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의 결말이 '우연히' 좋을 확률

by 거짓말의 거짓말

중앙도서관의 대출이력을 조회해 보았습니다. 2004년도 한 해 동안 제가 빌린 총 11권의 책 중 8권의 저자는 촌상춘수이거나, 무라카미 하루키이거나, 村上春樹였습니다. 사실 모두 같은 작가의 이름입니다. 저는 대학 신입생이던 시절 하루키의 책을 처음 접했습니다. 서고의 문학 코너를 계획 없이 돌아다니다가 눈에 띄는 책을 집어 드는 평소의 습관대로 한 권의 책을 골랐고, 우연하게도 그때 제가 서 있던 곳은 일본문학 코너였습니다. 하지만 100권이 넘는 일본 소설 중에서 하필 하루키의 책을 선택하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상실의 시대.’ 저는 분명 어딘가에서 그 책의 제목을 들어본 적이 있었습니다. 서고에 선 채로 저는 한 시간 가량 페이지를 넘겨 나갔고, 그다음 날 서점에서 같은 제목의 책을 샀습니다. 대학에 들어와서 수업 교재를 제외하고는 처음 산 책이었습니다.


같은 해 겨울, 아직 대학 신입생이던 저는 크리스마스이브 날 오후 1시에 경희대학교 도서관 앞에서 한 여자아이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사실 제가 기다리는 사람이 여자라는 사실을 안 것은 고작 일주일 전이었습니다. 학교의 교지에 하루키의 문체를 흉내 내서 고양이에 관한 짧은 단편을 실었고, 며칠 후에 한 사람으로부터 이메일이 왔습니다. 그 후로 얼마간 서로 이메일을 주고받고, 문자를 나누다가 이브 날에 만나기로 한 것이었습니다. 1시가 되자 도서관에 도착했다는 문자가 왔고, 저는 그 사람이 얘기해 준 풀색 목도리를 찾아 주위를 두리번거렸습니다. 한참을 찾아봐도 찾을 수 없었기에 저는 전화를 했습니다. 처음으로 그 사람의 목소리를 듣고, 저도 처음으로 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어디에 있느냐고. 입구에 있다는 대답이 들려왔습니다. 나도 지금 입구 앞이라고 말했습니다. 한동안 조용히 생각하고 다시 물어봤습니다. 혹시 수원에 있느냐고. 여자는 그렇다고 했습니다. 둘 다 도서관 앞에서, 같은 시간에 서로 상대방을 기다렸지만 만나지 못하는 상황이 재미있었습니다. 아쉬움을 뒤로한 채로 “언젠가 인연이 있으면 다시 만나요.”라는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양쪽 모두의 손에 전해주지 못한 크리스마스이브의 선물이 들려있었고, 제 가방 속에는 아직 쓰지 않은 크리스마스 카드 두 장과 검은색 볼펜 2자루가 들어있었습니다.


며칠 전에 도서관에 갔다가 우연히 ‘상실의 시대’를 검색해 봤습니다. 그리고 상실의 시대에 남겨져 있는 서평을 봤습니다. '서평. 이라기보다 저의 주저리입니다만, '이란 문장으로 그 서평은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참 상투적이고

우스운 흑백논리의 힘을 빌리자면,

사람은

친구가 될 수 있는 사람과,

친구가 될 수 없는 사람으로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적어도

나의 친구는

상실의 시대를 읽고

허무함을 알고

외로움을 알고 있는 사람이기를

희망합니다.’


+

‘아무도 글을 남겨놓으시지 않았기에,

흔적을 처음으로

제가 영광스럽게 남깁니다.

그 누가 알겠냐만은

나 아닌 그 누가 이 사실을 알겠냐만은

참 자랑스럽습니다.


2005년 10월에 작성된 서평이었습니다. 서평의 작성자는 우연히도 제가 알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2004년의 크리스마스이브에 저는 그 사람과 만나려고 했었습니다. 몇 년이나 전의 일이긴 하지만 분명히 저는 이 흔적을 남긴 사람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남긴 흔적을 발견했습니다. 비록 2004년에 만나지는 못했지만 저는 그 사람과 다음 해 1월에 한번 만날 수 있었습니다. 수원에 있는 경희대학교의 도서관에서. 하지만 그 사람과 친구가 되지는 못했습니다. 대학 신입생 시절의 저는 상실의 시대를 읽고, 외로움도 느끼고 있었지만 너무나 서툴렀습니다. 지금과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신간이 없다는 건 알지만 요즘에도 도서관에 가면 때때로 일본문학 코너를 서성이게 됩니다.


(2008.05)

+다니던 대학의 60주년인가의 수기 공모전에 출품해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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