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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면아래 Jan 31. 2024

남산돈까스의 메아리

100가지 요리, 100개의 마음. 쉰네 번째

오스트리아의 슈니첼이라는 요리가 있다. 고기를 얇게 펴서 튀김옷을 입힌 뒤 튀겨내는 커틀릿 요리이다. 사진만 보면 소스 없는 왕돈까스같이 생겼다. 마치 오스트리아의 슈니첼이 그대로 우리나라로 와서 돈까스가 된 것 같지만 다들 알다시피 돈까스는 일본에서 다시 만들어진 것이다.


아주 어렸을 때는 짜장면 외에는 외식이라는 걸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다 아버지가 큰 맘을 먹었는지 이른바 레스토랑에 데리고 갔다. 그때까지도 우리 가족들은 레스토랑에 가본 적이 없었다. 아마 아버지만 사업차 몇 번 드나들어 익숙했었을 것이다. 레스토랑 이름은 생각나지 않지만 그 공간은 기억이 난다. 어두침침한 공간에 둥근 테이블들이 여러 개 있고 천정에서 테이블로 조명이 비춰지고 있었다. 각자의 테이블 자리 앞에는 사각의 흰 천이 깔려 있었고 포크, 나이프, 수저등이 놓여 있었다. 우리 가족이 앉자 양복을 입은 남자가 와서 메뉴판을 주고 갔다. 나도 메뉴판을 보고 싶었지만 아버지는 손을 살짝 들어 레스토랑의 남자를 부른 후 익숙하게 음식을 주문했다. 그렇게 음식을 시키는 것은 영화에서만 봤던 것이었다.


조금 있으니 얇은 접시에 담긴 수프가 우리 앞에 하나씩 놓여졌다. 아버지는 양념통에서 후추를 수프에 뿌리더니 수저로 수프를 떠먹기 시작했다. 엄마와 우리들은 모두 그걸 따라 했다. 이어서 갈색의 평평한 것이 놓여 있는 접시가 테이블마다 도착했다. 그리고 밥도 그릇에 주지 않고 접시에 얇게 깔아서 주었다. 인생의 첫 돈까스였다. 무슨 맛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 분위기만 생각이 날뿐이다. 동네 개천에서 놀던 우리들에게 레스토랑은 굉장히 고급스러운 느낌으로 기억이 되었다.


이후로 가끔 레스토랑에 가기는 했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점점 가세가 기울어져갔고 우리는 뿔뿔이 흩어져서 살게 되었다.


그렇지만 돈까스는 일상으로 들어왔다. 학교 식당으로, 백반집 반찬으로, 냉동식품으로 수없이 많은 경로로 우리에게 들어와 그 특별함이 사라져 갔다


이후로 돈까스를 특별한 날 사서 먹는 일은 드물었다. 돈까스는 원래 시작이 그랬던 것처럼 배고플 때 고기 대신 배불리 먹을 수 있는 음식으로 다시 돌아온 것이다.


기억도 나지 않는 먼 옛날, 나만 좋아했던 사람이 천둥벌거숭이였던 나에게 돈까스를 먹으러 가자고 했다. 나는 그 사람을 좋아했지만 그 사람은 어떤지 알 수 없었다. 그 사람은 원조 남산 돈까스가 정말 맛있다고 자기가 잘 안다고 가자고 했다. 나는 남산 돈까스라는 것을 처음 들어봤기에 원조라고 해도 그게 무엇인지 몰랐다. 그저 그 사람이 가자고 해서 그러자고 한 것일 뿐.


가난한 우리들은 차가 없었다. 아니 그 시절 대부분 젊은 사람은 차가 없었다. 지하철역에 내리자 한참 걸어야 할 거라고 했다. 상관없다고 했다. 역에 내려서 둘이 같이 걸어서 언덕길을 올라갔다. 나란히 걸었지만 전혀 그 사람에게 닿지 않았다. 생각보다 한참을 걸어서 올라가다 보니 계단이 나왔다. 약간 힘이 들었지만 어쩐지 마지막인 것 같아 그 사람을 뒤쫓아 올라갔다. 올라가자마자 남산돈까스라고 적힌 가게가 바로 나왔다.


음식은 별로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냥 돈까스 였다. 큼지막한 접시에 큼지막한 돈까스가 있었다. 기억나는 것은 여기가 오리지널 집이라는 그 사람의 말이었다. 먹으면서도 여기가 진짜 남산 돈까스라고 몇 번을 말했다. 상관없었다. 난 남산돈까스가 뭔지 모르니까.


그 이후로 그 사람을 다시 만난 적은 없다. 아주 가끔 그 사람이 전화를 하곤 했는데 별 용건이 없었던 건지 길게 이야기하지 못했다. 그런 뒤로 점차 연락이 잦아들었다. 마지막으로 돈까스먹으러 다시 가자는 말을 끝으로 우리의 연락은 끊어졌다. 이후로 사람들이 남산돈까스 얘기를 하면 그래도 아는 척을 하며 그곳을 추천하거나 같이 가곤 했다. 몇 번을 갔어도 특별하진 않았다.


한참 시간이 지난 후 난 서울역 근처 회사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식당에 대해 이런저런 의견을 내기에 이제 나이가 너무 많은 어느 날, 사람들이 남산돈까스를 먹으러 가자고 했다. 생각해 보니 회사는 남산돈까스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다. 회사동료들의 차에 나눠 타고 식당으로 향했다. 그런데 내리고 보니 전혀 모르는 곳이었다. 십몇년을 안 왔으니 외관이 바뀌었을까 하고 생각해 보아도 전혀 모르는 곳이었다. 뭔가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사람들이 우르르 들어가면서 따라 들어갔다.


테이블에 앉아 천천히 둘러보았지만 기억에 없다. 메뉴는 다들 돈까스로 통일. 이제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하는 식전 수프가 나오고 잠시 후 큰 접시에 담긴 돈까스들이 속속 나왔다. 익숙한 비주얼이다. 어떤 사람들은 돈까스를 다 잘라놓고 어떤 사람들은 자르면서 먹는다. 손은 바삐 움직이고 입은 쉴 새 없다. 매일매일 같이 일하고 밥 먹으면서 할 얘기가 그리도 많은 것이 신기하다. 귀 기울여 들어보아도 무슨 이야기인지 맥락을 따라가지 못한다. 그러다 아는 단어가 나왔다. 여기가 진짜 남산돈까스의 오리지널이라고 한다.


"저기 산 중턱에 있는 곳이 오리지날 아닌가요?"


난 거의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얘기해서 아무도 못 들었을 거라 생각하고 다시 밥을 먹기 시작했는데 바로 앞에 앉았던 동료가 말을 받았다


"여기가 원조구요 그쪽에 가게가 있었다가 이쪽으로 옮긴 거예요. 다 옮겼는데 그쪽이.."


뭔가 긴 사정인 것 같은데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다만 오리지널이라는 얘기만 계속 귀에 맴돈다


"여기가 진짜 오리지날이예요"


누가 얘기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난 그 사람을 잊은 지 꽤 오래되었다. 날 바라보지 않았기에 나도 상처받기 싫어 내 마음도 가짜인양 마음속에 묻어버렸다. 상처받는 것은 진실일 때뿐이다.


그런데 모든 마음은 그때마다 항상 진짜다. 지나고 보면 그 깊이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어떤 것은 바닥이 보이지 않는 심해와 같고 어떤 것은 금방 말라버릴 웅덩이와 같았다. 그래도 그 모든 것은 진짜였고 저마다의 오리지널이었다. 심해 어디에선가 계속 말이 떠오른다. 거품처럼 떠올라 수면 위에서 부서진다.


"여기가 오리지날이예요. 날 믿어봐요"


떠오르지 않는 그 얼굴이, 선명하게 기억나는 목소리가 심해로부터 내 마음을 계속 끄집어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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