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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면아래 Sep 27. 2023

홀로 달콤한 케이크

100가지 요리, 100개의 마음. 스무 번째

퇴근 시간이 가까워왔는데 사무실이 떠들썩하다. 하지만 귀만 쫑긋 세웠을 뿐 빨리 일을 끝내고 가고픈 마음에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동료가 다가와 내 어깨를 두드리며 생일파티가 있으니 어서 나오라고 재촉을 했다. 생일축하를 받는 사람 입장에서는 나 따위는 안 가는 게 더 나을 텐데 하는 표정으로 그 사람의 얼굴을 쳐다보았는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싱글벙글하면서 계속 재촉을 했다. 알겠다고 이것만 마무리하고 가겠다고 웃으며 말해서 그 사람을 보내고 몇 초간 생각을 했다. 갈 거면 빨리 가야 하고 안 갈 거면 가지 말아야 하는데 이미 가야 할 것 같은 분위기가 되었다.


큰 회의실로 들어가니 생일자가 가운데 앉아 있고 다수의 사람들이 주변에 앉거나 서서 수다를 떨고 있었다.  테이블에는 보기 드물게 큰 이단 케이크가 있었다. 역시 팀장의 생일은 특별한 케이크구나 하는 생각이 들며 좀 어이가 없었다. 조용히 서있는데 날 불렀던 동료가 이쪽으로 오라고 손짓하면서 날 불렀지만 웃기만 하고 문가자리를 고수했다. 떠들썩한 축하 노래가 끝나고 팀장이 초의 불을 끄자 우레와 같은 박수와 환호를 해서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좋지 않은 의미에서. 동료는 작은 접시에 담긴 케이크를 내게 가져다주었다. 빨리 자리로 돌아가고 싶어 극구 사양을 했지만 기어코 손에 쥐어줘서 어정쩡하게 서서 케이크를 먹었다. 언제부터 생일에 케이크를 먹었다고 이 유난인지 모르겠다 생각하면서 파티가 끝나고 자리로 돌아가기를 기다렸다.


나보다 윗세대의 생일이 어땠을까. 먹고살기도 힘든 시대였기에 생일 같은 거 챙길 여력은 없을 것이다. 기껏해야 아침에 미역국 정도 먹지 않았을까? 내가 어린 시절을 보낸 80년대는 고성장 시대였다. 대부분의 아버지들은 평생직장을 가지고 있었고 어머니들은 집에서 살림과 육아에 평생을 헌신했다. 살림살이는 조금씩 나아졌으며 먹고 살아가는 거 외에도 즐거운 일을 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어느 때부터인지 우리 집에서도 생일을 챙기기 시작했다. 원래대로라면 생일이야 낳느라고 가장 고생한 어머니를 위한 날이어야 하지만 어느 집이나 그렇듯 우리 집도 태어난 아이를 위한 날이었다. 매번 생일날에는 중국집이나 경양식집에 가곤 했다. 집에서 삼겹살 구워 먹던 생일에 비하면 얼마나 고급스러운 느낌인지 그것만 해도 좋았다.


그런데 어느 날 아버지가 커다란 하얀 종이상자를 들고 집에 돌아오셨다. 우리는 전부 그게 뭔지 매우 궁금했지만 저녁을 다 먹을 때까지 보여주지 않으셨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그릇들이 치워졌고 드디어 그 하얀 상자가 밥상 위에 올라왔다. 아버지가 하얀 상자를 열 때 우리 모두의 심장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하얗고 동그란 케이크이었다. 어른의 한 뼘 정도는 됨직한 높이에 아랫부분은 크림으로 구불구불 모양을 낸 하얀색 케이크이었다. 세상에서 그렇게 하얀 음식을 본 적이 없었다. 그날은 어머니의 생일이었다. 어머니의 나이대로 초를 꽂은 후 성냥을 켜서 하나하나 불을 붙여갔다. 방의 불을 끈 후 촛불에 비치던 기대 가득한 얼굴들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활짝 웃음 짓는 어머니, 흐뭇해하는 아버지. 흥분해서 얼굴이 발개졌을 우리들. 모두의 실루엣이 기억이 난다. 어린 나만 생일축하 노래를 불렀고 어머니가 입으로 후 불어 불을 껐다. 드디어 먹을 시간이 된 것이다. 티브이에서만 보던 그 케이크를 드디어 먹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어머니가 칼로 케이크를 조각내서 아버지 먼저 접시에 담아준 후 우리 들에게도 차례로 담아주었다.  하얀 크림과 노란색 빵들이 겹겹이 쌓여 있었다. 포크로 잘라 한 입 넣었을 때 퍼지던 그 달콤함. 평생 그런 달콤함이 다시 있었을까. 이후 우리 집은 어머니의 생일엔 꼭 아버지가 케이크를 사 오시곤 했다. 가끔 우리 생일에도 사 오시곤 했지만 어머니의 생일에는 항상 케이크를 사 오셨다. 일 년에 한두 번 먹던 그 케이크를 나는 매번 두근거리며 기다리곤 했다. 그러나 몇 년 지나지 않아 아버지는 뇌출혈로 쓰러지셔서 우리 집은 경제적으로 망했고 어머니는 매일 식당에 나가셔야 했다. 우리들은 나이가 되는 대로 집을 나갔고 어린 나만 홀로 남겨졌다. 더 이상 생일 케이크도 다 같이 모여 불던 촛불도 돌아오지 않았다.


내가 케이크를 사서 먹을 만큼 어른이 되었을 때에도 케이크는 특별한 날에 먹는 것이지 아무 때나 먹는 음식은 아니었다. 하지만 프랜차이즈 빵집들이 많아지고  케이크가 우리 곁에 가까이 다가왔다. 졸업, 생일뿐 아니라 만난 지 100일, 크리스마스, 어린이날 등등 기쁜 날이면 케이크를 사서 그날을 기념하며 먹기 시작했다. 그래도 여전히 케이크는 뭔가를 기념하는 음식이었다. 그러다 서양식 카페를 표방한 커피숍들이 늘어나면서 조각케이크를 팔 기 시작했고 케이크는 일상이 되었다. 커피를 마실 때, 배가 고플 때 등등 별다른 의미 없이 일상 간식으로 먹는 음식이 된 것이다.


나에게 케이크가 별 의미가 없어진 지 한참이 지난 어느 날, 어머니의 집에서 식탁 위에 놓인 액자에 놓아져 있는 한 장의 사진을 보았다. 커다란 케이크 위에 초가 빈틈없이 가득 꽂혀 있었고 어머니는 환하게 웃음 짓고 있었다. 작년 생일에 찍은 사진이라고 했다. 하지 말라고 했는데도 굳이 커다란 케이크를 사가지고 와서 다 남겼다고, 아까웠노라고, 다시는 안 그랬으면 한다고 말씀하시면서 작게 미소 지으셨다. 어머니에게는 아직도 케이크는 특별한 날, 특별한 음식이었다. 우리 모두 어머니의 가족으로서 행복했던 날들에 대한 기억으로 더 특별했다. 우리는 이제 커서 다른 가족을 이루고 살지만 어머니는 여전히 우리가 자신의 가족이신 세상에서 홀로 살고 있다.


집으로 오면서 집 앞에 새로 생긴 빵집에서 초코로 된 달짝지근하게 생긴 조각 케이크를 하나 사서 들어왔다. 분명 아까 회사에서 케이크를 한 조각 먹었는데 또 케이크가 먹고 싶어 졌다니 정말 신기했다. 모처럼 어머니께 안부전화를 했다. 길어진 어머니의 걱정을 안심시켜주다 보니 역시 달콤한 게 먹고 싶어졌다. 달디단 케이크가 몸에 들어가면서 심장은 더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회사에서 받았던 작은 접시위의 올려져 있던 케이크의 맛이 조각케이크위에 덧입혀졌다. 두근거림이 멈추지 않는다. 어쩐지 오늘도 잠이 올 것 같지 않았지만 기분은 이상하게 나쁘지 않았다. 기분이 점점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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