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2~3주 전이었나, 전에 같은 출입처를 담당하며 알고 지낸 타사 사람(일단은 다니는 직장의 명함에는 기자라고 적혀있다)과 공덕 전집에서 오랜만에 만나 술을 마셨다.
뭐 이런저런 공장(직장) 얘기를 하다 으레 그렇듯 소개팅이니 남녀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화제에 올랐다. 한 동안 상대가 소개팅을 했던 남성에 대한 험담을 해서 '이런, 저런, 쯧, 헐, 진짜요' 등의 추임새를 넣으면 맡은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그러다 갑자기 상대가 '소개팅 할래요?'라는 형식적인 질문을 해줬고, 나 역시 '저야 감사하죠'라는 정해진 답을 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하게 '어떤 스타일이 좋아요?'라는 추가 질문이 들어왔다. 딱히 평소에 생각해둔 답안이 없었기에 순간 당황했다.
"..."
'착하고... 예쁘면 좋죠'라고 답을 하며 말끝을 흐렸다. 짧은 순간이지만 '예쁘고... 착하면 좋죠'라는 대답보다는 덜 속물적(착한 게 먼저)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역시나 서른이 넘어 할 만한 답은 아니었기에 말을 하면서도 스스로가 좀 한심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웬걸. 상대는 순간 날 무슨 벌레 보듯 하며 '어쩜 그럴 수가 있냐'고 되물었다. 그 후에는 뭔가 '넌 완전 저질이야' 같은 눈빛을 보냈다.
아니, 내가 뭘? 큰 욕심을 부린 것도 아니고 그냥 일반론으로 착하고 예쁘면 좋다고 말했는데 그게 그리 큰 죄인가. 물론 누가 말하느냐에 따라 죄가 될 수 도 있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벌레 보듯 할 건 없잖아. 상대의 반응이 좀 과하다 싶어서 '도대체 뭐가 문제냐' 물었다가 답을 듣고는 오히려 내 쪽에서 '빵' 터졌다.
그쪽에서는 내 대답을 '착하고... 에프(F)면 좋죠'라고 들었단다.
그제서야 '우리나라에 그런 사람 흔치 않다'고 비난하던 상대의 태도가 이해가 됐다. 물론 말을 하면서도 좀 민망해서 말 끝을 흐린 내 탓도 있지만 그걸 그렇게 듣다니. 그리고 한 동안 우리는 '컵'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중학시절 '따뜻한 건 컵, 어 컵 오브 커피. 차가운 건 글라스, 어 글라스 오브 주스'를 되뇌며 영어 숙어를 외운 이후로 컵에 대해 이렇게 길게 이야기를 한 건 처음이었다. 내가 알았던 컵의 세계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다는 걸 깨달았다.
여기까지 쓰고 보니 뭔가 걱정된다. 국민학교 시절 개학 이틀 전에 그림일기를 몰아 쓰며 당일의 날씨가 맑음인지 흐림인지 고민하던 내가 역사교과서를 쓸 일은 없겠지만 어쨌거나 기록으로 남은 글은 누군가의 발목을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위의 부분을 발췌해서 이 녀석은 좋아하는 여자 스타일이 '착하고 에프면 오케이인 그런 놈이라고'라고 매도해 버리고, 그게 SNS에 퍼지고, 전국의 수많은 '에프 해이터(Hater)'들에게 댓글 어택을 당하면 나는 우울증에 걸릴지도 모른다.
사실 나는 살면서 에프와는 별 인연이 없는데 대학을 7년 가까이 다니면서 에프는 맞은 적이 없고 대체로 에이에서 비정도...(가끔 씨를 맞으면 재수강을 하긴 귀찮고 해서 '씨는 씨데로 나쁘지 않지'라고 합리화도 하고). 그리고 그건 학점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주변에서도 대부분 에이 아니면 비정도고.
이쯤에서 전혀 다른 얘기긴 한데 얼마 전에 아이유라는 대중 가수가 표현의 자유와 과련해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익히 알려진 것처럼 동녘이라는 출판사가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에 나온 학대당한 아이 '제제'를 주제로 곡을 쓴 아이유의 가사가 선정적이라며 비판을 한 것이 시발점이다.
표현의 자유. 그래, 아이유에게 표현의 자유가 있는 것처럼 동녘도 비판의 자유가 있다 치자. 그게 노이즈 마케팅을 해서 책을 더 팔아먹기 위한 목적이었다면 실제로 그 책 판매량이 최근 올랐다고 하니 잘한 일이다.
하지만 역시나 그 사건을 확대한 언론이나 그에 대해 비판을 하는 대중에 대해서는 좀 답답한 마음이 든다. 언론도 책을 팔아먹은 동녘처럼 기사를 팔기 위해 기사를 썼다는 부분을 이해하더라도 대중 다수가 그 기사를 보고 표현의 자유를 고려치 않고 한 창작자에게 뭐라 할 수는 없지 않나. 게다가 아이유는 이에 대해 사과를 했다. 이게 사과할 일인가 싶다.
나와 다른 해석의 독특함에 대해 찬사를 보내지는 못하더라도 해석 자체의 윤리성과 수준에 대해 왈가왈부하고 이를 마녀사냥하듯 몰아가는 건 사람들 스스로가 성숙하지 못하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에 다름 아닌 것 같다.
역시나 그런 건 내가 이 글을 끝맺으며 '아이유가 에이냐 에프냐에 상관없이 표현의 자유는 그 자체로 존중돼야 한다'고 시답잖은 농담을 하더라도 그건 그것대로 '아 그냥 뭐 미친놈은 도레미를 웅얼거리고, 도라이는 십자 드라이버'라는 식으로 대충 이해하고 넘어가면 되는 거 아닌가 싶다.
(2015 11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