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명상: 천불이 나면, 에스프레소 기차에 탑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테이크아웃이요."
"네? 테이크아웃이라고요??"
영하 10도의 날씨에 당당히 주문을 하는 나를 보면서 커피숍 직원이 떨리는 목소리로 되묻는다. "지금 이 날씨에 아이스라니요오?"라고 되묻는 그녀의 동그란 눈을 마주하며 방긋 웃는다. "네, 그란데 사이즈로 주세요! 샷도 추가예요!"
화가 날 때 마법의 주문처럼 나를 식혀주는 주문이 있다. 그 주문은 바로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 주세요!” 그렇다. 한 겨울에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는 사람이 나다. 수면 부족의 30대에 진입하면서 강제로 잠을 깨우는 자명종처럼 커피를 마시기 시작했다. 40대인 지금의 내겐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소화제, 아니 소화기다. 천불이 나는 마음을 차갑게 끌 수 있으니까. 잠을 깨우고 화를 식히는 카페인으로 당장 진화가 필요하니까.
이렇게 주문을 하는 날은 마음의 여유가 없던 때가 대부분이라 초조하게 바리스타의 뒤통수를 주시하면서 커피를 기다렸다. 그래, 난 이 열기를 식힐 필요가 있지.원래 난 잘난 맛에 살던 사람인데, 이 세계는 온화함과 너그러움과 겸손을 요구하지. 그래도 화가 나는 건 사실이야. 지긋지긋한 하루하루를 견뎌야 할 때도 있어. 부당함에 맞서 싸우는 싸움닭이 될 때도 있거든. 이럴 때일수록 냉정해야지. 아이가 장애진단을 받고 등록을 하고 여상히 보낼 수 있던 삶의 일상을 박탈당했으니까. 한량으로 사는 게 인생의 목표였는데, 지금은 강제적 J의 삶을 살잖아? 아, 박사논문 쓸 때도 이렇게 힘들지 않았다며, 이 모든 생각과 함께 커피를 모조리 삼켰다. 마음대로 잠을 잘 수도 없는 생활이 몇 년째 이어지면서 피 속엔 아마 헤모글로빈만큼 카페인도 같이 둥둥 떠다녔으리라.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들이켜면 마음이 진정됐다. 냉수로 꺼지지 않은 천불을 카페인으로 꺼트렸다. 테이크아웃컵에서 느껴지는 손끝의 차가움과 코 끝이 빨개지는 겨울바람 그리고 위를 타고 내려가는 냉기에 나는 뜨거운 속을 식히고 정신을 똑바로 차릴 수 있었다. 매일 독한 술을 마시듯 샷 5개의 아메리카노를 원샷했다. 그렇게 알아차리고 받아들이는 시간을 견뎠다.
지금은 단 하나의 샷이 온전히 담긴 따듯한 에스프레소를 마신다. 꾸역꾸역 참았던 화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놓아두고, 그저 관찰해 본다. 꺼지지 않은 불이 있었기에 여기까지 견뎌올 수 있었음을 받아들인다. 이제는화를 누르지 않고 담을 마음의 커피잔을 찾았기에. 그리고 화를 녹여줄 인생의 디저트들을 하나하나 맛보려 한다. 온전히 혀끝을 감도는 씁쓸한 고소함이 그저 인생의 맛임을 깨닫는다. 언젠가 달콤한 크림커피를 마실 수 있겠지 하며 웃는다.
내가 바꿀 수 없는 상황에 대한 분노보다는 '아 내가 그렇구나. 그래서 화가 났구나'하고 인정해 주세요. 내 마음을 관찰하고 왜 화났는지, 관찰해 보세요.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사실을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감정을 받아들이는 것이랍니다. "내가 화를 내고 있구나"라고 알아차린 순간 한 걸음 멈출 수 있을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