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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ICK e Y Apr 27. 2023

초급자도 할 수 있다는 착각

²⁰²³⁰⁴²⁶ 요가일기 ժɑყ.3

요가원에 체험 신청한 수업은 '하타'였다. 시간표에서 연두색으로 표시되어 있는 시간은 난이도가 낮고 천천히 진행돼 상대적으로 편안한, 즉 초급자를 위한 수업이다. 하지만 이 수업은 연두색 표시가 되어 있지 않았다.


"하타수업은 오전 프로그램 중에 난이도 중상의 수업이에요.

처음이시라면 수업 난이도가 적당하실지 한번 더 여쭤봅니다."


일단 내가 할 수 있는 요일, 시간대엔 연두색 수업이 없었고 요가는 난이도가 있어도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면 될 거라 생각했기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두 번째 수업인 '하타 플로우'도 중급 수업이었고 이어서 셋째 날은 남편의 배려로 저녁 마지막 타임을 들어갈 수 있었는데, 이 요가 테마 또한 '하타 플로우'였기에 선생님은 다르지만 비슷한 분위기일 거라 짐작했다.


요가는 개인의 수련이라고 내 모습에만 집중하면 되는 거라는 마음가짐으로 요가원을 들어갔지만 북적북적 일을 마치고 온 어리고 어여쁜 수강생들을 마주하니 나도 모르게 움츠려 들었다. 게다가 자기 관리를 철저하게 할 것 같은 깔끔하게 정돈된 스타일의 남성분들도 계셔서 동떨어진 다른 현실 세계에 잘못 발을 들인 듯했다. 매트를 깔고 벽면 거울을 흘끗 보니, 내게 주어지지 않은 저녁 요가를 할 수 있는 시간이라며 헐레벌떡 대충 걸치고 나와 맨 얼굴에 머리띠 질끈 올린 아줌마가 보였다. 마음이 쪼그라들었다.


나만 보고 내게 집중해야 하건만, 중급 자세를 곧잘 해내는 주변 수강생들을 흘끔이며 어느새 '저 사람도 애 엄마 같은데, 이렇게 저녁 시간에 퇴근하고 요가를 할 수 있구나'는 잡념에 빠지고 있었다. 물론 어떤 수업이든 자신이 할 수 있을 만큼 최선을 다해 조금씩 늘려가면 되지만 수업 자체가 중급 이상의 동작으로 이뤄졌기 때문에 그만큼 명상 시간이 많아졌다. 분명 오전 수업과 같은 이름의 '하타 플로우' 시간이었는데 대상이 달라지니 수업 난이도도 훅 올라간 듯했다.


그래도 요가는 요가인지라, 계속 주변을 보지 않고 나만 보려고 노력하니 내게도 곧 안정이 찾아왔다. 쉽진 않았지만 고단한 하루를 마무리할 수 있어서 감사했다. 그 새벽엔 아이가 기침을 하느라 잠을 푹 자지 못했다. 엄마 또한 할 일이 있기에 유치원을 결석하는 일은 거의 없으나 저번 주말 글램핑, 이번 주말엔 카라반 캠핑, 그리고 바로 유치원 소풍이 있어 아이에게도 쉼이 필요할 거라 하루 쉬었다. 동네 소아과보다 큰 어린이병원에 후딱 다녀와서 딸과 신나는 하루를 보내리라 기대하고 있었는데 웬걸 어린이병원에서 아침부터 오후 4시까지 대기하고 진료보고 하루를 모조리 까먹었다. 오전부터 아빠 도움 없이 아이를 데리고 차를 끌고 만차 문제를 해결하고 번호표를 받고 또다시 기다렸다가 진료 시간에 다시 오고를 반복하다 보니, 손가락에 잠시 찌릿 마비가 왔다. 뒷골이 땅겼다. 오랜만에 엄마와 풀타임을 보내는 하루인데 다정함이 아닌 건조한 분위기로 모녀의 공간을 채우고 말았다.


수업 도중 자세를 취하면 잠깐 저릿함이 스치기도 하며 낮 시간에 느꼈던 찌릿한 기억이 떠올랐다. 순간 무서웠지만 금세 풀어졌고 굳었던 몸도 속상했던 마음도 차분해졌다. 시간상 어쩔 수 없었으나 연두색 수업을 들었으면 좋았을 것 같다. 난도가 있어도 천천히 할 수 있다고 착각했던 자신이 부끄러웠다. 영어 원서도 처음부터 어려운 원서를 사전 찾아 읽는 것보다는 자신의 수준에 맞는 책을 술술 읽어가며 레벨을 높이는 재미를 느끼는 게 중요하다. 즐겁다고 느낄 때 실력도 쑥쑥 늘어간다. 아, 내가 간과했다. 잘 생각해 보면 인생에서 난이도를 맞추는 게 제일 어렵다. 그 난이도는 바로 초심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연두색 수업을 들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나의 시간은 나의 것이 아니기에 거의 불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그래도 이제는 시간이 날 때마다 틈틈이 초급 요가 수업을 들으려고 노력해야겠다. 여전히 믿을 수 없지만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 내 얼굴도 무릎에 닿는 날이 오겠지. 과연.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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