찌질한 상상
"한순간 내 몸에 익숙했던 니 손이 날 밀어내. 나는 어떡해 나는 어떻게 해..., 라니. 비를 좋아하는 건 아닌데 이 가사는 정말 멋진 거 같아."
홍대였던가 대학로였던가, 아무튼 A와 함께 찜닭을 먹으며 나는 A에게 비의 노래 가사에 대해 말하는 중이었다. 사랑의 종말을 이렇게 극적으로 표현한 말이 어디 있을까 하고. 이 정도면 대중가요의 가사가 아니라 문학, 예술의 경지인 것 같다고.
사랑을 끝내는 다양한 방식이 있고, 이별을 체감하는 많은 순간이 있겠지만 가장 슬픈 것은 비의 그 가사가 아닌가 싶었다. 가장 익숙하고 가장 많이 닿았던 상대의 손이 나를 거부하는 것. 이제 상대의 입술도, 가슴도, 그리고 그의 모든 것이 내 것이 아니게 된다.
간장소스가 적당히 밴 납작하고 넓은 당면을 젓가락에 돌돌 말아먹고, 손가락으로 닭고기의 뼈를 발라 입에 넣으며 나는 그런 이야기를 주절거렸다. 첫 여자 친구이자, 사귀기로 한 지 고작 3주밖에 안 됐지만 어색하고 조심스럽기보다는 편안했다.
그리고 나는 A에게 아직 '예쁘다'는 칭찬을 한 번도 해준 적이 없었다. 우리 가족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고, 다음에 내 친구들과 함께 만나자는 말도 꺼내지 않았다.
그런 나와 달리 A는 자신의 가족에 대해 많이 얘기했다. 함께 걸을 때면 내가 신경 써서 보폭을 맞춰 걷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나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었다.
*
나는 A가 사는 오피스텔에 총 두 번을 갔다. 한 번은 처음 A의 손을 잡은 날이었다. 그날은 1층 로비에서 A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갈 때 안녕하고 돌아섰다.
두 번째로 갔을 때는 A가 사는 층까지 같이 올라갔다. 그전에 A는 내게 "원래 친구와 같이 사는데 오늘은 친구가 오지 않는다"고 했다.
A의 오피스텔로 가기 전 우리는 가볍게 술을 먹었다. A의 집까지 걸어가면서 나는 편의점에서 '설레임' 아이스크림을 두 개 샀다.
"정확히는 '설렘'이 표준어지만 어쩐지 나는 '설레임'이란 말이 더 좋아. '설렘'하고 발음해 버리면 전혀 설레이지 않고 금방 끝나버리는데 '설레~임'하고 발음하면 말의 울림이라던가 느낌이 더 잘 전해지는 것 같거든."이라고 나는 또 쓸데없는 말을 지껄였다.
그러니까 나는 그 상황 때문에 설레고 있는지도 몰랐다. 문자 그대로 나는 '자취하는 여자 친구의 집에 여자 친구를 데려다주고 있는 중'이었다.
여자 친구가 사는 복도의 끝에 마련된 별도의 외부 공간(옥상 같았다)에는 물탱크와 나무 벤치 같은 게 있었다. 나는 A와 그 벤치에 앉아서 한동안 이야기를 했다. 하늘에는 적당히 별이 있었던 것도 같고 아니었던 것도 같다.
찜닭을 먹으며 했던 쓸데없는 얘기는 지금도 기억나지만 그 벤치에서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는 그때 머릿속으로 '뽀뽀를 해버릴까 말까'를 엄청나게 고민하고 있었다.
2월이라 날은 추웠다. 슬슬 몸이 떨려왔다. A와 나는 그 공간을 나와 A가 사는 방 문 앞까지 천천히 복도를 걸었다.
"네가 어떤 방에서 사는지 보고 싶어."
"오늘은 안 되겠어. 나 이 정도면 많이 참았으니까."
"3주나 됐으니까, 이제 괜찮지?"
"오늘은 더 같이 있고 싶어."
수많은 말들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A는 "방이 조금 지저분해서 보여주기가 좀 그런데..."라는 뻔한 수비, 그러니까 언제든 골을 먹혀 줄 준비가 돼 있지만 그냥 골을 양보하는 건 이 세계의 룰이 아니니까 '조금 더 남자답게 해봐'와 같은 주문을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그날 A가 집에 들어가서 방문을 닫을 때까지 문 밖에서 얌전히 기다렸다. 그 이후에 노크를 하거나, 전화를 걸지도 않았다.
나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조용히 내려와서 집에 가는 지하철을 타고 가며 문자메시지를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