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AtoZ

회식

화이트데이에 회식을 하다

by 거짓말의 거짓말

회식을 했다. 여의도에서 버스를 탔다. 잤다. 기사 아저씨가 깨웠다. 부천을 한참 지나있었다. 길을 건너서 반대 방향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다시 잤다. 부천을 또 지나쳤다. 버스 타면 또 잘까봐 지하철 역을 들어갔다. 전철은 이미 끊겨 있었다. 역을 나왔다. 다시 버스를 탔다. 좀 전에 집에 왔다. 지금 시간은 1시 11분이다. 버스에서 자지 않았으면 자정 전에 도착했을 거다.


집까지 걸어오는데 짜증이 울컥 솟구쳤다. 망할 놈의 회식. 방금 사전을 찾아보니 회식은 '모일 회(會)'자에 '먹을 식(食)'자를 쓴다. 모여서 먹는다는 단순한 뜻이지만 자발성에 대한 설명은 없다. 하지만 자발적 회식과 비자발적 회식은 전혀 다르다. 미생에 나오는 것처럼 술 한잔에 '승진'도, '봉급'도, '생활'도 걸려있으니 '엄숙하게 회식에 임한다'는 자세는 아니지만, 어쨌든 회식을 하면 먹기 싫어도 잔을 비우게 된다.


좋아하지 않는 술을 억지로 먹는 것도, 버스에서 자다 집을 지나치는 것도 하루 이틀이 아닌데 오늘은 왜 짜증이 났을까. 오늘이 14일인 것도 한몫한 것 같다. 나는 13일의 금요일도 좋아하지만(다음날이 토요일이지롱) 오늘은 월요일인 데다 14일이었다.


화이트데이는 일본 후쿠오카의 과자점 '이시무라 만세이도'에서 초콜릿 앙금을 넣은 마쉬멜로우를 파는 것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이곳의 사장이 밸런타인데이에 대한 답례로 남자가'너에게 받은 초콜릿을 내 상냥함(마쉬맬로우)에 담아 돌려줄게요'라는 의미로 시작했다는 것. 처음에는 '마시멜로데이'였다가 백화점에서 사탕과 쿠키도 포함해 흰색을 의미하는 화이트데이로 바꾸자고 제안해 화이트데이가 됐다고 한다.


일본의 이시무라 만세이도에게도, 백화점에게도 짜증이 났다. 양적완화를 단행해 한국 기업의 수출에 악영향을 주고, 일제 강점기 시절 윤동주 시인을 생체 실험해 27세에 죽음에 이르게 하고, 위안부 문제에 대해 사과도 제대로 하지 않고, 여성을 상품화해 수많은 포르노를 양산하고(아, 이건 아닌가...)...


집에 오면서 화를 삭이기 위해 다른 생각을 했다. 드래곤볼 7개를 모아 소원을 말하는 상상.


"자취하는 여자 친구를 갖고 싶어요."


물론 눈치 없는 용신이 자취하는 아무 여자 친구나 주면 곤란하니까, "회식도 내팽개치고 남자의 마시멜로(상냠함이라고 위에서 언급했음)를 선물하기 위해 매일 들락날락 거리고 싶을 만큼 멋진"을 '자취하는 앞에' 단서로 달아야지.


이 몇 줄 쓰는데 40분이 지났네. 아직 잠도 안 잤는데 왜 벌써 이따 일어나기가 싫은 걸까.


+

화이트데이 같은 상술이 빤히 보이는 말보다(무슨 여성 용품도 연상되고 말이야) '남자의 마시멜로 데이' 같은 표현이 더 그럴싸하지 않은가 싶다. 상상의 여백도 있고.


(2017. 02. 14)


+상기 이미지는 윤태호 작가의 웹툰 미생에서 가져왔습니다. 문제 될 시 삭제하겠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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