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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면아래 Aug 30. 2023

맛있는 흠과

100가지 요리, 100개의 마음. 여덟 번째

아침이면 사과 한 개를 먹으려고 노력한다. 어렸을 때는 아침에 아무것도 먹지 않아도 아무렇지 않았지만 늙어가면서 아침 공복처럼 안 좋은 게 없다는 것을 몸소 깨닫고 있다. 그리고 아침에 먹는 약이 늘어남에 따라 아침에 뭐라도 먹어야 속이 편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일어나자마자 과자나 빵 같은 것들을 먹기 시작했는데 약기운에 정신이 하나도 없는 아침에 과자나 빵은 먹는 다기보다는 욱여넣는다는 느낌이다. 퍽퍽한 밀가루를 물도 없이 입안으로 퍼넣는 느낌은 끔찍하기 짝이 없지만 빈속보다는 나았기에 한동안 그렇게 지냈었다. 그러다 TV에서 주인공이 사과를 먹는 장면을 보고 나서야 아침에 사과를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면 젊은 주인공이 사과를 바지에 슥슥 닦은 후 껍질채 한 입 베어 먹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 대부분 그 분위기가 경쾌하고 좋은 시작, 자신감등을 알리는 메타포로 많이 사용해서 부지불식간 사과에 대한 느낌은 좋은 편이었다. 아니 아침에 창밖을 보며 사과를 한 입 베어 먹는 어른이 된 나의 모습에 대한 동경과 기대가 있었다. 


까맣게 잊고 있다가 불현듯 생각난 사과.


먹고 보니 사과는 한 조각 먹을 때마다 정신이 깨어나는 느낌이고 속도 편안하다. 수면제와 진정제 등등을 한 움큼 먹고 겨우 잠든 다음 날 아침이면 잠이 덜 깨 정신이 몽롱하다. 그 상태로 사과를 멋지게 베어 먹는 건 불가능하다. 테이블 의자에도 겨우 앉을 수 있는 아침이 대부분이다. 조금 정신이 든 후 냉장고에서 사과를 꺼내 과도로 껍질을 조심히 깎고 사과를 자르는 틀(아마도 사과 커터기?)을 이용해서 사과를 분해한 뒤 한 조각씩 먹는다. 어느 정도 먹고 나면 몽롱한 느낌도 없어지고 잠도 반쯤 깨어난다. 더구나 소화도 잘돼서 변비가 질색인 나에게 여러모로 유용하다. 


이제 잇몸이 약해져서 사과를 베어 먹는 건 생각도 못하고 껍질조차 먹기 힘들어서 언제나 껍질을 완전히 깎아서 포크로 찍어먹는 나이가 되었다. 늦는 날에는 회사에서 사과를 먹곤 한다. 회사에서도 내 전용 과도로 깎아서 사과를 6 등분하여 접시에 놓고 포크로 찍어 먹는다. 사무실 칸막이 안에서 혼자 뭘 오물거리며 먹고 있나 궁금해할 법도 한데 아무도 물어보는 이가 없다.


그런데 사과는 철이 있는 과일이고 제철이 아닌 사과는 상당히 비싸다. 나는 제철에 파는 사과를 많이 사서 집에 보관한다. 60~70개 정도를 한꺼번에 사서 사과를 하나하나 물에 씻어서 수건으로 물기를 닦고 랩으로 동그랗게 싸서 냉장실에 보관한다. 그렇게 하면  꽤 오랫동안 먹을 수 있다. 그래봐야 두 달 정도이고 사과는 철이 지날수록 점점 비싸지고 구매할 수 있는 수량도 줄어든다. 그래서 사과가 없는 철에는 다시 빵도 먹고 과자도 먹고 하지만 역시 사과처럼 속이 편한 음식이 없다는 것을 깨달을 뿐이다. 


그런데 우리 동네에는 과일 트럭이 하나 있다. 하천을 따라 차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도로가 있는데 다른 마을로 가는 유일한 무료 도료이기도 하고, 잘 정비된 하천과 넓은 주차장 때문에 동네 사람들도 자주 찾아 통행량이 상당히 많은 편이다. 그 주차장들 중 구석 한켠에 과일을 파는 트럭이 있다. 주차장에서 빠져나가는 쪽에 주차한 뒤 커다란 현수막 같은 것을 트럭에 걸고 사과뿐만 아니라 다른 과일들을 판매한다. 보통 사과 20개에 만원 이런 식으로 적혀있는데 매우 저렴한 가격이다. 철에 따라 수박, 오렌지, 감 등등을 파는데 그래도 사과는 항상 같이 판다. 지나다니면서도 저런 데서 파는 과일이 제대로 된 것일 리가 없다는 생각으로 한 번도 사 먹어 본 적이 없었다. 몇 년을 그 자리에서 과일들을 팔았다. 내가 그 길을 지나가지 않는 날들도 많겠지만 지나가는 날에는 항상 과일트럭이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동네가 개발돼서 허허벌판인 곳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지어지고 수많은 상가들이 그 주변으로 생겨났으며 과일가게 역시 다양한 종류로 주거지역 근처에 자리 잡았지만 과일트럭은 항상 제자리에서 7년 넘게 장사를 하고 있었다. 뭔가 이상하거나 맛이 정말 없을 거라 생각했지만 7년 가까이 같은 자리에서 장사하는 과일트럭을 외면하기는 어려웠다. 


결국 어느 날 과일 트럭 앞에 차를 세웠다. 트럭은 보이는데 주인장은 보이지 않았다. 가까이 가니 트럭 그늘에서 의자에 앉아 책을 보고 있었다. 책을 보는 사람이 정말 드문 시대가 되었고 나의 편협한 경험에 의하면 길에서 장사를 하는 사람들은 스마트폰으로 게임을 하거나 동영상을 보고 있다가 손님을 맞이했기 때문에 책을 읽고 있는 그 모습이 기이하기까지 해 보였다. 가까이 가니 책을 덮어 자리에 놓고 내쪽으로 다가왔다. 하얀 비닐봉지에 십여개는 되어 보이는 사과들이 담겨 가판에 줄지어 올라가 있었다. 얼마냐고 물으니 한 봉지에 만원이라고 했다. 


"가격은 괜찮네요. 맛은 괜찮은가요?"

"흠과라서 쌀뿐이지 사과는 맛있어요"


흠집 사과는 표면에 벌레 먹은 자국이나 다른 흠집들이 있어 제값을 못 받는 사과들이라 정상가보다 저렴한 가격으로 판매할 수 있다고 했다. 흠과 라는 말이 왠지 마음에 팍 하고 꽂혔다. 만원에 한 봉지인 것이 가장 저렴한 것이고 크기가 크고 조금 깨끗해 보이는 것들은 생각보다 가격이 나갔다. 흠과 라는 말에 이상하게 꽂힌 나는 결국 제일 저렴한 봉지를 만원에 구입했다. 집에도 사과가 많았지만 다음 주면 다 먹어 없어질 것이기에 사야 하는 게 맞다고 정당화하며 집에 왔다. 


하던 버릇대로 사과를 하나하나 물에 씻은 후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 낸 후 랩으로 싸면서 보니 흠집이 생각보다 많았다. 흠집도 있고 검은색 점들도 있고 상태가 썩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불안한 마음으로 사과들을 냉장고에 집어넣었다. 


기존에 있던 사과들을 다 먹고 난 후에 드디어 트럭에서 산 사과를 먹을 때가 왔다. 꺼내보니 표면의 검은색 점들이 더 많이 퍼져있었고 그 표면 아래로도 갈변이 진행되어 있어 먹기 전에 상당 부분 파내야 했다. 일반적인 사과를 준비하는 것보다 두 배는 시간이 소요되었다. 낑낑거리며 흠집들을 파내고 커터기로 잘라 드디어 한 조각을 먹었는데 아무 맛도 없었다. 달지도 시지도 않고 사과의 식감만 있었다. 버석거리는 종이 같다. 


실패다. 흠과도 맛은 다르지 않다던 트럭 주인아저씨의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무엇을 기대했던 건가. 흠과가 맛있길 기대한 것일까 아님 흠이 있는 인생도 다를 바 없이 좋다는 걸 증명받고 싶었던 걸까. 무엇이 되었던 기분 나쁜 아침이 되었고 밤에 먹은 약이 깨지도 않은 나는 아침약을 한 줌 털어 입에 넣어 삼키고 비틀거리며 집을 나왔다. 아직도 캄캄한 새벽, 시꺼먼 아스팔트가 울렁거리며 내 걸음을 이리저리 떠밀었지만 내 머릿속은 온통 흠과로 가득 차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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