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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거짓말의 거짓말 Feb 05. 2020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by 무라카미 하루키

요약하자면 30년 이상 소설을 써 온 하루키는 자신이 비범한 재능을 타고 났다기 보다는 약간의 운과 꾸준한 노력을 통해 지금의 위치에 있게 됐다고 말한다. 어딘가에서 그가 스콧 피츠제럴드의 말을 인용해 '우리가 정말 조심해야 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평범하다고 말하는 사람'(기억에 의존해 쓰다보니 정확하지 않지만)이라는 취지의 말을 한 적이 있는데 어디까지나 그런 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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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소설이라는 장르는 누구라도 마음만 먹으면 쉽게 진입할 수 있는 프로레슬링 같은 것입니다. 로프는 틈새가 넓고 편리한 발판도 준비되었습니다. 링도 상당히 널찍합니다. 참여를 저지하고자 대기하는 경비원도 없고 심판도 그리 빡빡하게 굴지 않습니다. (중략) 하지만 링에 오르기는 쉬워도 거기서 오래 버티는 건 쉽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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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시점에 '날카로운 면도날'을 '잘 갈린 손도끼'로 전환하는 게 요구됩니다. 그리고 좀 더 지나면 '잘 갈린 손도끼'를 '잘 갈린 도끼'로 전환하는 게 요구됩니다. 그 같은 몇 가지 전환 포인트를 뛰어넘은 사람은 작가로서 한 단계 거물급이 되고, 아마도 시대를 뛰어넘어 살아남을 것입니다. 뛰어넘지 못한 사람은 많든 적든 도중에 자취를 감추게-혹은 존재감이 희미해지게-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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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그런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 그걸 분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대답은 단 한 가지, 실제로 물에 뛰어들어 과연 떠오르는지 가라앉는지 지켜보는 수밖에 없습니다. 난폭한 말이지만, 인생이란 원래 그런 식으로 생겨먹은 모양이에요. (중략) 링에, 어서 오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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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처럼 '회사에 취직하고 싶지 않다' '사회 시스템에 꼬리를 흔들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곳곳에서 작은 가게를 열었습니다. 찻집, 레스토랑, 잡화점, 서점, 우리 가게 주위에도 비슷한 세대의 사람들이 경영하는 가게가 몇 군데나 있었습니다. 운동권 출신인 듯한 혈기 왕성한 이들도 근처에 자주 출몰했습니다. 자신에게 맞는 빈틈을 잘 찾아내면 그걸로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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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들이 공통적으로 느꼈던 것은, 혹은 태도로서 표명하고자 했던 것은 아마도 '참된 작가에게는 문학상 따위보다 더 중요한 것이 아주 많다'라는 것이겠지요. 그 하나는, 자신이 의미 있는 것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실감이고, 또 하나는 그 의미를 정당하게 평가해주는 독자가-그 수의 많고 적음은 제쳐두고-분명하게 존재한다는 실감입니다. 그 두 가지 확실한 실감만 있다면 작가에게 상이라는 건 어떻게 되든 상관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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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좋은 독자입니다. 어떤 문학상도 훈장도 호의적인 서평도 내 책을 자기 돈 들여 사주는 독자에 비하면 실질적인 의미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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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누군가의 작품(후보작)을 비판하고, 거기에 대해 "자, 그러는 당신의 작품은 어떻지요? 그렇게 잘난 소리를 할 입장입니까, 당신이?"라는 질문이 날아온다면 나로서는 대답할 말이 없어져버립니다. 실제로 그 말이 맞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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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삼십오 년 동안 계속해서 소설을 써왔지만 영어에서 말하는 '라이터스 블록writer's block', 즉 소설이 써지지 않는 경험은 한 번도 없었다는 얘기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나는 재능이 넘친다'는 식으로 들리지도 모르지만, 그럴 리는 없고요, 실은 매우 단순한 얘기인데 내 경우에는 소설을 쓰고 싶지 않을 때, 혹은 쓰고 싶은 마음이 퐁퐁 샘솟지 않을 때는 전혀 글을 쓰지 않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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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내가 생각하기에는, 소설가가 되려고 마음먹은 사람에게 우선 중요한 것은 책을 많이 읽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흔해빠진 대답이라서 죄송하지만, 이건 역시 소설을 쓰기 위해 무엇보다 중요한, 빠뜨릴 수 없는 훈련이라고 생각합니다. (중략) '오믈렛을 만들기 위해서는 우선 달걀을 깨야 한다'는 것과 똑같은 정도로 당연한 얘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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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크 디네센은 '나는 희망도 절망도 없이 매일매일 조금씩 씁니다'라고 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나는 매일매일 20매의 원고를 씁니다. 아주 담담하게. '희망도 절망도 없다'는 것은 실로 훌륭한 표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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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란 애초에 불건강하고 반사회적, 반세속적인 존재라서 건강 유지나 피트니스는 필요 없다는 견해도 뿌리 깊게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얘기는 나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됩니다 그런 것은 스테레오타입의 작가 이미지, 라고 간단히 일축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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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울러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뇌 내에서 태어나는 해마 뉴런의 수는 유산소운동을 통해 비약적으로 증가한다고 합니다. 유산소운동이란 수영이나 조깅 같은 장시간에 걸친 적당한 운동을 말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새롭게 태어난 뉴런도 그대로 두면 28시간 뒤에는 별 쓸모도 없이 소멸해버립니다. 정말 아깝지요. 하지만 막 태어난 뉴런에 지적인 자극을 주면 그게 활성화해서 뇌 내의 네트워크와 이어져 신호 전달 커뮤니티의 유기적인 일부가 됩니다. 그래서 학습과 기억 능력이 높아집니다. (중략) 즉 육체적인 운동과 지적인 작업의 일상적인 조합은 작가가 행하는 종류의 창조적인 노동에는 매우 이상적인 영향을 끼치는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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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강함이란 타인과 비교해 이러쿵저러쿵하는 강함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필요한 만큼'의 강함을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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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생각건대, 혼돈이란 어느 누구의 마음속에나 존재합니다. 내 안에도 있고 당신 안에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실생활에서 일일이 구체적으로, 눈에 보이는 형태로, 외부를 향해 드러내야 할 종류의 것은 아닙니다. "이거 봐, 내가 떠안은 혼돈이 이렇게나 크다니까" 하고 남들 앞에 자랑스럽게 내보일 만한 것은 아니다, 라는 얘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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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현재 내가 서 있는 지점에서 세계를 바라보는 것뿐만이 아니라 조금 떨어진 다른 지점에서 세계를 바라보는 나 자신의 모습까지 나름대로 객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게 가능해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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