴이 조금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76p

불량한 딸을 갱생시키는 방법, 혹은 아이를 비행 청소년으로 내몰지 않는 방법을 현역 고등학생인 나는 알고 있다. 부모가 불행해지면 되는 것이다. 아이는 그것을 보고 '저렇게는 되지 말아야지' 하고 마음속으로 맹세할 것이기 때문이다. 


101p

평생 이대로 혼자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서른 살이 된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102p

그는 나보다 여섯 살이나 아래였지만, 우리는 순식간에 연인 사이가 되었다. 그는 지금까지 알았던 다른 남자들과 모든 면에서 달랐다. 매우 적극적인 성격이라서 영화를 보러 가자, 밥 먹으러 가자, 하며 나를 불러냈다. 마감이 촉박해 만날 수 없을 때는 아이처럼 뿌루퉁해지기도 했다. 

아아, 어쩌면 나는 누군가가 내게 그렇게 해주기를 바랐던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진심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쿨한 척 '나는 남자보다 꽃을 더 좋아해'라는 얼굴로 혼자 사는 것에 대해 줄곧 변명을 해왔지만, 사실은 '둘'이 되고 싶었던 것이다. 


121p

하지만 누나처럼 얼굴이 귀엽고, 마음이 여러 보이는 여자 아이를 괴롭혀보고 싶어 하는 그들의 기분을 아주 조금은 알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우리 반에서도 가장 귀여운 여자아이는 여자애들한테 별로 인기가 없다. 두 번째로 귀엽고 남자처럼 씩씩한 아이가 모두에게 인기가 많다. 


137p

여자로 태어난 것을 후회하는 여자만은 되고 싶지 않았다. 

실제로 나는 여자로 태어난 것을 행운이라 여겨왔고, 여자라는 이유로 손해를 본 경험도 특별히 없었다. 

나는 내가 여자라는 사실이 좋았다. 

왜냐하면, 당신에게 안길 수 있으니까. 


144p

옆에 앉아서 만족스런 얼굴로 아이스크림을 먹는 그 아이. 서로 사랑해서 태어난 스미코와 그녀 남편의 아이. 

섹스라는 것은 본디 이런 생명을 창조하는 방법이었던 것이다. 나는 뜻밖에 감동해서 그 자그마한 생명체를 지켜보았다. 

코끝이 찡했다. 


167p

"언니는 정말로 닭대가리인가 봐." 

빨갛게 물든 화장 솜을 쓰레기통에 버리며 동생이 불쑥 말했다. 나는 찻잔을 잡으려고 뻗던 손을 멈추었다. 

"뇌가 말이야. 아주 작은가 봐. 그래서 볏을 한 번 흔드는 순간, 몽땅 잊어버리는 거지. 틀림없어."


169p

"너, 오늘이 무슨 날인지 기억해?"(중략)

"......무슨 날이었지?"

"우리가 처음 사귀기 시작한 날이잖아."

그런 걸 기억하고 있다니 여자아이같이 말이야, 하고 여자아이인 나는 생각했다. 


197p

"사람에게는 저마다 마음이란 게 있는 거야. 그런데 너는 결국 너만 좋으면 되지? 좋으면 다가왔다가 싫으면 헤어지면 그만이고. 그게 뭐가 나쁘냐고 생각하겠지. 나랑 잔 그 침대에 다른 남자를 끌어들이고도 죄책감 같은 거 전혀 안 느끼지?"


*저자후기


223p

아직 한 줄도 쓰지 않았으므로, 내 실력이 어떤지도 몰랐다. 그래도 꿈만은 어처구니없이 컸다. 작가가 된다는 것은 매스컴에 이름이 알려진다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나쁜 짓을 할 수 없게 된다는 얘기였다. 그렇다면 본명을 쓰면 곤란하지 않을까. 

순간적으로 생각한 게 그거였다. 


225p

죄라는 이름의 지뢰는 우리 주변 구석구석에 파묻혀 있다. 지금까지 밟지 않은 것은 단지 운이 좋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 행운이 언제까지 계속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렇지 않으면 일부러 지뢰를 파서 밟아버리는 일이 생길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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