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문득 대화를 하다 이런 말을 했다.
지금까지 살면서 나는 아직껏 누군가에게도 면대면으로 좋아한다거나 사랑한다고 말한 적은 없다 라고.
현실에서 누군가가 내게 저런 말을 했다면 아마 나는 속으로 이 녀석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따위 말을 지껄이는 걸까라고 생각하고는 실상 네 녀석이 그런 삶을 살았다고 해서 굳이 자랑할 거리도 못 되는 그런 이야기를 밖으로 꺼내서 그 이야기를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이런 생각들을 시작하게 만들 필요는 없는 거 아냐 라고 한껏 그 녀석의 유치함을 비웃은 뒤에, 세상에는 어떤 말을 꺼내기에 적절한 상황과 그렇지 않은 상황이 있지만, 내 생각에 그런 종류의 말은 어떤 상황의 어느 누구에게도 하기에 적절한 말은 아니며, 굳이 네 녀석이 그 말을 꼭 하고 싶다면 그런 건 멍청한 네 녀석의 일기장의 구석에나 적어놓고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말란 말이야 라고 소리치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지만, 어쨌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지금 이 문장을 쓰고 있다. 역시나 스스로도 왜 이런 멍청한 짓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기본적으로 나는 나 자신을 신용하지도 않고, 좋아하지도 않기 때문에 스스로에게 해가 되는 짓을 지금 억지로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그냥 단지 숙제가 하기 싫을 뿐인지도 모르고 몇 시간 전에 먹은 동동주의 취기에 그냥 술주정 대신 술끄적임을 하고 있을 뿐인지도 모르고 단지 지금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뭐 어찌되었거나 그 말을 하고 나서, 나는 새삼스럽지도 않게 "아, 그러고 보니 나는 이제껏 어떤 인간도 사랑해 본 적이 없구나."라는 단순한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나는 그것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구나라는 사실도.
전에 어딘가에서 썼었지만 누군가가 자신을 외롭다고 느낀다면 그는 자신이 외롭다라는 관념을 단어 혹은 말로써 표현한 것이 된다.
그는 "당신은 외로운가?"라는 질문에 대해 "예, 나는 외롭습니다."라고 어떤 형태로든지 말과 단어를 빌려와서 답한 것이라는 의미다. 아무도 그에게 그 질문을 하지 않았다 할 지라도, 그 자신의 내부에서 스스로에게 그 질문을 던지고 그는 자기 자신에게 말하는 것이다. 나는 외롭다,라고.
단어 이전의 생각과 사유, 그리고 인간의 느낌이라는 것은 그것이 표현되기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닐까. 설령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사람은 단어 이전의, 즉 적절하게 표현되기 이전의 원시적인 관념을 이해하거나 온전히 자각할 수 없는 것이다.
사과라는 단어를 듣고 그것을 떠올리기 전에는 어떤 누구도 사과를 생각할 수 없다. 설령 인간이 단어와 말을 발명하기 이전, 어떤 원시인이 머릿속으로 나무에 매달려 있던 빨간 나무 열매에 대해 생각을 하고 그것을 떠올렸다 할지라도 그는 그 생각만으로는 누구와도 소통할 수 없다. 생각의 확산 혹은 전파를 위한 표현 수단이 없다면 그 생각은 전혀 의미가 없는 것이다. 가령 적어도 그 원시인이 누군가에게 사과에 대해 이야기가 하고 싶다면 상대방의 눈 앞에 사과를 따서 들이민 후에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등의 행위(표현)로 마침내 그것에 대한 이해의 공유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이 경우에는 단어와 말 대신에 인간의 몸, 혹은 손가락이 표현의 수단으로 이용된 것이다. 적어도 관계성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표현 이전의 사유는 의미가 없다
즉 표현 이전에 존재하는 어떤 것도 그것이 표현되기 이전에는 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다. 설령 그것이 존재한다고 할지라도 인간이 표현 이전에 어떤 것에 대해서 이해를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누군가가 자신을 외롭다고 말한다면 그는 정말로 외로운 것이다. 설령 그것이 거짓말일지라도, 자신은 전혀 외롭지 않다고 생각하며 아무 생각 없이 그 말을 내뱉는 다고 할지라도 그 순간 그 말은 어떤 식으로든지 작용해서 그는 그 말을 하기 이전보다는 확실히 외로움과 가까운 쪽으로 떠밀려 가게 된다. 그가 정말로 외롭다고 말한다면 그는 외로움을 느낀 것이고, 비록 그가 외로움의 본질이나 이데아에 대해서 전부 파악하고 있지는 못하더라도 확실히 어떤 종류의 외로움에 대해서는 알고 있는 것이다. 즉 그는 스스로 질문을 하거나 그 질문을 받고 그것에 (언어로) 답함으로써 그것에 대해 알게 되는 것이다.
"설명해 주지 않으면 모른다는 것은 설명해줘도 모른다는 거야."
1Q84에서 하루키는 말한다. 그는 스스로가 찾은 답이 아니면 의미가 없다고 말하는 듯하다. 결국 무언가에 대해서 알기 위해서는 자기만의 답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의미다. 그리고 그 답을 구성하는 것은 물론 단어, 즉 말이다. 그리고 그 말은 표현되기 이전에는 의미가 없다.
나는 말했다. 나는 어떤 인간에게도 '사랑해'라고 말해 본 적이 없다라고.
즉 표현 이전의 무엇에 대해 사람이 그것을 알기란 불가능하므로, 나는 사랑이라는 관념 혹은 그것의 본질이나 그것의 미미한 그림자 조차에 대해서도 아무것도 모른다 할 수 있다.
무언가를 모른다는 것을 자각하는 것은 그것이 앎이라는 곳으로 가는 지름길을 발견하는 것과 같다는 측면에서 대부분의 경우에는 환영할 만한 것이지만 이 경우에는 꼭 그렇지만도 않다.
한때는 내게 그것을 알기에 치명적인 결함이나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니 시간이 지나면 그것에 대해 자연스레 알게 되리라 생각했었지만, 지금까지 그것을 모르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내게 무언가 커다란 문제가 있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 아닌가.
그 문제라는 것이 하나가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다. 그리고 그중 하나라면 아마도 이런 쓸데없는 짓을 할 시간이 있으면 단순하게 그것을 말하고 자신이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상대에게 알게 하고 나도 그것의 의미를 깨우치는 것이겠지만, 어쩐지 나는 타인에게는 기본적으로 전혀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닐까 라는 무서운 생각이 들 때도 가끔은 있다.
(2010? 2011?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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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문장의 끝 부분은 "어쩐지 나는 타인에게는 기본적으로 전혀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닐까 라는 무서운 생각이 들 때도 가끔은 있다." 이게 아니라 "나는 거절당할까 봐 너무 두렵다."가 돼야 했을 것이다. 저 글이 쓰인 시점으로부터 약 10년 가까이 멀리 있는 내가 보기에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