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배경
고등학교 2학년 때 '시를 산문으로 고쳐쓰기'라는 수행 평가 과제를 받았다. 당시 문학 선생님은 미혼에 예뻤기 때문에 나름으로 최선을 다해 과제를 작성했다. 과제가 잘 된 것 같아 동네 시립도서관의 투고란 같은 곳에 올렸는데 문학평론가 같은 사람이 (고등학생 수준의 글이 아니라 그랬는지 모르지만) "남이 쓴 글을 올리면 안 됩니다"라고 따끔하게 충고해 줘서 굉장히 화가 났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평가하는 그 꼰대 평론가에 감정이 복받쳐서 엄청 긴 글을 썼는데 그걸 게시판에 올렸는지 아닌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근데 지금 봐도 현재의 나보다 잘 쓰네. 인마 짜식.
역시 사춘기의 파워 오브 러브란...
2. 시
당신을 보았습니다.
-한용운(韓龍雲)
당신이 가신 후로 나는 당신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까닭은 당신을 위하느니보다 나를 위함이 많습니다.
나는 갈고 심을 땅이 없으므로 추수(秋收)가 없습니다.
저녁거리가 없어서 조나 감자를 꾸러 이웃집에 갔더니, 주인은 "거지는 인격이 없다. 인격이 없는 사람은 생명이 없다. 너를 도와 주는 것은 죄악이다.
그 말을 듣고 돌아 나올 때에, 쏟아지는 눈물 속에서 당신을 보았습니다.
나는 집도 없고 다른 까닭을 겸하여 민적(民籍)이 없습니다.
"민적 없는 자는 인권(人權)이 없다. 인권이 없는 너에게 무슨 정조(貞操)냐." 하고 능욕하려는 장군이 있었습니다.
그를 항거한 뒤에 남에게 대한 격분이 스스로의 슬픔으로 화(化)하는 찰나에 당신을 보았습니다.
아아 온갖 윤리, 도덕, 법률은 칼과 황금을 제사 지내는 연기인 줄을 알았습니다.
영원(永遠)의 사랑을 받을까, 인간 역사의 첫 페이지에 잉크칠을 할까, 술을 마실까 망설일 때에 당신을 보았습니다.
(시집 {님의 침묵}, 1926)
3. 고쳐쓰기
당신을 보았습니다. 당신의 눈 속에서 다시 나를 보았습니다. 당신 눈 속에 비친 내 눈 속의 당신을 보았습니다... 다시 당신 눈 속의 내 눈에선... 황금으로 된 방울이 빛나고 있었습니다.
돌이켜 보면 꿈만 같았던 당신과의 생활은 어떤 운명 신의 장난인지, 과거 제 허물이 부족했던 탓인지, 당신께 제가 밉보인 탓인지는 알리 없지마는 당신은 차마 저를 떨치고 가셨습니다. 당신과의 행복했던 시절도 혹시나 모를 이별의 순간을 가슴 졸이며 당신께 너무 부담을 주었던 것은 아닌지... 미리 걱정하고 염려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당신의 입에서 나온 이별의 말은 뜻밖의 일이 되고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이 되어 제 가슴을 소용돌이쳐 갈갈이 흩어 놓았습니다. 하지만 당신보다는 나를 위해, 슬픔의 소용돌이에 쌓여 아무것도 못하는 무력한 제 자신이 싫어 흩어진 가슴의 조각을 모으고, 기워서 당신의 공간을 다시 마련하였습니다. 당신이 돌아옴을 믿으며 그렇게 당신과 한 하늘 아래서라도 살아가기로 했습니다.
[당신이 가신 후로 나는 당신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까닭은 당신을 위하느니보다 나를 위함이 많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가신 후로 제게는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는 듯합니다. 당신을 기다리는, 당신을 위한 작은 가슴의 불씨는 꺼지지 않았지만 주변의 비와 바람에 흔들려 그 불씨를 포기하려 할 때 당신을 보았습니다.
당신이 떠남으로 인해 살 곳을 잃은 듯 저는 집 없는 아해처럼 방황하며 며칠을 보냈습니다. 배가 고파서 저녁거리라도 얻어 볼까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이웃집 문을 두드려 보았습니다. 몇 번이나 망설였지만, 제 이런 부끄러움을 아는지 모르는지 뱃속의 공허함이 저를 용감하게 만들어 준 것입니다. 한동안의 정적 동안 이럴 때 당신이 제 가슴을 채워준다면 이깟 배고픔이야 아무렇지도 않을 거라는 생각을 몇 번이나 되새기고 있을 때 주인인 듯 보이는 사내가 나왔습니다. 제 행색을 보고 못 마땅하게 변한 주인의 표정을 애써 무시하고 벼랑 끝에 선 듯 저는 저녁거리를 부탁해 보았습니다. 하지만 주인은 제 부탁을 구걸로 비하시켜 버리고는 저를 벼랑 끝 너머 아득한 낭떠러지로 밀어버렸습니다.
[거지는 인격이 없다. 인격이 없는 사람은 생명이 없다. 너를 도와주는 것은 죄악이다.]
기워서 헐어버린 가슴에 차마 꽂힌 비수인 듯 제 가슴은 날카로운 칼끝에 쓰렸고 돌아서는 볼 위로는 비수에 찔린 가슴의 피가 물이 되어 흘렀습니다.
가슴의 상처가 아물어 갈 때에 한 [장군님]이 그런 제게 먼저 다가와 주셨습니다. 제게 약이 되시려고 나타난 분인 줄 알았습니다... 배고픔에 주리고,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고 핍박당할 때 그 장군님이 가슴의 상처를 매워 주실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결국 그 [장군]은 제 가슴의 상처를 더욱 벌려놓고 다시는 회복하지 못할 듯이 아주 잘게 찢고 찢어 태워버리고 재마저 짓 밝아 버리셨습니다.
[민적 없는 자는 인권(人權)이 없다. 인권이 없는 너에게 무슨 정조(貞操)냐.]
아아. 세상의 모든 윤리, 도덕, 법률은 힘과 권력에 아부하는 수하인 줄 알았습니다. 이런 세상에 저란 존재가 더는 가치가 없는 듯하여 한 줄기 이슬이 될까, 술에 몸을 기대 볼까, 이런 내 삶의 이야기로 누군가에게 용기를 줄 수 있을까, 당신께서 과연 나를 기억이나 하실까. 이런 생각을 할 때에 당신을 보았습니다.
[아아 온갖 윤리, 도덕, 법률은 칼과 황금을 제사 지내는 연기인 줄을 알았습니다.
영원(永遠)의 사랑을 받을까, 인간 역사의 첫 페이지에 잉크칠을 할까, 술을 마실까 망설일 때에 당신을 보았습니다.]
당신을 보았습니다. 당신의 눈 속에서 다시 나를 보았습니다. 당신 눈 속에 비친 내 눈 속의 당신을 보았습니다... 다시 당신 눈 속의 내 눈에선... 황금으로 된 방울이 빛나고 있었습니다.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