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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성아 Sep 21. 2023

기획 = '기획안'과 '기획자'의 페어링

'에그이즈커밍 이명한 대표'이야기

1. 진짜 행복하려면 과정 자체가 행복해야 합니다.


콘텐츠 제작은 가파른 계단과 비슷합니다. 몹시 어렵게 계단 하나를 올라가서 '아, 이제 됐다'했는데 또 벽이 나오는 거죠. 콘텐츠 제작 전 과정에 10시간이 걸린다고 예를 들면, 결과물이 잘되든 망하든 일희일비하는 시간은 2시간 남짓 불과합니다. 나머지 7~8시간은 그 벽을 기어오르는데 쓰는 겁니다. 가끔 이런 경우가 있어요. '이번만 버티자, 이번 콘텐츠 잘되면 내 인생 레드카펫 깔리겠지'생각하는데, 그건 정말 오산입니다. 좋은 결과를 얻으면 인생전체가 행복해질 거라고 생각하지만, 진짜 행복하려면 일하는 과정자체가 행복해야 합니다. 그건 동료들이 있을 때 가능하고요.



2. 기획에서 중요한 건 '아이디어'와 '만드는 사람'입니다.


대부분 기획안에서 판가름 난다고 생각하겠지만, 오히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건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입니다. 기획안은 조심스럽게 판단하거나 유보를 많이 합니다. 드라마는 대본이 있기 때문에 객관적 판단이 되지만, 예능은 기획안 몇 장이 전부이기 때문에 기획만으로 판단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대신 이 기획을 가져온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평소에 다각도로 파악하려고 노력해요. 콘텐츠에는 만드는 사람의 정서와 성향이 반영돼 있습니다. 그걸 파악하지 못하면 기획안과 만드는 사람의 '페어링'을 정확히 판단할 수 없습니다. 이를테면 평소 멘털이나 체력면에서 약한 동료가 굉장히 하드워킹해야 하는 버라이어티를 가져오면 완주가 어렵거든요.



3. 능력 있는 동료와 함께 일하려면 인간적 관계의 공명도 필요합니다.


전 감정촉수가 예민하고 섬세한 사람이라고 자평합니다. 오래 일하며 느끼게 된 건데 크리에이티브적인 소양을 기르는 것도 중요하지만 결국에는 능력 있는 동료들이 나와 함께 일하려면 일뿐 아니라 인간적 관계에서의 공명이 필요하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리고 한번 주파수를 맞춰두면, 리더를 굉장히 신뢰하게 됩니다. 이 사람이 나를 이해하고 있구나 '안전감(psychological safety)'를 느끼죠. 관리자로 일할 때 이 부분이 강점이 됐습니다. 지금까지 28년간 일했는데 15년은 현업에서 연출을 했고, 나머지 13년은 관리영역의 일이었습니다. 관리자는 일종의 축구감독이라고 제 스스로 정의를 내렸어요. 전략을 세우고 나면 감독이 할 수 있는 일은 경기장밖에서 소리 지는 것뿐입니다. 결정한 후에는 그저 맡겨야지 디테일하게 보고하고 수정하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기획안을 선택하는 것까지 제 역할이고, 그다음은 각자의 몫인 거죠.



4. 에그이즈커밍의 정체성은 '사람 냄새'입니다.


100%라고 할 수는 없지만 크게 성장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디테일을 잘 챙기는 꼼꼼한 성향이 많았습니다. 또 태도적인 면에서 올바른 관점을 가지고 있었고요. 방송 윤리뿐 아니라 사람을 대하는 시선 자체가 따뜻한 사람이랄까요. 에그이즈커밍이 현재까지 가진 정체성도 결국에는 '사람냄새'입니다. 한국어로 하면 "계란이 왔어요"잖아요? 계란말이 반찬을 싫어하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누구나 편안하고 부담스럽지 않게 즐길 수 있는 콘텐츠를 만들고 싶다는 것. 결국에는 콘텐츠와 사람이 하나의 맥락으로 다 연결되네요.



5. 잘 됐을 때 멘털관리가 더 중요합니다.


잘 안되면 그 실패를 다음번 성공을 위한 경험치로 전환시키는 노력을 하게 되는데 잘 됐을 때는 작은 성공에 안주하고 도취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음 도전에 필요한 에너지를 보강하거나 정비하는 시간을 소홀히 하기 쉽죠. 잘 안 돼도 그게 약이 될 수 있다는 긍정적 마인드와 성공이 독이 될 수 있다는 긴장감 사이의 균형의 중심을 잡는 게 더 중요한 거 같습니다. 특히 tvN본부장으로 일할 때는 우산장수아들, 소금장수아들을 둔 기분이었습니다. 모든 쪽에 다 마음이 쓰이지만 절대로 부진한 콘텐츠 담당자에게 힘내랍시고 밥을 사주지 않았어요. 먹어봤자 소화도 잘되지 않거든요. 또 잘되는 쪽 담당자는 잘되니까 밥 사주는 거라고 안 좋게 봅니다. 결과에 대해서는 늘 가볍게 얘기합니다. 정말 힘든 건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이니까요.



6. 5년 후 나의 모습을 그려봐야 합니다.


분기나 반기마다 5년 후 모습을 그려보라고 말합니다. 시장에서 나는 어떤 모습으로 일할지 정체성을 만들고, 거기에 준비를 해야 합니다. 티빙 대표이사로 옮긴 것도 저의 5년 뒤를 상상해 본 후 내린 결과였습니다. 이미 모든 콘텐츠가 디지털, 글로벌화된다는 화두는 명백했고, 거기에 맞는 플랫폼이 OTT였거든요. 저는 제가 끊임없이 그려온 5년 후모습과 일치하는 그림이었기에, 제안이 왔을 때 크게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업계 한복판에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캐치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중요한 건 전문성에 깊이를 더하는 개인의 노력입니다. 내 본업 외 음악, 미술, 문학 등 한 분야에 대한 깊이 있는 사유와 관점이요. 젊었을 때 시작해서 10년간 꾸준히 하면 전문가로서의 깊이는 얼마든 가질 수 있습니다. 콘텐츠 업계는 이 업을 정말 좋아해서 온 사람이 많습니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소진되지 않으려면 의도적으로 본인만의 것을 채워야 합니다. 그래야 지치지 않거든요.




아티클 원문 : https://www.folin.co/article/5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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