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버니어(Souvenir) 초고

by Licht

https://youtu.be/XDIYOiQUi2s?si=NrsA0-gxAgOcI8L_


선선한 산들바람이 불어와 문득 여름이 끝나가고 있음을 느꼈다.

전공 수업을 마친 나는 이대로 그냥 자취방에 돌아가기가 아쉬워 두 칸 짜리 지하철에 올라탔다. 따로 목적지를 정하진 않았다. 일단 서울 외곽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내 귀에 꽂혀있는 이어폰에는 베토벤의 7번째 교향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10분 쯤 지나 여러 노선으로 갈아탈 수 있는 큰 역에 내렸다. 나는 역사 한가운데네 우두커니 서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퇴근 시간의 초입이라 주위에는 오기는 사람이 정말 많았다. 큼지막한 헤드폰을 쓰고 여유롭게 걸어가는 사람, 핸드백을 품에 안고 급하게 플랫폼으로 뛰어 들어가는 사람,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깔깔대며 지나가는 여고생들. 다들 어디론가를 향하여 바쁘게 움직인다. 그 분주함이 조금은 부러웠다. 교향곡의 관현악이 고조될 수록 인파도 점점 늘어갔다.

그렇게 사람 구경을 하다 지하철 안내판의 연초록색이 눈에 들어왔다. 그렇게 나는 2호선 플랫폼으로 향했다. 1호선을 탔을 수도 있고 그냥 그 역에서 나가도 됐을 텐데, 왜 하필 2호선이었을까를 생각해보면 그저 내가 초록색을 좋아해서 그랬던 것이 아닐까 싶다.

나는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대로 2호선 역들을 열거해봤다. 건대입구역, 홍대입구역, 성수역, 뚝섬역, 선릉역. 목적지를 홍대로 정했다. 한강 아래쪽으로 넘어가고 싶진 않았고, 월요일 저녁이라 한산한 홍대를 즐길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얼마 안 지나서 도착한 열차에는 사람이 거의 없어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이 시간에 이렇게 사람이 없는 것이 의아했지만 그 의아함은 머리 뒤켠으로 흘러가 버렸다. 지하철 특유의 누리끼리한 쇠 냄새에 쓸쓸함이 묻어 나왔다.

나는 습관적으로 가방에서 책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친구의 열렬한 추천에 못 이겨 대출한 <인간실격>이었는데, 솔직히 내 취향에 맞진 않았다. 주인공의 파멸은 지독할 정도로 비현실적이었다. 물론 나도 살아오면서 대인관계에 어려움을 겪긴 했다. 하지만 적어도 나는 저렇게까지 심연으로 들어가진 않는다. 적당한 가면을 골라 쓰고 집으로 돌아오면 다시 벗어둔다. 그에게 이입할 수 없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책을 덮고 멍하니 창밖으로 휙휙 지나가는 터널의 불빛을 보았다.

어느새 이번 역이 홍대입구역이라는 방송이 흘러나왔다. 나는 허겁지겁 책을 다시 가방에 집어넣고 지하철에서 빠져나왔다. 읽던 페이지에 책갈피를 꽂아두지 않았다는 것이 뒤늦게 떠올랐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더는 안 읽을 생각이었다.


9번 출구로 나오니 아까보다 더 차가워진 바람이 얼굴의 굴곡을 타고 이곳저곳을 훑으며 지나갔다. 왠지 모르게 마음이 들떠오기 시작했다.

역시나 홍대에는 사람이 없었다. 평소라면 인파로 가득 찼어야 하는 거리인데, 지금은 시야에 들어오는 사람들을 두 손으로 셀 수 있을 정도라 기분이 묘했다.

골목골목마다 들어선 가게들의 전광판이 선선한 공기를 가르며 형형색색의 빛을 뽐내고 있었다. 발을 디딜 때마다 발걸음 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지는 듯했다. 검회색 콘크리트 바닥에 식은 담재꽁초들이 길 잃은 흰개미 떼같이 흩뿌려져 있었다. 어디선가 매캐한 냄새가 났다. 텁텁한 말보로의 향이었다.

무작정 발이 닿는 대로 걸음을 옮겼다. 저번 봄에도 이 부근에 온 적이 있었다. 왜 여길 왔었더라? 그때도 정처없이 거리를 쏘다니다 때마침 바로 앞에 있던 LP 바에 들어갔었다. 오늘도 그 LP 바에 가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좁은 계단을 올라 2층으로 향했다. 위쪽에 조그마한 창문이 달린 나무문을 여니, 어두침침하고 우울했던 복도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가 나를 감쌌다.

은은한 조명의 누런 빛이 10평 남짓 되는 공간 곳곳에 스며들어 있었고, 그에 어울리는 목재 인테리어가 푸근한 느낌을 주었다. 벽면, 테이블, 의자, 심지어 천장까지 고풍스러운 나무로 만들어져 있었다. 테이블 하나를 통째로 차지한 커다란 스피커는 보스턴의 하드록을 우렁차게 내뿜고 있었다.

지난번에 왔을 때도 느꼈던 거지만 정말 마음에 쏙 드는 곳이었다. 홍대 외곽에 자리 잡고 있어 손님이 적은 탓에 혼자 여유를 즐길 수 있고, 사장님의 선곡 센스가 뛰어나서 새로운 음악을 발견하는 맛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오늘 가게에 있는 손님은 나를 포함해도 네 명 밖에 없었다. 구석의 4인용 테이블에는 대학생으로 보이는 커플이 자기들끼리 속닥대고 있었고, 바텐더 석에는 젊은 여자 한 명이 칵테일을 마시고 있었다. 나는 그 여자와 의자 하나를 띄워 앉곤 메뉴판을 둘러봤다.

나는 술에 대해선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무슨 무슨 칵테일이니 하이볼이니 하는 것들의 이름만 봐서는 어떤 맛일지 전혀 짐작이 가질 않았다. 소주 한 잔만 마셔도 취하는 몸이니 술에 관심이 없기도 했다. 그래서 그냥 생맥주 500cc 한 잔을 주문했다. 저녁식사를 걸렀지만 배가 고프진 않아서 안주는 따로 시키지 않았다.

금방 나온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곤 포스트잇에 신청곡을 몇 개 적어 사장님에게 건넸다. 신청곡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벽면에 걸려있는 LP를 구경했다. 비치 보이스, 마이클 잭슨, 프린스, 좀비스. 다양한 아티스트의 음반이 있었다. 그중 데이비드 보위의 앨범 하나가 눈에 띄었다.

테이블에 앉아 왼쪽 어딘가를 눈을 부릅뜨고 쳐다보며 기괴한 손동작을 하는 보위의 모습이 흑백으로 그려져 있었다. 전에도 몇 번 들어본 앨범인데, 곡들 자체도 훌륭했지만 나는 앨범 커버가 더 기억에 남았다. 뭔가에 홀린 듯한 그 오드아이를 보고 있자면 이상하게 섬찟하곤 했다. 무엇을 발견했길래 그렇게 뚫어져라 한 곳을 계속 응시하고 있는 걸까. 나는 그의 깊은 눈 속으로 빨려 들오갈 것만 같은 야릇한 느낌에 휩싸였다.


익숙한 반주가 들리기 시작했다. 내가 신청한 OMD의 <수버니어>였다. 촌스러운 듯 하면서도 세련된 신디사이저가 매력적인 곡이다. 그때 옆자리의 여자가 말을 걸었다.

“이 곡, 그쪽이 신청한 거예요?”

음악에 집중하고 있었던 터라 그 말이 나를 향한 것임을 뒤늦게 깨닫고 얼버무리며 대답했다.

“네. 아는 노래예요?”

“아뇨. 그건 아닌데, 듣다 보니 제 취향에 맞아서요.”

“아 그렇구나.”

나는 말을 별로 하고 싶지 않았다.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러 온 것일 뿐이었는데 대화가 내 의도를 망치고 있는 것 같았다. 이런 내 마음을 알 리가 없는 그녀는 계속 대화를 이어갔다.

“음악 좋아하시나 봐요. 이거 별로 안 유명한 곡 아니에요?”

이 여자는 분명 음악의 ‘ㅇ’자도 모르는 것이 분명하다. 뉴 오더, 티어스 포 피어스 같은 밴드를 알긴 할까. 나는 마지못해 대답했다.

“아, 네. 좋아하는 편인 거 같은데요.”

“그럴 거 같았어요. 여기 자주 오세요?”

“아뇨. 오늘이 두번째인가•••.”

“저는 자주 오는 편이거든요. 못해도 이 주에 한 번? 여기 분위기가 되게 좋잖아요. 솔직히 전 음악은 잘 모르지만, 여기서 나오는 음악들은 항상 맘에 들어요.”

나는 맥주잔을 입에 갖다 대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그녀 입에서 나온 말 중 가장 가치 있었다.

말 없이 고개만 끄덕이자,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던 그녀가 질문했다. “혹시 몇 살이세요?”

내 나이가 왜 궁금한 걸까. 나는 보통 처음 만난 사람의 나이가 궁금하지 않다. 나이뿐일까? 그냥 사람 자체가 궁금했던 젇이 없었던 것 같다.

“23살이요.”

“음. 그거 보단 어려 보였는데. 그럼 저는 몇 살 같아요?”

그녀는 싱긋 웃어보였다. 어딘가 일그러져 있는 듯한 기분 나쁜 웃음이었다.

“20살? 아니, 21살?” 대충 떠오르는 숫자를 뱉었다. 오늘이 21일이었던 것 같다. 그처자 웃음기 가득한 표정으로, “고마워요. 그렇게 말해줘서. 우리 동갑이에요.”

“아하?”

“제가 좀 어려 보이는 편이긴 하죠?”

본인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올 수가 있는 건가. 속이 조금 메스꺼웠다. 급하게 마신 맥주 탓인지, 그녀 때문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어쩌면 둘 다였을지도.

“네. 듣고 보니 그런 거 같네요.” 나는 쓴웃음을 지며 대답했다.

“동갑이니까 말 편하게 할까요?” 내 쓴웃음을 진짜 웃음으로 잘못 본 탓인지 그녀의 미소가 이에 화답하듯 더욱 밝아졌다.

“그래. 말 편하게 하자.”

내키진 않았지만 별수가 없었다. 아무리 사람을 싫어하는 나여도 웃는 얼굴에 대고 침을 뱉을 순 없지 않은가.

“좋아. 너 대학생이야?”

“그치?”

“학교 어디 다니는지 물어봐도 돼?”

기가 막혔다. 경찰서에 가본 적은 없지만, 강력계 형사에게 취조를 당하는 범죄자의 마음을 이젠 알 것도 같았다. 나는 아무런 죄 없이 당하고 있다는 점이 다르긴 하지.

“XX 대 다녀.”

“아, 진짜? 난 ○○ 대 다니는데. 바로 옆이잖아. 버스 타고 한 30분 정도 거리였나?”

바로, 옆이라는 단어의 정의가 내가 모르는 새에 바뀐 것이 틀림없었다. 나는 미지근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목이 타올라 맥주잔을 들어 밑바닥이 보일 때까지 틀이켰다. 다크 초콜릿 같이 쓰고 진한 보리 향기. 취기가 확 올라 어지러웠다.


대화하면서 처음으로 그녀를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얄쌍한 얼굴에 검은 긴 생머리. 아니, 누르스름한 조명 때문에 정확한 색상을 알 순 없어서 내 맘대로 그렇게 정했다. 그리고 고양이 캐릭터가 그려져 있는 흰색 링거 티셔츠, 통이 큰 흑색 데님 바지. 딱히 이렇다 할 특징이 없어 10분쯤 지나면 잊어버릴 것만 같은 사람이다. 티셔츠의 고양이 캐릭터라면 모를까.


어느새 여자의 잔도 비어 있었다. 남은 칵테일 몇 방울이 지중해의 바다와 같은 청량한 파란색으로 빛났다. 나는 오랫동안 그 바다를 바라보았다. 뭔가 이상했다. 그 속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물고기, 해파리, 거북이는커녕 해초 한 포기 조차 자라 있지 않았다. 뭐든 하나라도 찾고 싶어 조바심이 났다. 점점 깊숙이 들어갈 수록 푸른색이었던 물이 칠흑 같은 검은색으로 물들었다.

바닥이 보이지 않는 깊은 심해. 그곳에는 귀가 먹먹해질 것 같은 침묵만이 존재했다.


“무슨 생각해?”

순간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암흑이 걷히고 온몸에 백열등의 주황빛이 스며들었다. 여자가 호기심 가득한 아이처럼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스피커에서는 음울한 바로크 팝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내가 멍한 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녀가 입을 뗐다. “그거 마시고 취한 거야? 너, 술 잘 못 마시는구나.”

여자는 핸드백에서 담뱃갑과 라이터를 꺼냈다. 핸드백을 여닫을 때 맑은 똑딱 소리가 났다. 그녀는 연필심같이 얇은 담배를 물곤 라이터로 몇 번 칙칙 소리를 냈다. 불이 붙자 한 모금을 깊이 빨아들이고 희뿌연 연기를 내뿜었다. 연기는 페이드아웃되는 음악처럼 저 멀리 부유하며 희미해졌다.

“재수할 때부터 담배를 피기 시작했어.” 3분 정도의 정적이 흐르고 그녀가 말을 시작했다. “가고 싶었던 학교가 있었는데, 몇 점 차이로 아쉽게 떨어졌거든. 막상 그땐 별로 슬프다거나 하진 않았어. 한 번 더 하면 여유롭게 붙을 거란 자신감이 있었으니까. 막상 재수를 시작하니 힘들었던 건 공부가 아니라 주변의 시선이었다? 주위 사람들이 겉으로는 북돋아 주고 응원해주는데, 그게 나한텐 오히려 압박으로 느껴졌어.”

나는 바삐 움직이는 그녀의 입술을 보았다. 단어 하나하나를 내뱉을 때마다 통통한 입술이 펴졌다거 오므라지길 반복했다. 그에 따라 입꼬리의 주름이 줄넘기하듯 진동했다. 지금까진 몰랐는데, ‘ㅁ’ 발음을 할 때 진짜로 입이 ‘ㅁ’ 모양이 되네. 내 입도 저렇게 움직일까?

“엄마 아빠가 믿는다는 말이... 그냥 돈 아깝다는 소리로 들리고. 대학 간 친구들이 장난치는 것도 다 나 비웃는 것 같고.

지금 생각해보면 그냥 나 혼자 피해의식에 찌든 거였는데, 그땐 진짜…”

음. 쉽지 않았을 것 같긴 했다. 근데 그 이상의 감흥은 없었다.


그녀가 말하면서 빈 칵테일 잔을 기울였다. 잔의 기울기가 변할 때마다 손등의 힘줄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피부 안에 지렁이라도 들어있어 속살을 이곳저곳 헤집고 다니는 것 같았다. 그 지렁이가 내 몸속에도 꿈틀대고 있을 것만 같아 속이 더 안 좋아졌다.

칵테일 잔에 있던 물방을들이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그때부터 마음이 병들었던 것 같아. 쥐가 내 안의 무언가를 한 조각도 남김 없이 다 먹어치워버린 듯한 느낌? 내 가슴 한구석이 텅 비어버린 것 같았어.

그렇게 된 이후로 히키코모리처럼 방 안에서만 틀여박혀 살았어. 친구들이랑 얘기하고 싶지 않아서 인스타도 지우고. 심지어 가족들이랑도 제대로 대화하지 않았지. 사람이랑 마주하는 거 자체가 두려웠던 거야…” 이렇게 말하곤 그녀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말 그대로 공허함이 묻어나오는 웃음이었다.

공허함이라…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녀의 이야기에는 나랑 비슷한 구석이 있었다. 마음이 텅 비어버린 느낌이라든지, 누구와도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은 거라든지. 요근래 아주 뼈저리게 느끼고 있건 감정들이었다. 하지만 애써 부정하고 싶었다. 나는 저 여자랑은 다를 거라고, 최소한 나는 보다 더 나은 삶을 살고 있다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고개를 끄덕였던 것 같다. 그녀가 계속 말을 이어갔다.

“근데 계속 이렇게만 살 순 없잖아? ‘원하던 대학에도 붙었는데 혼자만의 세상에 처박혀 있기에는 삶이 아깝다.’ 어느새 이런 생각이 들더라.

내가 너한테 너무 부담스럽게 친한 척한 거 같은데, 맞지? 그렇게 느꼈다면 미안해. 하지만 이해해줄 수 있지? 왠지 그런 느낌이 들어. 너라면 이해해주고 대수롭지 않게 넘어갈 것 같아.”

나는 이런 유의 인간들의 정말 싫다. 타인에 대해 자기 멋대로 생각하고 자기 멋대로 규정해버린다.


그녀의 목에서 정맥이 규칙적으로 꿈틀댔다. 한 번, 두 번, 세 번… 스무 번까지 세다가 그만뒀다. 왠지 그녀는 활기찬 생명력으로 넘쳐나고 있는 것 같은데, 내 맥박은 멈춰버린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내가 이렇게 의도적으로 초면인 사람한테 말 걸고 친해지려고 하는 게 다 그런 이유에서야. 공허함을 이겨내기 위해.

다행히 조금씩 진전이 있는 것 같아. 반 년 전이랑 비교하면 기분도 상쾌하고. 또 이젠 밖에도 잘 돌아다니잖아?”


순간적으로 오른쪽 관자놀이 부근이 아파왔다. 머릿속에서 수백 개의 녹슨 못이 사방을 찔러대고 있는 듯한 통증이었다.

시야가 흐릿해졌다. 망막에 짙은 안개가 낀 듯한 느낌이었다.

눈을 찔끔 감고 머리를 부여잡고 있는 나를 보곤 그녀가 깜짝 놀라 눈이 땡그래졌다. “괜찮아? 술을 그렇게 급하게 마시니까 그렇지. 나 화장실 다녀올 테니깐 잠깐 나가서 바람이라도 좀 쐬고 오는 게 어때?”라고 했던 것 같다. 그녀의 말을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녀가 일어나면서 의자가 뇌를 포크로 긁어내는 듯한 끼익- 소리를 냈다.


앞 테이블의 나뭇결이 파도 치듯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잔잔한 물결이었는데, 이내 폭풍우 치는 날의 거센 파도로 변해 미친듯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진짜 배라도 탄 듯이 속이 울렁거렸지만 보통의 배멀미와는 달랐다. 할 수만 있다면 오장육부 모두를 토해버리고 싶었다.

파도 때문인지 식은땀인지는 몰라도 온몸이 젖어가는 느낌이 들어 덜덜 떨었다. 구석의 대학생 커플은 아직도 속닥대고 있었다.

계속 보고 있다간 정말로 머리가 어떨게 되어버릴 것만 같아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목뼈 사이사이에 500원짜리 동전이라도 끼워져 있는지 잘 되지 않았다.

눈 앞에는 아까 봤던 데이비드 보위의 앨범이 있었다. 하지만 내가 알던 모습과는 많이 달랐다. 그가 나를 쳐다보며 비웃고 있었다. 입꼬리가 거의 찢어질 정도로 올라가 있었다.

눈동자는 나를 향하고 있었다. 살의와 조소 사이 어딘가에 있는 기묘한 눈빛이었다. 전에는 그의 오드아이에 대해 별 생각이 없었는데 지금은 뭐랄까,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는 무언가가 아닌 것 같았다. 차라리 악마의 눈동자라고 말하는 것이 훨씬 적합해 보였다.

식칼을 비벼대는 듯한 소름돋는 웃음소리가 귀에 맴돌았다. 머리를 격하게 흔들어봐도 사라지지 않았다. 양쪽 귀를 뜯어내 변기통에 던져놓고 물을 내려버리고 싶을 지경이었다.


주변 공기가 탁해진 것 같았다. 여자가 피던 시원한 멘솔 담배의 잔향이 남아있었다.

고막을 바늘로 쑤셔대는 듯한 이명과 희미한 음악소리가 겹쳐 어지러웠다. 무슨 음악인지 알아내려 애를 써도 계속해서 울려대는 삐- 소리 때문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주황색 조명에 주위의 풍경이 녹아내렸다. LP, 턴 테이블, 계산대, 사장님, 대학생 커플, 모든 것이 하나로 뭉쳐 기괴한 형상을 만들었다. 나까지도 거기에 섞여 다 함께 융합되는 것은 아닌지 불안해졌다.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도망가자.


이런 결심을 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테이블 위에 얌전히 놓인 여자의 담배와 일회용 라이터가 보였다.

그것들을 주머니에 쑤셔놓고 나무문을 박차며 달려나갔다.


밖에서는 세찬 비가 내리고 있었다. 바람은 더이상 불지 않았지만 얼음장같이 차가운 빗물이 전신에 스며들어 오한이 나기 시작했다.

LP 바에서 나와 여기 ‘홍대 걷고싶은거리’로 오기 까지의 기억이 없다. 숨이 차는 느낌과 내 구두 앞코에 묻은 정체 모를 검은 얼룩만이 그 여정을 증명하고 있을 뿐이었다.

무릎 쪽이 아픈 걸 보니 계단을 내려갈 때 한 번 넘어졌었나보다. 그럼에 멈추지 않고 한참을 달렸다. 수천 개의 빗방울이 얼굴을 사정없이 가격했다. 앞머리가 젖어 이마에 찰싹 들러붙었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저 속으로 <수버니어>의 멜로디만 반복해서 되내었다.

‘올 아이 니드 이즈, 코오디네이션...

아이 캔트 이매진, 마이 데스티네이션…’


양옆으로 형형색색의 네온사인들이 끊임없이 지나갔다. 네온사인의 빛이 빗방울에 하나둘씩 번졌다. 각기 다른 색상의 광선들이 물감처럼 서로 섞이고 새로은 빛깔을 만들어 한 폭의 수채화가 되었다.

바닥에 고인 물웅덩이에는 외부의 모든 것들이 반전된 하나의 세계가 비춰지고 있었다. 웅덩이를 밟을 때마다 첨벙 소리와 함께 그 세계가 산란되어 사라지고, 다시 일렁이며 거울상으로 채워졌다.

발바닥에는 물먹은 양말의 감각만이 존재했다. 마치 발바닥 전체에 물집이 잡힌 것 같은 찝찝한 느낌이었다.


‘홍대 걷고싶은거리’에는 사람이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전광판이 현란하게 반짝이고 상가의 스퍼커에는 최신 유행 가요가 쩌렁쩌렁 울려퍼지는데, 이곳에는 오직 나만이 있을 뿐이었다. 아까 웅덩이를 밟았을 때 그 거울상의 세계로 들어갔던 것은 아닐까.

무작정 달리다가 길 한가운데에 서있던 입간판과 부딪혀 넘어지고 말았다. 그 상태 그대로 길바닥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았다. 빽빽한 먹구름의 틈새로 어스름한 달빛이 새어나왔다. 두꺼운 빗방울에 달빛이 위태롭게 흔들리고, 부서졌다. 입간판의 차가운 플라스틱 질감이 뺨에 닿자, 아주 오래전 바닥에 처박혔던 감각이 젖은 흙 냄새를 타고 올라왔다.

내가 유치원을 다녔을 때의 기억이다. 다섯 살 아니면 여섯 살 때였던 것 같다. 친구들이 태권도장이나 합기도장을 다닐 때 나는 ‘태껸’이라는 무술을 배웠다. 유치원 수업을 마치면 바로 앞에 있는 작은 한옥에서 ‘태껸’의 정신과 기본 동작 따위를 익히곤 했다. 배웠던 내용들은 이제 희미해졌지만, 그 한옥의 고풍스러움만큼은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있다.

단풍이 절정에 오른 어느 가을날, 우리는 ‘태껸’ 선생의 뒤를 따라 수련 차 뒷산에 올랐다. 낙엽을 밟으면 기분 좋게 바스락거리며 부서지고, 따스한 햇살은 도복 위로 튀어 나온 목더리에 스며들었다.

동네 뒷산 답게 그리 높지 않은 정상을 찍고 하산하는 길이었다. 알록달록 단풍이 물든 풍경을 감상하며 걷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다. 넘어지면서 바닥에 굴러다니던 밤송이에 손바닥이 찔렸다. 크고 작은 가시들이 박혀 손바닥이 쓰라렸다.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고 있는데, 선생과 다른 아이들은 내 쪽을 돌아보지도 않고 계속 내려가고 있었다.

그때 내가 어떤 심정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지금 그 일을 생각해보니 당시의 마음을 어느정도는 알 것도 같았다.


…고개를 돌려보니 입간판이 쓰러져 있었다. 쓰러진 입간판에는 ‘이든 헌팅포차, 100% 매칭 보장, 2F’ 따위의 문구가 적혀 있었다. 나는 피식 헛웃음을 지으며 땅을 짚고 일어섰다.

입안에서 비릿한 피 냄새가 났다. 미디움 레어 스테이크를 먹었을 때 느꼈던 맛이랑 비슷했다.

몽둥이로 뚜드려 맞은 듯이 온몸이 아팠다. 차가운 공기를 집어삼킬 때마다 습기로 가득찬 폐가 얼어붙는 것 같았다. 숨을 고르기 위해 앞에 보이는 이자카야 가게의 차양 밑으로 들어갔다.


외부가 일본풍으로 깔끔하게 꾸며진 가게였다. 외벽은 옅은 갈색의 매끔한 목재로 빈틈없이 도배되어 있고, 양쪽에는 온화한 오렌지색 빛을 발산하는 풍등이 흔들리고 있었다. 커다란 창문에는 얇은 창살이 가로세로로 일정한 간격을 두고 나있었다. 그 때문에 하나의 창문이 아니라 마흔 개의 작은 정사각형 창문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 옆에 뚫려 있는 출입구는 전체적인 분위기랑 어울리지 않는 통유리문이었다. 유리에 비쳐 보이는 내 모습이 한결 더 초라했다.

차양의 모서리에는 후링(風鈴)이 달려 있었다. 쉴 틈 없이 내려치는 빗방울에 짧게 끊어진 종소리가 연이어 울렸다. 이에 응하듯 기와로 된 차양이 비를 맞으며 둔탁한 선율을 연주했다. 소프라노와 베이스가 어우러진 하나의 아리아였다.

멍하니 처마 끝으로 쏟아져 내리는 무수한 물줄기를 바라보았다. 끊기지 않고 바닥까지 쭉 이어진 물줄기들이 들쑥날쑥한 간격으로 흐르고 있었다. 그 물줄기들이 마치 나를 가두고 있는 수은빛 쇠창살같이 느껴졌다.


불현듯 주머니에 들어있는 담배의 존재가 떠올랐다. 그것은 일종의 기념품이 된 것처럼 당당히 주머니의 한 공간을 차지하고 있었다. 담배를 피워본 적은 없지만, 무언의 압박이 한번 피워보고 싶다는 충동을 불러일으켰다.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이미 눅눅해진 담뱃갑과 미끌미끌한 라이터가 잡혔다. 그것들을 꺼내는 내 손이 달달 떨렸다. 하마터면 떨어뜨릴 뻔했다.

담뱃갑이 이상할 정도로 가벼웠다. 오래된 소파를 갈라내고 꺼낸 새하얀 솜을 들고 있는 느낌이었다. 꾸껑을 열어보니 연초 한 개비만 덩그러니 들어있었다. 다행히 심하게 젖어있진 않았다.

담배를 두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냄새를 맡았다. 박하 향이 났다. 후각을 난타하는 강한 자극에 욕지기가 솟았다. 한 번 심호흡하고 필터 쪽을 입으로 물었다.

라이터를 손바닥 위에 두고 찬찬히 살펴보았다. 동그란 부싯돌을 굴려 불꽃을 내는 일회용이었다. 주위가 어두워서 몸통의 색깔을 분간해낼 수가 없었다. 왼쪽으로 기울이면 분홍색, 오른쪽으로 기울이면 연초록색으로 변했다. 애초에 하나로 정해져 있는 색깔이 없었는지도 몰랐다. 그저 반투명한 플라스틱이라는 것만을 알 수 있을 뿐이었다.


라이터를 꽉 붙잡고 연초의 끝에 갖다 댔다. 엄지로 부싯돌을 굴렸다.

칙. 칙.

불에 달궈진 철사같은 가느다란 스파크가 명멸하며 튀어 올랐다. 스파크가 생겼다가 금방 사라져 그 잔상만이 눈에 남았다.

칙. 칙.

불이 붙지 않았다. 이 정도로 심하게 젖어 있진 않았던 것 같은데. 기름은 충분하다.

치익. 칙.

이러다가 지문이 모두 갈려 나갈 것 같아서 그만뒀다. 평소라면 짜증이 났을 법하지만, 화가 나진 않았다.

그저 공허했다.


내 가슴 속을 들여다 볼 수만 있다면, 그 속에는 우주처럼 끝없이 펼쳐진 광활한 암흑만이 있을 것 같았다.

빛 하나 새어 나오지 않아 공간감 조차 느껴지지 않는 어둠의 공간. 나는 그곳에서 줄곧 헤매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라이터를 집어 빗속으로 던졌다. 공기 입자들 사이로 활공하는 라이터의 모습이 빗방울에 가려지며 굴절됐다.

한참이 지나도 바닥에 부딪히는 충돌음이 들리지 않았다.


가을의 초입을 알리는 거센 비는 잦아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저 멀리서 구급차의 사이렌 소리가 빠르게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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