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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면아래 Feb 07. 2024

망각의 비빔국수

100가지 요리, 100개의 마음. 쉰여섯 번째

잠이 이어지지 않고 있다. 아니 시작을 못하고 있다. 뒤척거리다 보면 어느새 날이 밝아 오고 있다. 약 없이 잠들기로 결심한 이후 밤은 점점 길어지고 있다. 그래도 일어나는 것만큼은 제시간에 하려고 시간이 되면 벌떡 일어서서 이불을 갠다. 의사 선생님은 임의로 약을 끊으면 안 되고 천천히 줄여나가야 한다고 했는데 천천히 줄인다는 것은 끊지 않겠다는 말과 같다는 생각으로 과감하게 안 먹기 시작했다. 그 과감함은 심연 어딘가에 가라앉아 있고 친절했던 의사 선생님의 나긋나긋했던 목소리만 머릿속에 계속 맴돈다.


오늘은 집에서 일하는 날이지만 식탁 테이블 밑에 계속 누워 있었다. 뭉쳐져 있는 먼지가 눈에 들어왔지만 치울 생각이 나지 않았다. 재택근무를 이런 식으로 사용하면 선의의 피해자가 생길 것이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서 벌떡 일어나서 자리에 앉았다. 멍하지만 약기운에 멍한 것과 잠을 못 자 멍한 것은 조금 다르다. 물을 끓이고 믹스커피를 꺼내려고 찬장을 열었는데 한 개도 보이지 않는다. 어제는 있었나 기억을 해보지만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찬장 이곳저곳을 찾다가 하나도 먹지 않은 비빔면을 찾았다. 찬장 안에 깊숙이 있었던 비빔면은 5개 들이 한 묶음 그대로 구석에 놓여 있었다. 손이 닿지 않아 발받침대에 올라가서 한참을 낑낑대고 손을 뻗어서 라면을 꺼냈다. 35년 전통의 00 비빔면. 이름은 많이 들어봤지만 내가 자주 해 먹는 라면이 아니기에 이게 왜 찬장구석에 있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식탁 위에 덩그러니 라면을 놓고 계속 노려 보아도 어디서 온 물건인지 도대체 기억이 없다. 커피 대신 찾은 녹차를 마시는 동안 점심은 비빔면도 괜찮겠지 하고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집에는 먹을 수 있는 비빔면은 없다. 유통기간은 벌써 1년이나 지나있었다. 별로 좋아하지도 않은 음식을 위험을 감수하면서 까지 먹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냥 버리려니 그 역시 꺼림칙했다.


노트북을 켜고 일을 하면서도 머릿속은 비빔면이 한편을 차지하고 있었다.


‘비빔면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래 이상한 것은 애초에 비빔면이 아니라 비빔국수였기 때문이다. 분명 나는 비빔국수를 먹으려 했는데 먹지 못해 어쩔 수 없이 비빔면을 샀던 것이다. 어떻게 그게 기억이 나는데 산 일은 기억이 나지 않는지 신기했다. 노트북으로 비빔국수 검색에 들어갔다. 엄청나게 많은 비빔국수집들이 있었는데 망향비빔국수라는 비빔국수 체인들이 눈에 들어왔다. 후기도 읽어보고 사진도 찾아보니 기억이 어렴풋이 났다.


맞다. 나는 누군가와 망향비빔국수에 간 적이 있다. 녹색간판이 있는 작은 가게였는데 살짝 매콤한 비빔국수를 파는 곳이었다. 주방 솥에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아주머니들이 몇 안 되는 식탁으로 국수들을 열심히 날랐다. 작고 허름한 가게 안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아주 중요한 사람과 같이 갔었던 것 같은데 누구였더라'


작은 가게였는데 이렇게나 많은 체인이 생기다니 신기했다. 본점은 아직도 경기도 북쪽 끝에 있었다. 그곳에 가면 중요한 사람도, 비빔국수의 사연도 다 기억이 날 것 같았다. 조바심이 났다.


끝내 나는 재택근무임에도 차를 몰고 경기도 북쪽 끝으로 출발했다. 내비게이션상으로 한 시간 반이 넘게 걸린다고 나왔지만 개의치 않았다. 빨리 갔다 와서 늦게까지 열심히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날씨는 좋고 차는 막히지 않았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과거를 찾는 여정치고는 즐거웠다. 나답지 않게 즐거운 노래를 들으면서 그곳으로 갔다.


도착한 곳은 엄청나게 큰 주차장이었다. 그 큰 주차장에 차들이 계속 들어가고 있었고 나도 그 줄을 따라 들어갔다. 주차 안내를 하시는 분들 여러 명이서 들어오고 나가는 차를 안내하고 있었다. 그리고 길 건너편에 망O비빔국수라고 간판이 달린 엄청나게 큰 식당이 있었다. 처음에는 잘못 온 줄 알았지만 몇 번을 확인해 봐도 여기가 본점이 맞았다.


사람들이 우르르 가게 쪽으로 이동했고 나도 얼떨결에 따라서 가게 앞으로 갔다. 가게 앞에는 무인 키오스크 몇 대가 있었고 사람들은 익숙한 듯 키오스크로 주문을 했다. 내 차례가 왔을 때 조금 당황했지만 비빔국수를 주문하고 주문표를 받아 안으로 들어갔다


족히 200명은 한 번에 앉을 듯한 엄청난 규모의 식당이었다. 안내하는 사람도 없어 이곳저곳 바라보다 뻘쭘하게 주방 앞 테이블에 앉았다. 오픈되어 있는 거대한 주방의 최신 설비들 뒤로 하얀색 유니폼을 갖춰 입은 대여섯 명이 계속 국수를 만들고 접시에 담아내어 줬다. 요리를 한다기보다는 제조업 공장에서 일하는 것 같은 움직임으로 계속 국수를 생산하고 있었다.


주방 위에 있는 커다란 모니터는 띵똥 소리를 내며 연신 숫자들을 토해냈다. 주문표에 찍힌 번호가 나오면 사람들이 우르르 가서 음식을 받아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잠시 후 나도 비빔국수 한 개를 받아 내 자리로 돌아왔다. 빨갛게 비벼진 국수는 매웠지만 그래도 먹을 만했다. 기억이 나지 않는 맛이었다. 내가 국수를 먹는 동안에도 사람들은 끊임없이 들어오고 음식을 받고 또 나가고 있었다. 계속 들어오고 나가고 들어오고 나가고. 모니터는 띵똥거리고.


띵똥띵똥띵똥.. 띵똥.. 띵동.


어느새 나는 차를 타고 좁은 길을 달리고 있었다. 갑자기 내가 차를 몰고 있음을 깨닫고 놀래서 멈춰버렸다.

내 뒤를 따라오던 차가 급하게 차를 꺾어 옆을 스쳐 지나갔다. 차는 지나갔지만 커다란 크랙션 소리가 차 안으로 들어와서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아니면 내 머릿속에서 나가지 않는 것일까. 심장이 너무 크게 두근거려서 약을 찾았는데 급할 때 먹는 약을 안 받은 지가 오래되었다는 사실만 기억이 났다. 두근거림이 멈추자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눈물이 빰을 타고 흘러내려 팔뚝에 뚝뚝 떨어졌다. 얼마인지 모를 시간을 그렇게 울고 나서 퉁퉁 부은 눈으로 다시 차를 몰았다. 어느새 집테이블 앞에 앉은 나는 다 식은 녹차를 마시면서 노트북을 켜고 일을 시작했다.


메일이 도착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띵똥. 띵똥. 하지만 내 기억은 아무리 기다려도 도착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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