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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면아래 Feb 11. 2024

토마토가 과일이었을 때

100가지 요리 100가지 마음. 쉰일곱 번째

회사 냉장고를 열어보니 투명한 비닐봉지 안에 토마토가 몇 개 들어 있었다. 최근 다이어트를 하면서 점심을 야채나 과일만 먹는 직원들이 싸 온 듯하다. 보통은 잘라서 용기에 담아 오던데 비닐봉지에 담긴 온전한 토마토는 오랜만에 보는 것 같다.


야채인지 과일인지 항상 논란인 토마토는 어렸을 때 많이 먹었지만 지금은 거의 먹지 않는다. 거의 먹지 않는다는 게 토마토를 먹지 않는다는 게 아니라 각종 요리에 재료로서 들어가서 먹게 되지만 토마토 자체를 통째로 잘라서 먹지 않는다는 뜻이다. 샌드위치나 햄버거에도 들어가고 소스로 만들어서 스파게티나 피자 위에도 올라가고 점점 요리에 쓰이는 범위가 늘어난다. 이렇게 보면 토마토는 사용용도로 보아도 야채가 되어 가는 것 같다


어렸을 때 토마토는 과일처럼 먹었다. 토마토를 사오면 식후에 과일처럼 먹곤 했다. 어머니는 그것을 사과처럼 6조각 정도로 자르거나 슬라이스로 썰어서 접시 위에 담아서 가져오곤 하셨다. 가져온 토마토 위에는 설탕이 흰 눈처럼 쌓여 있다. 각자 포크로 토마토를 집어서 먹으면 토마토의 약간 신맛에 설탕의 단맛이 더해져서 새콤달콤하니 맛이 있다. 다 먹고 나면 과즙이 접시 위에 남는다. 설탕물과 섞인 과즙은 정말 달아서 서로 먹겠다고 가위바위보를 하기도 했다. 잘라주는 사람이 없을때는 끝부분만 잘라내서 설탕을 뿌리면서 스푼으로 파먹곤 했다.


일을 시작하려고 자리에 앉았는데도 토마토 생각이 끊임없이 났다. 약을 줄인후 정신이 또려해지는 것 같아 좋긴 한데 쓸데없는 생각들이 머릿속에 너무 많다. 어차피 내 토마토도 아닌데 자꾸 생각해서 뭐 하나 싶어 다시 일을 시작한다.


'빨간 토마토'


퇴근하고 집에 가는데 상가밖에 임시로 야채가게를 하는 곳에서 토마토를 소쿠리에 담아서 팔고 있었다. 토마토가 제철이구나 하고 지나가려는데 어느덧 내손에 토마토가 들어있는 검정 비닐봉지가 들려 있고 사장님께 돈을 건네고 있었다.


요즘 자주 기억이 사라질 때가 있다. 내가 했는데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며칠 전에도 사무실의 난방이 꺼져서 너무 추운 적이 있었다. 참다못한 나는 누가 난방을 껐지라고 중얼거리고 있는데 앞에 앉은 직원이 내가 10분 전에 껐다는 것이다. 너무 덥다고 중얼거리면서 끄고 왔다는 것이었다. 충격적이게도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익숙한 일을 무의식적으로 하면 기억이 잘 안 난다고 하는데 이건 좀 다른 문제 같았다. 더구나 사람들과 얘기할 때 같은 얘기를 똑같이 두 번  할 때도 있는 것 같다. 방금 전에 얘기하셨잖아요 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역시 갑자기 약을 줄이는 게 문제가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뉴스에 보니 섬망증세는 치매가 오는 조기 신호라는데 괜한 걱정에 어깻죽지가 아파온다.


테이블 위에 있던 토마토를 싱크대에서 하나씩 씻은 후 깨끗한 통에 담아 냉장고에 넣었다. 치매 생각을 하니 식욕도 없어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벌써 그럴 나이는 아니다. 잠시 앉아 있는데 어느덧 밤이 되어 창밖이 캄캄해졌다. 불도 안 켜고 식탁에 앉아 있다가 겨우 일어나 식탁불을 켜고 다시 앉았다.


뭐라도 먹을 생각이었는데 밥도 안 했고 시간은 10시가 넘었다. 이미 저녁을 차려 먹기에도 배달을 시키기에도 늦었다. 왠지 오늘은 음식을 먹고 싶지가 않다.


냉장고에서 토마토 하나를 꺼냈다. 작은 접시 위에 꼭지 쪽이 바닥에 오게 올려놓는다. 접시를 식탁에 올려놓고 과도와 설탕, 티스픈을 가져왔다. 과도로 토마토 윗부분을 조금 자른다. 스푼으로 잘라진 부분을 조금 파서 먹는다. 잘라낸 부분에 설탕을 뿌려준다. 설탕이 어느 정도 녹은 것 같으면 다시 토마토를 파서 먹고 또 설탕을 그 위에 뿌린다. 온몸이 토마토 먹는 법을 기억하고 있다. 계속 설탕을 뿌린 뒤 파내다 보면 달달한 과즙 부분에 다다른다. 설탕과 과즙이 만나 그 어떤 과일보다 맛있는 과일이 된다. 스푼으로 속을 계속 파먹는다. 껍데기가 찢어지지 않는 선에서 토마토내부를 스푼으로 살살 긁어서 파먹다 보면 껍데기가 종잇장처럼 얇아진다. 어렸을 때 먹던 그 토마토의 감촉이 손을 타고 기억이 나서 팔뚝에 소름이 돋는다. 과거는 이렇게 그 촉감까지 모든 것이 기억이 나는데 현재는 시간조차 희미해진다.


‘최근 그사람에게서 연락이 없다. 안온걸까. 내가 기억을 못하는 걸까’


어느덧 토마토는 꼭지와 그위로 동그랗게 된 얇은 껍데기만 남게 되었다. 찢어질 듯 얇지만 찢어지지 않고 모양을 유지하고 있다. 손으로 만지면 터질 듯 흔들린다. 토마토는 나에게 과일이다. 내 몸이 그렇게 기억하고 있다. 아주 맛있고 달콤한 과일이다. 자주 현재를 잊어버리지만 과거는 모든 것을 동원해서 또렷해지고 있다. 사람들과 말하고 싶지만 몇 번을 말했을지도 몰라 입을 다물게 된다. 이미 몇 번을 이야기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누군가와 이야기하고 싶다. 토마토가 과일이었을 때를, 내 모든 감각이 새로운 세상을 배우던 때를 이야기하고 싶다. 언젠가는 그렇게 할 수 있겠지. 그렇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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