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연습 1. 폭설, 정류장에서

by Licht

여느때처럼 1월의 안진에는 자비없는 폭설이 쏟아지고 있었다.
강한 바람에 힘 없는 눈이 수평에 가깝게 활공하는 모습을 보며 문득 추위를 느낀 영준은 코트를 여몄다. 정류장을 향해 분주히 움직이던 그의 구두가 발목까지 쌓인 눈을 헤치는 사이에 점점 젖어들었다. 양말까지 조금씩 축축해지는 불쾌를 느끼며 그는 정류장의 차양 안으로 들어갔다.
정류장에는 낯선 남자가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작은 마을에서 이방인을 보는 일은 거의 없다. 흥미를 느낀 영준은 힐끔거리며 그를 관찰했다. 중간 정도의 키, 몸집에 비해 조금 큰 검정색 정장. 길거리를 돌아다니다보면 한 번쯤은 봤을 법한 그런 평범한 얼굴. 하지만 혈관의 색을 구분할 수 있을 정도로 하얀 피부와 창백한 안색이 그의 눈길을 끌었다. 심지어 미세하게 몸을 떨고 있는 듯도 해서 괜히 걱정이 된 영준은 그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 괜찮으세요?"
"••• 네?"
무언가에 정신이 팔린 듯한 남자는 한참이 지나서야 대답했다. 남자가 고개를 영준 쪽으로 돌리자 그의 얼굴을 조금 더 명확하게 볼 수 있었다. 푹 꺼진 눈두덩이에 쾡한 눈빛. 툭 튀어나온 입과 광대때문인지 얼굴이 유난히 도드라져 보였다. 그러나 이 모든 요소들에도 불구하고 그의 얼굴은 어디서 샘솟는지 모를 야릇한 활기를 띄고 있었다. 얼핏 쳐다봤을 때와는 현저히 다른 인상에 묘한 기분을 느끼며 영준은 대화를 이어갔다.
“계속 떨고 계시길래 괜찮으신가 싶어서요.” 아,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어떡하지. 괜한 참견이었나?
남자는 그를 멀뚱멀뚱 바라보다 차가운 말투로 대답했다.
“안 떨고 있는데요.”
짧은 대답 후에 다시 앞으로 고개를 돌린 남자를 보며 영준은 자책했다. ‘하•••. 그냥 쓸데없는 오지랖 같은 건 좀 참을걸•••.”

첫차가 오기까지 남은 시간은 10분. 어색한 정적 속에서 영준은 빽빽하게 쏟아지는 눈을 헤아리며 후회를 떨쳐내려고 노력했다. 정류장의 낡은 전등이 지직- 소리를 내며 깜빡일 때마다 내리는 눈도 함께 점멸했다. 그 눈이 쌓여감에 따라 판넬로 된 차양은 계속 삐걱거렸다. 이른 새벽임에도 이따금 시골길을 달리는 자동차의 덜컹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느새 멍하니 있던 영준은 이 지극히 일상적인 풍경에 빠져들었다. 출근하자마자 준비해야 할 프레젠테이션도, 물이 새는 집 천장도, 잦은 음주로 높아진 간 수치도, 참견의 대가로 얻은 수치심도 이 순간에서만큼은 그의 몰입을 방해할 수 없었다.
“저기, 그거 알아요?”
“•••••• 네?”
남자의 갑작스러운 말에 현실로 돌아온 영준은 한참 뜸을 들이고 나서야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를 바라보고 있는 남자의 표정과 그 말투는 방금 전과는 다르게 한층 부드러웠다.
“양릉에는 눈이 많이 내려요. 어딘지 아시죠? 강원도 양릉군. 제가 군생활을 거기서 했거든요. 어휴, 여기 안진하고는 비교도 안 되게 많이 와요.”
••• 이 남자, 갑자기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당황한 영준은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런 그를 아랑곳하지도 않고 남자는 계속 말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안진이 정말 살기 좋은 곳이죠. 근데 그래도 춥기는 양릉만큼 춥긴 하니까 조심해야죠. 뭘 조심하냐고요?” 영준은 그런것을 물어보지도 않았다. “겨울만 되면 화재사고가 끊이질 않잖아요. 왜, 히터가 오랜 시간동안 열 받아서 터지기도 하고•••.”

버스가 오기까지 남은 시간은 3분. 영준은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 얼른 벗어나고 싶었다. 이 마을 사람도 아닌, 쌩판 처음 보는 남자가 꼭두새벽부터 헛소리를 해댄다니. 외양적으로나 말하는 것을 보나, 이 남자, 정신이 어떻게 된 것이 틀림없었다. 영준은 이 상황이 정말 버거웠다. 이미 축축해져버린 양말이 문득 더 불쾌해졌다.
‘그래, 3분만 참자. 설마 버스 안에서까지 저러진 않겠지.’
영준은 시계를 바라보곤, 한숨을 푹 쉬며 남자가 무슨 얘기를 하든 반응해주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이래 봬도 전 결혼도 하고 애 두 명까지 딸려 있는 몸이에요. 놀랐죠? 하하하—. 애들 사진 보실래요?”
남자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지갑을 꺼냈다. 영준은 곁눈질로 본 그의 지갑이 매우 얇다고, 너무나도 가벼워 보인다고 생각했다. 남자는 그 사이에 군데군데 검은 흔적이 남아 있는 가족사진을 꺼내 그에게 내밀어 보였다.
“어때요, 귀엽죠? 큰 애가 10살, 작은 애가 6살. 말 진짜 안 들어요. 누굴 닮아서 그런지. 참 모르겠다니깐.”
가족 얘기를 하는 남자의 목소리에 왠지 모를 슬픔이 묻어나왔다. ‘남의 가족 따위, 알 게 뭐냐.’
“아내랑은 대학교 때부터 만났어요. CC였는데, 학교를 다니는 그 몇 년 동안 아무도 모르게 숨어서 사귀었죠. 처음 만나 결혼하고 아이를 낳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싸운 적이 없어요. 신기하죠. 원래 운명 이런 걸 믿어본 적이 없는데, 이런 걸 운명이라고 하지 달리 뭐라 말할 수가 있겠어요?”
버스가 오기까지 남은 시간 2분. 영준은 지금까지 살면서 시간이 오늘만큼 느리게 흘러가는 날은 절대 없었다고 확신했다.
신경 안 쓰려고 노력은 하고 있지만, 남자의 말이 하나하나 정확히 그의 귓속으로 꽂혀 들어간다. 강설은 더욱 심해져, 밀도 높은 안개가 온 주위를 뒤덮고 있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젖은 양말은 더욱 더 그를 괴롭혔다.
“—몇 년 전에 코인을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많이 벌었어요. 그니까, 일주일도 안 돼서 천 만원을 번 거예요. ‘돈 버는 게 이렇게 쉬운 거였나?’ 싶은 생각이 드니 눈이 돌아가더라고요.
••• 운이 따라주는 건 딱 거기까지였어요. 무조건 오른다는 지인의 말에 혹해 잡코인에 전재산을 박았거든요? 그거 어떻게 됐는지 아세요?”
남자는 갑자기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그 발작과도 같은 웃음에 영준은 소름이 돋았다. 당장이라도 남자를 피해 정류장에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쿵쾅거리는 가슴을 부여잡으며 진정하기 위해 노력했다.

버스가 오기까지 남은 시간 1분.
“전재산이 하루만에••• 아니, 하루도 아니지. 몇 시간인가•••. 그냥 다 사라져버렸어요. 10년 동안 모았던 돈이 그렇게 순식간에 사라져버리니까 실감이, 실감이 안 나더라고요. 볼도 꼬집어보고 찬 바람도 좀 쐐보고 했는데•••, 꿈이 아니었어요.”
미세했던 남자의 경련이 이제는 눈에 확연히 보일 정도로 심해졌다. 지갑과 가족사진이 맥없이 풀려버린 그의 손에서 미끄러져 나와, 초라한 철푸덕 소리와 함께 바닥에 떨어졌다.
“가족들에게는 말 못했어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겠어요? 온가족이 나 하나만 믿고 의지하고 있는데. 그, 그걸 생각하니 진짜 미쳐버릴 것만 같더라고요. 눈물도 안 나왔어요. 삶의 희망을 싹 다 잃어버렸거든요.”
남자는 땅이 꺼질 듯한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의 눈은 금방이라도 차가운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이 촉촉했다. 이제 더 이상 그를 무시하고만 있을 수 없었던 영준이 위로 한마디라도 해줘야겠다는 생각으로 입을 열려는 순간, 남자가 다시 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제가 우리 집에 불을 질렀어요. 가, 가족들은 수면제를 먹고 그대로 자고 있는 상태에서.”
영준은 그 말을 듣고 머리가 새하얘졌다. 방금 이 남자가 한 말이 무슨 의미지? 순간적으로 사고가 얼어붙어 제대로 된 판단을 할 수가 없었다.
‘이거 진심으로 하는 말인가•••?’
“온가족이서 동반자살을 하려고 했어요. 그냥 저 혼자서 저질렀어요. 물통에 몰래 수면제를 타서.”
이미 창백했던 남자의 안색이 시들어버린 백합처럼 더더욱 빛을 잃어갔다. 초점이 사라진 그의 눈동자가 비정상적으로 흔들렸다. 영준은 한마디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가만히 듣고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등줄기로 애처로운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그러고 나서 저도 수면제를 먹으려고 했는데, 손이 달달 떨리는 거예요. 도, 도저히 먹을 수가 없더라고요. 눈 앞에 검은 안개가 낀 것처럼 점점 시야가 좁아졌어요.
••• 무슨 생각으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미리 방바닥에 뿌려 둔 휘발유 위에 불이 붙은 성냥을 던졌어요. 그냥, 아무 이유도 없이. 갑자기 그러고 싶었어요. 기름이 뿌려진 길을 따라 새빨간 불꽃이 돌진하더라고요. 아내와 애들이 자고 있는 그 방향으로•••.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늦었죠. 제가 어떻게 할 수도 없을 정도로 불길이 거세졌어요. 허겁지겁 집 밖으로 도, 도망쳐 나왔어요. 한참을 멍하니 불에 잡아 먹힌 집을 쳐다보고 있는데, 스멀스멀 어떤 냄새가 나더라고요. 나무가 타는 냄새, 플라스틱이 타는 냄새, 고기가 타는 냄새•••. 직감적으로 그 냄새의 정체를 알 것 같았어요. 뇌 한 쪽에서는 받아들이기를 거부했지만•••, 그 냄새는 분명 가족들의 몸이 타오르는 냄새였어요•••.”
남자는 말을 더 이상 이어가지 못하고 주저앉는 듯 하더니, 그대로 찬 바닥에 고개를 박고 절규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사람이 내는 소리라기에는 너무나도 기괴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동물도 그 소리를 흉내낼 수 없을 것만 같은 그런 절규였다.

버스가 도착했다. 영준은 무아지경이 된 남자를 한 번 돌아보곤, 도망치듯 버스에 올라탔다. 식은땀에 온몸이 젖어있었다. 주체할 수 없는 떨림이 그를 집어삼켰다. 버스에는 아무도 타고 있지 않았다. 영준은 제일 가까운 창가의 자리에 털썩 주저 앉고는, 흥건해진 이마를 코트 소매로 닦아냈다.
그대로 버스는 출발했다. 남자는 그 버스에 타지 않았다. 영준은 안심했다. 남자랑 같은 버스를 타지 않아도 된다니, 안도의 날숨을 내쉬며 경련을 몰아내려 애썼다.

문득 그 남자가 아직도 거기에 그대로 있을지 궁금해졌다. 영준은 창문으로 정류장을 바라보았다. 눈발 사이로 정류장이 흐릿하게 보였다.

남자가 보이지 않았다.

그는 눈을 비비곤 다시 정류장 쪽을 보았다. 여전히 남자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방금까지는 인지하지 못했던 발자국이 눈에 들어왔다. 그 발자국은 도로 쪽으로 이어져 있었다.
버스의 뒤쪽에서 자동차의 다급한 경적이 들려왔다.
곧이어 짧지만 둔탁한 충돌음이 났다.

눈은 이제 그 수를 헤아릴 수 있을 정도로 그쳐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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