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아니었나?
이미지가 영화는 아닌데, 다큐와 픽션의 경계인가.
저 아이의 연기는... 아니지, 저건 연기가 아니지 않나.
꼭 저렇게 살아본 자의 눈빛, 표정, 몸짓, 실루엣...?!?’
영화가 시작하고 처음 몇 분은 꾀죄죄하게 삶에 찌들 때로 찌든, 유치가 다 빠져 열두 살은 됐을 거라는데 실제로는 예닐곱 살쯤 돼 보이는 아이, '자인'을 바라보며 충격을 받다가, 영화가 끝나자 두통이 올라와 한동안 가시지 않았다.
수업을 위해 이 영화를 보게 됐지만, 나는 이런 유형의 영화를 보고 싶지 않다.
괴롭고, 고통을 감상한다는 느낌이 들어서다.
그래서 이런 영화를 볼 때 팝콘이나 콜라를 먹으면서 보는 사람들을 보면 너무 낯설다. 대체 어떻게 이 두 행위가 가능할까.
내 정서로는 양립불가이다.
그렇지만 나도 별반 다르지 않다.
나 역시 영화관에서 편안하게 그들의 고통을 감상하고 있는 셈이니.
수업에서 말과 글을 넘어, 좀 더 실제를 지각하게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영화와 다큐를 찾아본다. 그러다 보니, 일반적인 사람들이 잘 보지 않는, 고통스럽고 아프고 괴롭고 힘들고 두통이 올라오는 영화와 다큐를 오랜 세월, 많이 본 편이다. 그래서 이런 유형의 영화를 볼 때면, 저절로 다가올 고통과 아픔과 괴로움과 고뇌에 대한 심리적 거리두기를 한다. 이번에도 그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몇 번을 벼르다, 마음 준비를 하고 봤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영화가 끝나도, 한참 동안 두통이 가시지 않았다.
심리적 거리두기를 실패한 이유를 생각해보니, 126분의 러닝타임 동안에 대부분 '자인'과 동생들, 아기 요나스와 같은 ‘아이들’을 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거기 있으면 안 될, 거기 가면 안 될, 그렇게 하면 안 될 일들로 버거워하는 아이들을 보고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또 '자인'의 11세 여동생을 강제 조혼시킨 부모, '자인'에게 거짓말을 시켜 약에 포함된 소량의 마약을 약국마다 전전하며 구매하게 해서, 그걸 물에 녹여 그 물에 옷을 적셔, 다시 말린 옷을 소년원에 있는 조카에게 넣어주며, 소년원에 갇힌 아이들을 대상으로 돈벌이에 이용하는 부모, 아동학대와 아동노동 착취를 하는 부모, 미등록 이주노동자와 난민 대상으로 ‘사업’을 하는 브로커 때문이었다.
'자인'의 주변에는 이 아이의 인생이 부조리하고 불합리한 상황에 놓여 있다는 것을 인식시켜 줄 어떤 어른도, 어떤 세계도 없었다. 지금도 이 세계, 아니 이 나라 어느 곳에서도 일어나고 있는 강렬한 생의 비루함...
그런 세계에서 자인이 또 다른 부조리한 환경으로 튕겨져 나온 계기는, 여동생이 팔려가는 것을 악을 쓰며 막고자 했지만 끝내 막을 수 없었던 깊은 절망. 그 감당할 수 없는 절망에서 도망치듯 가출 버스를 탔기 때문이다.
버스에서 태어나 처음 호의적인 대화를 나눠본 할아버지 덕에, 그가 근무하는 놀이공원에 따라 내린 자인. 허망하고 눈물 젖은 얼굴로 놀이공원에 놓인다. 자인이 서 있는 놀이공원은 더 이상 꿈과 희망의 요술 나라가 아니다.
그곳에서 자인이 만난 귀인은, 미등록 이주노동자이자 근무 중에는 화장실에서 아기 요나스를 숨겨 돌보는 미혼모. 그녀도 위조 신분증을 갱신하려면 큰돈이 필요한 위태로운 신세.
자인은 배고파서 그녀에게 도움을 청하다, 그녀의 호의로 그녀의 집에서 아기 요나스를 돌보게 된다. 그러나 이 작은 안도의 시간도 잠시. 그녀는 미등록 이주노동자로 적발돼 구금되고, 이를 까마득히 모르는 열두 살 자인은 이제 갓 돌 지난 요나스의 눈물겨운 보모 노릇에 처한다. 할 수 있는 한 끝까지 요나스를 포기하지 않으려고 억척스럽게 지켜내려 하지만, 예닐곱 살 체격에 아무 배경도, 돈도 없는 열두 살 아이가 돌보는 데는 한계가 있다.
결국 눈물을 머금고, 아기 요나스를 좋은 가정에 보낸다는 난민 브로커에게 속아 아기를 넘기고, 자신은 스웨덴에 보내준다는 말에 속아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 줄 서류를 찾아 집으로...
다시 돌아온 집은 떠나기 전과 다를 바 없다. 아니다...! 팔리다시피 간 동생이 2, 3개월 만에 임신을 하고 멈추지 않는 하혈 끝에 병원 문턱도 넘지 못하고 사망했다. 이를 알아챈 자인은 흥분한 채 칼을 빼들고 동생을 임신시킨 그놈을 찾아가 찌른다.
소년원에 간 자인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소년원에서 자신의 세계와 다른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일깨워준 계기를 만난다.
작은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는 한 프로그램, window of freedom. 이 프로그램을 통해 자신의 삶이 아동 학대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을 눈치챈 것이다. 방송국에 전화를 건 자인은, 생방송 중에 부모를 고발한다. 자신을 세상에 태어나게 한 죄목으로.
그리고 법정에 서서 판사에게 자신의 부모가 아이를 그만 낳게 해 달라고 요청한다. 지금 엄마 뱃속에 있다는 아이도 자신처럼 될 거라면서.
믿기지 않겠지만, 한국에도 레바논의 '자인'과 같이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아이들'이 있다. 한국의 미등록 이주아동 중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출생등록을 할 수 없는 아이들이다.
오래 전 어느 회의에서, 한 난민 활동가가 출생등록을 못한 아기가 병으로 죽은 이야기를 들려줬다. 출생등록을 못해 의료지원에도 극심한 어려움을 겪었고, 장례조차 어려웠던 사례였다. 이야기가 끝나자 일순간 참담한 침묵이 흘렀다. 이 세상에 한 생명이 태어났는데, 그 생명이 태어났다는 출생사실조차 확인받지 못한 채, 이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한국에 그런 아이들이 최소 2천에서 최대 2만 명이나 존재한다고 추정한다.
(이 아이들을 위해 보편적 출생 신고 네트워크 링크를 클릭하셔서 서명을~ http://www.ubrkorea.org/)
마지막 장면에서, '자인'의 얼굴을 찍는 사진사가, 좀 웃으라고, 장례식에 사용할 사진이 아니라 신.분.증을 만들 때 사용할 사진이라고 할 때, 비로소 안도했다. 그리고 '자인'의 얼굴에 핀 미소를 마주하자 마음이 펴졌다. 저렇게 이쁜 아이의 얼굴인데, 저렇게 미소 지을 수 있어야 하는데...
주인공 '자인 알 라피아'는, 실제로 생계를 위해 여러 일을 전전하던 시리아 난민으로, 베이루트 시장에서 배달 일을 하다 캐스팅됐고, 자인의 여동생으로 나온 '하이타 아이잠'도 베이루트 거리에서 껌을 팔다 캐스팅됐다고 한다. 또 자인이 돌본 아기 요나스 역의 '트레저'도 촬영 중 친부모가 체포돼 캐스팅 감독과 3주를 보냈고, 아기 요나스 어머니 역의 '요르다노스 시프로우'도 일찍부터 생계를 위해 길거리 구두닦이를 비롯해 다양한 일을 한 미등록 이주노동자로, 실제 영화의 체포 신을 찍은 다음 날 체포되기도 했다고 한다. 이런 뒷받침되지 않아도 될 리얼리티라니...!
영화 후, 엔딩 크레디트가 관객을 안도하게 한다.
아기 '트레저'와 가족들은 미등록 신분이었던 레바논에서의 삶을 정리하고 케냐로 돌아갔고, 그곳에서 안전하고 건강한 삶을 살게 됐다고 한다.
'하이타 아이잠'을 포함해 자인의 여동생 역으로 나온 두 아이는 유니세프 특별지원 프로그램에 참여하며 학교를 다니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리고 자인. 자인은 이 영화의 칸영화제 초청 후, 유엔난민기구의 도움으로 2018년 8월 노르웨이에 정착했다고 한다.
한국을 비롯해 전 세계에 떠도는 시리아 난민 중, 억세게 운 좋은 자인과 가족들(영화에서의 그 가족들과는 분명 다를)이다. 노르웨이의 삶이 자인의 눈에 예쁜 곳이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